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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r 30. 2022

소년과 '괴물'의 경계에서

Gaspard Ulliel as Hannibal Lecter




<한니발 라이징(Hannibal Rising)>(2007, 감독: 피터 웨버)

Feat. <자쿠오 르 크로캉>(2007, 감독: 로렝 보토나트)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오 년 전, 두 영화가 만들어졌다. <자쿠오 르 크로캉>과 <한니발 라이징>. 제목에 턱 박혀 있는 이름의- 원탑 주연을 맡은 배우는 당시 스물 다섯이 채 되지 않았던 가스파르 울리엘. 흥미롭게도 자쿠오와 한니발 모두 ‘순응하지 않는 자’, ‘복수하는 자’다. 거친 구분이긴 하나- 어린 시절 외부 요인으로 가족을 잃고 홀로 남겨져, 삶을 앗아간 이들을 향해 적대감을 키워 온 소년들이다. 그 공통점이 연기를 더 수월하게 했을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인물 자체의 성격도, ‘동기’가 발현되는 형태도 많이 다르다.


자쿠오의 ‘복수심’은 불합리한 권력 자체를 향한 저항으로 뻗어나간다. 낭삭 백작 개인에 대한 분노도 물론 있으나, 후에 죽이지 않고 ‘진짜 삶을 살도록’ 놓아주며 그의 가족을 구함으로써 기준을 드러낸다. 작품의 메시지도 분명하다. 과거의 아버지처럼 불공평한 사유로 고발당하지만, 백작의 딸 갈리옷의 진술로 풀려난다. 자쿠오가 재판정 창문에 매달린 어린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짓는 미소와, 갈리옷과 자쿠오-계급이 다른 두 아버지의 자녀-가 나누는 작별의 포옹은 상징적이다. 그,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너무 분명해서였을까, 혹은 너무 두루뭉술하게 희망적이어서였을까, 서사에도 인물에도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연기는 작품의 톤과 일치했고, 가스파르 울리엘은 본인에게 있는 ‘특별한’ 아우라를 최대한 ‘이방인 같지 않은 쪽으로’ 가져갔다. 그래서인지, 그 정방향의 강렬함이 인상적이기는 하였으나 굳이 ‘지금’ 언급할 만한 부분을 찾지는 못했던 것이다.


<자쿠오 르 크로캉>(2007). 다음 영화.


완전히 이입하고 이해하며 연기했을 리 없는 특수한 인간임에도, ‘개인적이고’ ‘무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한니발이 배우로서의 그에겐 더 ‘어울리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인물의 표면적인 차이를 나열해보면, 기반한 계급이 다르고(렉터는 ‘도련님’이라는 점 때문에 수용소에서 따돌림을 당한 듯하다), 한니발의 경우 매우 ‘특수한’ 트라우마가 있다. 늘 친구들과 동지들에 둘러싸여 있던 자쿠오와 달리 늘 ‘홀로’였고, ‘보호자’가 생긴 시점도 성장한 이후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로 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니발 라이징>은 ‘한니발이 왜 그것이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지만, 그의 내면에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함 역시 암시한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그 까다로운 균형을 잡아 줄을 탔고, 결론을 먼저 말하면- remarkable했다고나 할까.


그저 평범하고 용감한 소년으로 보이는 어린 시절과 달리, 성인 한니발은 ‘이상하고 비범한’ 인간이다. 첫 등장부터 압도해야만 한다. 모두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자세로 서 있는 수용소 씬, 대사도 없다. 오로지 몸으로 ‘다름’을 증명해야 한다. 끈질기게 입을 다물고, 매우 바르기 때문에 더- 묘하게 삐딱하고 반항적인 자세로 서 있다가, 시비가 걸리자 찍어버린다. 이후로도 한동안 그에겐 잠꼬대 외의 대사가 없다. 말없이 모든 것을 탐욕스럽게 눈에 담는 데에 집중한다. ‘이것들을 어떻게 할지’ 궁리하듯, 찬찬히 뜯어본다. ‘관찰자’라기 보다는 (그런 말이 있다면)‘흡입자’. 어린 시절까지 내보였는데도, 의중을 다 알 수가 없다. ‘깨끗한’ 눈빛은 무언가-트라우마나 ‘지금 그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들-를 감추는 기능을 한다. 윤리적 잣대가 비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시선의 주인공, 화자인 동시에- 무라사키와 포필, 그루타스 패거리에게까지 화자되고 관찰되며 짐작되는 대상이다.


<한니발 라이징>(2007). 다음 영화.


