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야노 고 in 후지 미치히토 (1)
<더 패밀리(The Family)>(2021, Netflix)
<아발란치(Avalanche)>(2021, KTV)
<신문기자(The Journalist)>(2022, Netflix)
* <더 패밀리>와 <아발란치>의 구체적인 장면, <더 패밀리>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로 한 감독과 꾸준히 작업하는 배우들도 있지만, 아야노 고는 다양한 감독들과 다양한 작품을 해 온 배우다. 같은 감독과 다시 만나더라도, 몇 년의 간격이 있다. 폭이 넓은 만큼 작품 선택의 기복이나 연기 스타일의 차이도 크다는 것이 나름 n년차 팬의 생각. 헌데, 그가 최근 한 감독과 연달아 세 작품을 찍었다. 일본 사회를 이야기로 가져오는 시도를 지속하는 감독, 후지 미치히토다.
넷플릭스로 향한 그들이 처음 함께 선보인 작품은 야쿠자가 주인공인 영화, <더 패밀리>(2021). 소노 시온의 <신주쿠 스완> 시리즈에서 아야노 고와 이세야 유스케의 탈색모 외에 별로 집중할 거리를 찾지 못했던 나는, 어깨에 힘을 주고 뒷골목을 누빌 그의 모습을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같은 해 제작된 넷플릭스 영화 <호문쿨루스>를 보고 경악했던 기억도 한몫했다. 그 두 작품을 비롯해 <타락경찰 모로보시>나 <아인>을 떠올리며, 그가 ‘강한’ 남성성을 입었을 때의 기본값을 상상했다. 물론 연기, 특히 모로보시로서의 표현법은 훌륭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기대’보다는 ‘예상’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화면 속 야마모토 겐지를 본 후 이 섣부르고 주제넘는 예상은 파사삭 깨졌다. 전형적인 구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연기가 인물의 깊이를 채우며 작품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야쿠자이지만, 단순히 ‘강한’ 남성 리드는 아니다. 작품에는 20년에 걸친 겐지의 모습이 담겨 있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홀로 변하지 않는 중심을 지니고 있어 튀는, 그 단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이다. 아야노 고는 넓은 시야로 인물을 보고, 그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나이와 경험에 따른 차이를 신중히 입는다. 강약 조절이 자유로워 크게 움직이거나 표현하지 않아도 꽉 차 있는 연기는, 역동적이면서 멈추어야 할 때를 아는 연출 안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1999년, 탈색모, 흰 패딩과 바지, 운동화. 건들거리며 장례식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삐딱하게 앉는다. ‘나는 건달이요’ 아우라를 잔뜩 풍기는 실루엣이지만 한껏 날카롭게 뜬 눈에 어린 분노는 단순하지 않다. 겐지는 남다른 환경에서 자라며 어느 정도 삐딱하게 늙어 버렸으므로 ‘보통의’ 열아홉 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 감정, 성급한 혈기,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그냥 ‘양아치’ 같은 폼 등이, 나이를 드러낸다. 마흔 살의 배우가 열 아홉을 연기하는 데에서 오는 위화감이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주로 외형, 분장으로 다 가려지지 않은 세월의 흔적이나, 어쩔 수 없는 낯익음으로부터 나온다.
기준이 확실하고, 마음을 연 이들에겐 적당히 부드럽다. 힘을 주기보다는 뺀 채, 툭툭 던지는 투에 포인트를 두고 말한다. 때문에 별안간 걸걸하게 힘을 주고 확 뱉을 때, 제대로 인상을 남긴다. 난리가 난 와중 홀로 가만히 있다, 태연히 의자를 들어 총을 든 남자에게 마구 휘두르는 그 탄탄한 배짱. 소리를 지르거나 눈을 부라리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상대가 누구든, 힘으로 자신을 누르려는 자일수록 더, 눈을 똑바로 뜨는 겐지. 그 대책 없는 ‘가오’는,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타고난 것도 있겠으나, 특정한 환경에 익숙해져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한 자의 태도 같다. 자신을 구해 준 시바자키 앞에서 멍하니 있던 겐지는 엉망이 된 얼굴로 마구 울음을 터트린다. 한 번 정하면, 허물없이 마음을 연다. 그 충성심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두려울 정도지만, 나름대로 까닭과 중심이 있다. 겐지에겐 가족이 필요했고, 시바자키가 그것을 채워 주었음을, 두 배우는 긴 대사 없이 설득한다.
2005년, 겐지가 야쿠자로서 형님과 동생들을 대할 때, 아야노 고는 특유의 인위적으로 내리깐 목소리를 사용한다. 입은 꾹 다물고 미간엔 힘을 준다. 이유가 있다. 일을 하기 위한 목소리다. 스물 다섯의 조직 간부가 얕보이지 않으려면, 그런 ‘인상’이 필요할 테다. 행패를 부리는 경쟁 조직원을 상대하는 겐지는 섣불리 강한 제스처를 하지 않는다. 가만히 목석처럼 서 있다가, 조용히 병을 들고 따라가 뒤통수를 친다. 힘을 눌러 놓았다가 효율적으로 분출한다. 망설임 없는 동작, 흔들리지 않는 표정. 상대가 자리를 뜨고 나서야 한숨을 푹 내쉰다. 마담에겐 힘을 빼고 상냥하게 부탁한다. 두목 앞에서는 오히려 풀려서는 쑥스러워하는 등 감정을 드러낸다. 아버지 같은 존재이므로,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다르다.
시바자키를 바라보는 겐지의 눈엔 늘 아련함이 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지키겠다,고 할 때는 거의 울 것 같다. 시바자키, 겐지, 오하라. 서로에 대한 꿍꿍이 없는 애정이 담긴 대사들이 너무 진심이라 잠시 그들의 신분을 잊고 긴장을 풀게 된다. 그들도 관객도 방심하고 있을 때 나타난 오토바이. 다급한 겐지의 목소리에 이어 총이 발사된다. 겐지는 다리를 절며 오토바이를 쫓아갔다가, 놓치고, 숨을 몰아쉬고, 찡그린 얼굴을 돌려 차를 응시한다. 멎고, 눈과 눈썹이 잔뜩 쳐진다.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눈물이 잔뜩 흘러나온다. 천천히 저는 다리의 리듬에 맞춰 얼굴이 흔들린다. 정신없이 차 문을 열고 ‘오하라’를 외친다. 도로에 주저앉는다. 전부 원테이크다.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의 감정에 번갈아 포커스를 두며 움직임의 속도를 섬세하게 조절한 연출은, 효과적이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언급해야 할 관계가 있다. 힘을 줄 때와 뺄 때를 정확히 구분하는 겐지가 힘조절을 할 줄 모르는 분야는 연애다. 자신의 상처를 봐주는 유카를 정말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쓰고 옆으로 응시한다. 두 번째 만남, 유카가 방에 들어오자, 억지로 눕히고 덮치려고 한다. 그것밖엔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 하여도 범죄다. 여성을 도구로 보고 대충 내키는 대로 취하려 한 것이다. 헌데 유카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다. 겐지는 두드려 맞고, 놀라고, 배우기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을 대하는 방법을. 이후 유카를 자꾸 찾아가면서도, 꼭 동생들처럼 대한다. 투박하게 붙잡거나, 말을 툭툭 던지며 그냥 옆에 서 있곤 한다. 상대의 마음이 열릴수록 겐지의 태도도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진다. 이런 식의 ‘츤데레 마초’ 서사는 사실 구시대적이다. 애초에 그들 사이엔 권력 관계가 있고, 겐지의 태도는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아야노 고와 오노 마치코, 두 배우의 능숙한 호흡은 장면의 공기를 푼다. 시작이 잘못된 만남이 로맨스로 향하는 서사에 설득 당하게 만든다.