신체적 고난을 겪어도 힘들기보단 귀찮아 보이고, 긴박한 상황에 놓여도 민첩할 뿐 급하지는 않다. 모든 동작이 깔끔하다. 한니발 렉터: 의사, 검사, 화가, 요리사. 실험 가운을 입고 시체를 가르거나 검을 닦을 때, 그에겐 ‘장인’의 아우라가 있다. 해 보지 않은 일도 완전히 통달한 듯, 익숙해져도 매번 새로이 흥미로운 듯, 적당히 열중한다. 처음 하는 살인도 능숙하다. 익숙할 리 없는 일인데, 수백 번은 해 본 듯 정확하며 -심지어 ‘놓치는’ 게 있어도- 불필요한 제스처라곤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따위는 고민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는 듯하다. 그 이전의, 수용소에서 컨트롤러를 포크로 찍거나 시장에서 부쳐에게 달려드는 행동들에도 어떤 ‘당연한’ 분위기가 있었다. 계획적인 것은 아니나, ‘이성을 잃고’, ‘앞뒤 안 가리고’와도 거리가 멀다. ‘충동적’이지 않고 ‘즉흥적’이랄까(유사한 말이나 뉘앙스가 다르다). 그저 ‘넥스트 무브’를 자연히 알고 망설임 없이 행한다. ‘거짓말 탐지기’에 걸리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의 살인은 ‘복수’만을 향하지 않는다. 죽이고 피를 보는 행위 자체를 즐긴다. 태연한 미소가 떠 있는 입과 으르렁거리듯 일그러지는 입은 한 끗 차이. 선명하게 주름지는 입술의 모양과 드러나는 이가 시선을 끌고, 한니발의 ‘악마적’ 면모를 드러낸다. 두 번째 살인, 노래와 함께 희번덕거리는 눈알, 뺨에 튄 피를 슥 닦고 날름 ‘맛볼’ 때 지나는 전율은 그야말로 ‘미쳤다’. ‘비도덕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어쩌지 못하는’게 아니다. 적극적으로 체화해 쥐고 휘두른다. ‘내가 곧 옳다’는, 아니- 그 ‘옳고 그름’의 잣대 자체가 없는 느낌이다. 때문에 그의 ‘포인트’는 ‘어긋나’ 있다. 부쳐의 머리를 가져다 놓고는 ‘숙모 나 잘했죠?’라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다가온다. 예상한 반응이 따라오지 않자, 설명하는 바는 ‘검의 사용(“그게 적절하다고 생각했어요.”, “검에는 상처가 나지 않았어요.”)’이지 살인 자체가 아니다.


<한니발 라이징>(2007). 다음 영화.


이제껏 주로 표정과 태도를 묘사했으나, 한니발 렉터의 ‘비범함’을 완성하는 핵심 중 하나는 단연 ‘말’. 프렌치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이 내보내는 리투아니안-아메리칸의 영어다. 각 언어의 어조나 발음의 특성 차이 때문인지, 주로 쓰던 목소리보다 음색과 발성이 더 얕고 높다. 언뜻 풍부함이 덜하지만, 날카로워 묘하다. 한니발은 상대가 던진 말을 따라하며, 의문을 담아 곱씹듯 끝을 올린다. 꼭 소리를 뜯어 맛을 보는 것 같다.(ex) “Guilty Knowledge?”) 한니발은 계산된 에너지와 매력을 사용해 성대를 울리고 입술을 움직인다. 혀도 그냥 차지 않고, 휘파람도 그냥 불지 않는다. ‘my lady’, ‘inspector’, 첫 살인 후 뱉는 ‘yumm’ 같은 간단한 표현들마저, 그의 혀 끝에 오르면 ‘다르게’ 들린다.


잠깐 나오는 프랑스어까지- 가스파르 울리엘은 이 작품에서 세 개 국어를 하는 셈이다. 언어적 재능이 있는 이 배우가 한니발의 옷을 입고 독일어로 부르는 노래는, 별거다. 과거 ‘그 집’에 갇혀 있을 때, 패거리들에게 들었던 곡이다. 숲 속 살인을 마무리하며, 또 식당에서 코란스의 딸을 바라보며, 그는 노래한다. 전자에선 힘줘 꼭꼭 씹어 번득이며, 후자에선 차분하고 나직하게 세뇌하듯 읊는다. 트라우마, 동생에 대한 기억과 뿌리부터 연결되어 있는 사운드다. 그들 앞에서 그것을 부르는 행위는 -이미 가슴속에 박힌 과거를 ‘딛고’ ‘미래’를 바라볼 의사 자체가 없다는 뜻과, ‘저들에게도 거대한 고통을 새기겠다’는 의지를 내포한다.


<한니발 라이징>(2007). 다음 영화.


(Q: 한니발이 세상으로부터 숨기는 게 무엇일까?) “한니발이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숨기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 같다. 굉장히 보물과도 같은, 총명하고 흥미로운 한 젊은이의 인간성이, 겪은 일들로 인해 파괴되는 이야기다.”