유카가 끌어낸 겐지의 여린 면은, 절망적인 상황과 만나 터진다. 문을 열자, 겐지가 현관에 쓰러진다. 곧 멎을 듯한 숨을 몰아쉰다. 피 묻은 상의를 벗겨주자마자, 부여잡는다. 이어 꽉 껴안는데, 전처럼 강압적인 동작이 아니다. 간절하게 매달린다. 계속해서 가쁜 숨을 토한다. 어깨를 부들부들 떤다. 휘몰아치는 감정이 몸의 고통과 만나 한꺼번에 터지는 것 같다. 계속 강해야 했고, 이제 더 강해져서 견뎌야만 하는데, 힘들고 두렵고 막막하다. 유카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마주 안아주자, 점점 진정된다. 잔뜩 움츠린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죽어 가는 사람처럼 기울어져 키스한다. 울음과 숨을 내뱉고, 끌어안는다. 그렇게 다 쏟아내고, 체포될 때는 초월한 분위기를 띤다. 이대로 끝났다면 ‘낭만적인’ 구시대 범죄물이 되었겠지만, 작품이 보여주려는 건 그게 아니다.
2019년, 형을 살고 나온 겐지는 차창 너머로 거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벅찬 미소를 짓다 말고, 힘이 하나도 없는 시바자키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한다. 이어 복잡한 그늘이 들어선다. 호소노가 ‘이상하게’ 굴자, 차분했던 얼굴에 위기감이 어렸다가, 이내 이해와 체념으로 가라앉는다. 홀로 그때에 멈춘 듯 넋이 나간 채, 겐지는 밀려드는 정보들을 찬찬히 프로세싱한다. 병든 두목도, 늙어버린 형님들도, 활기찬 츠바사도, 거리를 두는 호소노도, 변해버린 모든 것을 동떨어진 위치에서 목격한다. 몸이 너무나 무거운 듯 천천히 걸음을 뗀다. 인상을 쓰거나 미소를 지을 때면, 슬픔도 함께 비친다. 허세와 혈기가 식은 자리에 공허가 있다.
겐지는 유카를, 마지막으로 붙들고 진심을 내보였던 관계를, 잊지 못했다. 만나 확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 사이의 공기엔 이제 십사 년 전 같은 생기가 없지만, 쓸쓸함과 함께 무언가 엉켜있다. 순진하리만치 염치도 대책도 없이 “나한테 오지 않을래?”라고 묻는 눈이, 절실하게 떨린다. 아야의 존재를 알게 되고, 목이 꽉 잠겨 입을 다물지 못한다. 울지도 못하고 아픈 숨을 내쉰다. 탁한 화면 속에서 서서히 먼지가 되어 가는 얼굴에 앞날이 보였던 건 유카, 아야와 함께했던 잠깐. 그들 사이에 정이 남아 있다고 여겼던 건 겐지의 착각이 아니었지만, 그 평범한 행복은 ‘퇴물’ 야쿠자에게 허용되지 않는다.
겐지는 제 존재만으로 주변이 망가지는 것을 목격한다. 무너지는 호소노를 말리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서 지켜본다. 형사가 이죽거리자, 태연히 걷다 갑자기 뛰어 달려든다, 가와쿠라의 머리를 병으로 깨던 그때처럼. 목에 힘을 주고 똑바로 노려본다. 그러나 이내 일그러지며 눈물이 고인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선 채 유카의 원망을 듣는다. 또, 가만히 서서, 무력하게. 천천히 걸어 들어와 손을 내밀지만, 잡지 못하고 거둔다.
“평범한 인간이고 싶었다.” 유카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화면에 깔린다. 나직하고 차분하게 마디마디를 발음한다. 호소하지 않고 담백하게 진심을 전한다. 몽둥이를 휘두르는 겐지의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겹친다. 피범벅이 된 얼굴, 숨을 몰아쉬며 츠바사를 보는 눈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미 다 포기해서 무너지지 않는 사람 같다. 고요하게 극적이다. 담배를 피며 완전히 지친 채 허공을 응시하는 공허한 눈. 찔린 고통으로 찌그러진 얼굴엔 분노나 원망이 없다. 칼을 다 받아내며 호소노를 감싸고, 웃으며 눈을 맞춘다. 물에 빠져 가라앉으며 수면의 빛을 보는 얼굴은 깨끗하고 가볍고 환하다.
겐지는 당황하거나 폭발하지 않았다. 마구 울어재끼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도, 권력의 잘못도, 다 이마의 주름에 새기고, 무거운 어깨에 얹었다. 쉽게 후회하지 않았다, 가족으로 받아 준 건 시바자키였으므로. 쉽게 뉘우치지도 않았다, 돌이키거나 보상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그리고, 이 고리가 츠바사까지 붙들지 않도록 제 손으로 끊었다. 범죄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권력과 시스템의 ‘만만한’ 표적이기도 했다. 시대에 휩쓸린 겐지를 쉽게 비난하거나 동정할 수 없게 한 것은, 후반부 아야노 고의, 힘없고 멍한 채 복잡하고 깊은 감정을 입는 얼굴이었다. 카메라는 서두르지 않고 그것들을 고이 담아냈다.
역시 어느 정도 전형적인 남성성을 입고 작품을 이끄는 인물이지만, 하부는 겐지와 다르다. 연기의 종류도 살짝 다르다. 영화와 에피소드 중심 드라마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아발란치>(2021)는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픽셔널’한 개성을 중요하게 가져가는 작품이다. 인물들도 주제를 반영하며 각자의 매력을 보인다. 하부가 가장 그렇다. 주인공이면서도, 관찰된다. 정의를 말하고, 자기 방식에 대한 자신이 있지만, 다음 글에서 다룰 <신문기자> 속 마츠다 안나처럼 곧게 정도를 따르지는 않는다. 전개를 리드하면서도 중심에서 벗어난 곳에 삐딱하게 기대어 있다. 첫 화에 등장한 과거를 통해 계기나 심리는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종잡을 수가 없다.
다시 등장한 하부, 달라진 건 스타일 뿐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놓은’ 것 같은데,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도 같다. 웃으며 “나만 믿어.”라고 하면, 허세로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감조차 넘은 확신. 아야노 고는 폭이 넓은 목소리 톤 중 약간 낮고 걸걸한 것을 사용하지만, 힘은 많이 주지 않는다. 가벼우면서도 미스터리하다. “….아발란치다.” 가면을 쓴 하부가 카메라를 향해 문장을 마무리할때, ‘아발란치’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때문에 그 대사는 중요하다. 아야노 고는 힘을 주거나 강조하지 않고 담백하게 읊는다. 멋지다. 그는 갈수록, 과장 없이 효과적으로 인상을 남기는 포인트를 능숙하게 찾아낸다.
하부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과 동작엔 웃김과 멋짐이 동시에 있다. 헐렁하니 폼을 잡고 건들건들 돌아다닌다. 연극적으로 손을 샥 펴거나 얼굴을 훅 가져다 대고, 잔뜩 주름을 만들며 씨익 웃는다. 자다 일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한쪽으로 기울어지며 비틀비틀 걷는다. 오이, 여, 요, 어이요 같은 효과음, ‘사스가’나 ‘빙고’ 같은 상투적으로 가벼운 단어들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능글맞게 뱉는다. <MIU404>(2020)의 이부키처럼 생각 없이 해맑지는 않다. 그늘을 가리려다 몸에 밴 장난기 같다. 만화 주인공처럼 웃다가 다음 순간 정색해도 어색하지 않다. 제스처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 ‘하부스럽게’ 구성했음이 보인다.