- 피터 웨버, interview by. Lisa Collins [hollywood.com] (2015.04.08 유튜브 업로드)


“어린 한니발은 그 눈밭에서 죽었어. 지금 그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말이 없어, ‘괴물’ 밖에는.” (포필) 그가 어떻게 하여 “오래 전 죽었고”, “몬스터”가 되었는지 (원작자의 각본으로) 나름의 ‘까닭’을 부여하는 작품이다.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어린 시절 겪은 일이 ‘지우고 싶은’, ‘고통스러운’ 흔적으로 남은 동시에, 복잡하고 기괴한 욕망으로 꼬여 버린 케이스. 그의 ‘인간적인’ 모습과 살인하는 순간의 ‘악마적인’ 모습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 분명한 ‘광기’ 사이사이, 미처 감추지 못한 미세한 떨림들이 비친다. 철저한 계산으로 끼워 넣은 표현은 아닌 듯하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그렇게 쌓아 놓았던 것들을, 마지막에 완전히 터트린다. 자신도 동생의 살을 먹었음을 알게 되자 -이 또한 ‘피해 사실’ 중 하나이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을 테다- 이마에 굵은 주름이 가고, 눈썹과 뺨, 입술이 일그러져 부들부들 떨리며, 끈적한 눈물이 땀과 함께 얼굴 전체로 번진다. 역시 떨리는 손을 입 속으로 밀어 넣다 표효한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거의 유일한 장면. 직후 그루타츠의 가슴에 ‘M’자를 새기며 ‘괴물 같은’ 신음을 토한다. 무라사키의 존재를 인식하고 누그러져 눈물을 뚝뚝 흘리다, ‘용서하라’는 말에 다시 일그러지며 뱉는 단호한 답 “Never.”에, 깊은 괴로움이 묻어난다.


<한니발 라이징>(2007). 다음 영화.


레이디 무라사키는 한니발의 이 시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다. 유사부모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이미 ‘완성’된 행동 방식이나 기준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들 사이 관계의 선은 애초부터 뒤엉켜 있다. 무라사키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가족을 잃었기 때문에, 한니발에게 동질감과 복잡한 애정을 느낀다. 유럽에 있는 아시아인-일상적으로 차별 당하고 한 곳에 머무르기 힘든 ‘영원한 이방인’의 포지션은, 한니발이 무라사키에게 끌리는 까닭 중 하나다. 그에게 그녀는, ‘죽은 동생처럼 나만이 지킬 수 있는 사람’, ‘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 ‘나를 이해할 유일한 사람’, 전부였을 것이다.


“그가 ‘진짜 로맨틱한’ 캐릭터인지는 모르겠다. 그 둘 사이에 어떤 종류의 사랑이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진정한 로맨스라기보단 어떤 강렬한 감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녀는 그의 엄마이자, 자매이자, 연인이었고, 그러한 느낌들이 혼합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 가스파르 울리엘, interview by. Lisa Collins [hollywood.com] (2015.04.08 유튜브 업로드)


“사랑해요.” 한니발은 무라사키를 붙잡듯 그 말을 뱉는다. 사랑의 고백이라기보다는, 나를 이대로 내버려두지 말아달라는 호소, 마지막 남은 인간성의 실마리 같은 것일 수 있겠다. 상대가 떠나자, 그 모든 고통과 공허와 분노의 에너지를 응축한 듯한 모양으로, 맹수처럼 그루타스의 뺨을 물어뜯는다. 그의 우선순위는 이미 형성되었으므로, ‘사랑’도 그가 ‘되어버린 것’을 해체하지는 못했겠다. 그러나 다른 길은 정말, 없었던 걸까? 이 물음은 아마도, 나무들 사이에 서 있던 -검은 가운데 얼굴만 창백하게 빛나며 위험하고 위태롭게 일렁이던- 가스파르 울리엘의 실루엣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한니발 라이징>(2007). 다음 영화.



(내가 본 다른 한니발은 매즈 미켈슨 뿐이라) 이 캐릭터가 ‘렉터 박사가 맞는지’ 단언할 순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가스파르 울리엘은, 충분히 위대했다. <한니발 라이징>은 ‘완전체 한니발’의 또다른 에피소드가 아닌, 이 ‘젊은이’가 지나는 페이즈, ‘한니발이 라이징하게 된 과정’에 대한 영화였고, 그는 그에 알맞은 정도의 깊이와 ‘악마적인’ 표현법을 보여줬다. 너무 ‘초월적’이었으면 오히려 설득력이 떨어졌을 테다.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들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조차 적절했다. 물론 십 년 쯤 후의 그가 연기했더라면 좀 ‘다른’ 깊이와 제스처가 나왔겠지만, 오로지 그 자신과의 비교일 뿐. 이 영 렉터의 피부에 착륙할 다른 누구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 곧 완성될 글의 부분적 일라보레이션 같은 글이었다. 영 한니발 렉터를 보면 쓰지 않을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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