카즈야와 싸울 때는 별 볼 일 없다는 듯 입이 살짝 일그러졌다가, 무표정으로 돌아와 가볍게 제압한 후 익살맞게 웃는다. 이후 덜 만만한 상대들과 맞붙었을 땐 시원시원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기술은 정확하나, 마구잡이로 몸을 놀리며 ‘즐긴다’. 와하하 소리 내 웃고, 장난처럼 푹푹 찌르고, 상대가 기절하자 광대처럼 웃는 얼굴을 만든다. 그를 응원하고 있어도 좀, 무섭다. 옆에서 목격한 카자마가 질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딱히 기분이 좋거나 재미있는 일이 있지 않아도 항상 입꼬리를 올린 채 이를 드러낸 표정을 유지한다. 허허거리다가도 금방 굳어 으르렁거릴 가능성이 보인다. 계속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배어버린 독기를 감추려고 웃음을 만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힘을 줬다가 풀고, 은근히 깔아놓았다가 한 곳에 집중시킨다. 자칫 어수선해 질 수도 있는데, 그럴 틈을 주지 않는다. 집중을 방해하기는커녕 휘말려 화면에 정신없이 몰입하게 한다.
경찰의 은폐를 말할 때, 하부의 얼굴빛은 진지해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장난기나 갈라짐 없이 정갈하게 낮은 소리다. 이를 악물거나 입을 이죽거린다. 다리를 벌려 앉아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폼을 잡고는 담배를 피운다. 상체를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담배를 쥔 손의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른다. 눈을 올려 날카롭게 번득이며 말한다, “합당한 벌을 줄게.” 이번엔 정갈하지 않다. 으르렁거리듯 허스키하면서도 확실하다. 누굴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섭고 낯설다. 덮어 둔 상처가 잠깐 드러난다.
하부는 빠르다.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다가도 경계를 입으면 눈빛이 확 날카로워지고,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다가도 민첩하게 반응한다. 몸만큼 머리도 빨리 돌아간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중요한 단서인지, 누가 수상한지, 다 알아채고 지나가듯 중얼거리고 적을 제압한다. 긴박한 상황에서는 결정적인 동작을 취할 때까지 몸 전체에 태연함을 유지한다.
이성만큼 감성의 머리가 돌아가는 속도도 빨라, 팀원들의 심리나 낌새를 귀신같이 눈치채고 적절한 제스처로 묻거나 달랜다. 폭발하는 마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나직하게 묻는다. 사연을 듣고는 입꼬리를 올리는데, 눈은 웃지 않는다. 웃다 마는 듯한 이상한 표정이다. 울며 걸어 나온 리나를 툭 안아 머리를 기대게 해 주고는, 진정 될 때까지 그대로 있는다. 상대에게 닿는 말과 손은 부드러운데, 눈은 허공을 노려본다. 다 귀찮은 듯 보이지만 사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신경 쓰고 있는, 또 그럴 역량이 되는 사람. 이타심 때문이라거나 마음씨가 고와서라기보다, 티는 내지 않지만 공감하며 같이 화를 내고 있다. 동시에 그 사건의 분노는 마키와 리나의 몫임을 존중하며, 뒤로 물러나 그들을 감싸고 조용히 제 역할을 빈틈없이 하는 데에 집중한다.
자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입장 표명’은 확실해, 하부에 대한 판단은 사실 어렵지 않다. 극의 초반, 그는 양복을 입고 카자마의 부인을 만나 ‘연기’한다. 한 톤 높인 대사를 흐르듯 상냥하게 읊어, 상대의 경계를 풀고 이야기를 끌어낸다. 예상치 못하게 카자마의 아들을 맞닥뜨렸을 때 역시 상냥하지만, 연기 톤이 아니다. 진심이다. 그 차이를, 아야노 고는 간단히 드러내며, 하부의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아무도 아니고, 아무도 될 수 없는 사람.” 하부는 자연스럽고 미스터리해야 한다. 감정을 보이면서도, 다 드러내서는 안 된다. 훅 들어왔다가,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중심에는, 단단한 진심이 있음을 보여야 한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연기를, 아야노 고는 해낸다.
* <아발란치>의 경우 후지 미치히토가 전 화의 각본/ 감독을 담당한 것은 아니어서, 첫 화 중심으로 풀어 보았습니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