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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Sep 25. 2020

스크린에 스며든,(2)

로버트 패틴슨(Robert Pattinson)(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더 라이트하우스(The Lighthouse)>(2019, 감독: 로버트 에거스)

<하이 라이프(High Life)>(2018, 감독: 클레르 드니)

<테넷(Tenet)>(2020,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라이프(Life)>(2015, 감독: 안톤 코르빈)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굳이 실재했던 인물과 사건을 그린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아도, <라이프>는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방식이 담백하고 정직했으며, 로버트 패틴슨도 그 톤에 맞게 연기했다. 초반부터 관객은 데니스의 캐릭터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상황과 상대를 관찰하는 그의 눈은 투명해, 감정의 뿌리부터 보여주었다. <더 라이트하우스>(2019) 속 ‘이프레임 윈즐로’ 역시 어떤 면에서는, 상황을 관찰하고 판단하며 관객의 눈 역할을 한다. 허나 작품과 캐릭터의 성격이 다르다. 얼굴에 순간의 심리가 적나라하게 나타나나, 그뿐이다. 여전히, 서사나 성정 등, 그런 표정을 하는 ‘기반’을 알 수 없다. 흑백 화면은 거기다 필터를 한 겹 더 씌운다. 로버트 패틴슨은 드러내면서, 드러내지 않는다. 매초의 기분은 바로바로 드러내면서, 얼굴 한구석에 그늘을 만들어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더 라이트하우스>(2019). IMDB.


분장은 물론, 말투도 완전히 바꿨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고, 입을 벌릴 때마다 울퉁불퉁하게 썩은 이가 보인다. 고개를 살짝 내린 채 눈만 들어 빤히 보거나, 고개를 외로 꼬는 제스처는 여전하나, 속에 담긴 빛이 달라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데니스는 ‘기본적으로’ 관찰하고 파악하는 눈을 하고 있으나, 대부분 지미를 향한다. 인물과 카메라의 시선 모두, 영화 속에 머물러 있다. ‘이프레임 윈즐로’의 시선은 종종 카메라 너머를 향한다. 취해 과거를 털어놓은 후,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이쪽을 똑바로 응시한다. 방금 비밀을 털어놓은 건 분명 저쪽인데, 파악당하는 기분이 든다. 단순히 강렬해서도, 순수하고 곧아서도 아니다. 스크린을 뚫고 관객에게 닿는, 탁하고 알 수 없게 빛나는 묘한 시선이다.


<더 라이트하우스>는, 캐릭터가 특수한 작품이다. 단편적으로 보면, 현실에 없었던 배경을 상상해 설정한 <테넷>의 경우가 더 특수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짚는 바는, 표면적 설정보다는 인물의 욕망, 타인과의 상호작용이다. 프로타고니스트의 캣을 향한 태도, 닐이나 아이브스와의 관계에는, 보편적인 감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헌데 ‘이프레임 윈즐로’라는 인물에는 애초에, 이해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없다.


<더 라이트하우스>(2019). IMDB.


일단 처음에 관객은, ‘이프레임 윈즐로’의 시선으로 상황을 보게 된다. 판타지는 아니나 대부분의 사람이 겪어보지 않았을 상황.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해도, ‘부당한’ 대우를 하는 상관에게 반항하는 그의 눈에 기대, 극한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포인트에, 낯설어진다. 수조에 빠진 새의 시체, 비웃는 듯한 갈매기를 보고, 함께 화와 소름이 돋았다가, 갈매기를 무지막지하게 패대기치는 모습에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소름이 돋는다. 로버트 패틴슨이 만들어 뒀던 그늘은 연출과 맞물려 지독하게 작용한다. 그런 식으로, 인물에게 이입했다가 떨어져 나갔다를 반복한다.


초반, ‘이프레임 윈즐로’에겐 대사가 거의 없다. “Yes, sir.” “No, sir.” 혹은 짧은 의문문 정도. 주로 육체노동을 하거나, 토마스 웨이크의 말을 듣거나 듣지 않으며, 대놓고 혹은 몰래 빤히 보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 눈빛과, 뺨과 입가의 떨림 같은 것으로 로버트 패틴슨은 상대에 대한 적의를 드러낸다. 원인은 복합적이다. 변덕스러운 바다, 깨끗한 물조차 나오지 않는 숙소, 감당키 힘든 양의 일거리와 육체의 피로, ‘이상한’ 방향으로 생겨나는 욕구. 이런저런 상황과 상태가 뒤엉킨 채 등대를 허락하지 않는 웨이크에게로 모여 쌓여 간다. 그 분노에 섞여 있는 호기심이, 이후의 행동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고립된 후, ‘이프레임 윈즐로’가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서, 둘은 싸웠다가, 다음 순간 어깨동무를 하고 웃는다. 즐거움의 환호가 분노의 고함이 되기를 반복한다. 개처럼 짖거나 흐느낀다. 그들의 상태는 종잡을 수 없이 괴상하다. 배우들이 어떤 생각으로 연기를 하는지 알 수 없다. 윌렘 데포의 토마스 웨이크는, 속을 알 수 없는-아니 실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인물이다. 로버트 패틴슨의 ‘이프레임 윈즐로’는, 역시 알 수 없지만, 이야기를 따라가야 하는 관객이 붙잡을 유일한 대상이기도 하다. 시선과 시선의 대상, 현실과 환상을 혼란스럽게 오가는 인물. 윌렘 데포가 캐릭터와 거리를 두고 연기를 하는 느낌이라면, 로버트 패틴슨은 속에 푹 들어가 극한의 자아를 온통 끄집어내고 잊어버리는 것 같다.


<더 라이트하우스>(2019). IMDB.


작품의 초반과 후반, ‘이프레임 윈즐로’의 마스터베이션 씬이 한 번씩 등장하는데, 초반에는 단순히 인어 모형을 쥔 손을 강조할 뿐 평범하게 담는다. 후반부에는 그 전 과정이 길게 등장하며, 그가 하는 상상이 화면 사이사이 혼란스럽게 편집돼 있다. 갈수록 몸을 마구 격하게 흔들다가, 끝내는 온통 소리를 지르며 허리를 꺾고, 그대로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운다. 통제할 수 없는 공포와 결합된 호기심과 욕구, 이어지는 절망과 수치심. 어느 정도 ‘이해’해보려는 찰나, 정면을 노려보며 몸을 꼬고 기어가는 모습에 다시, 위화감이 든다.  


테리 길리엄의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1998)가, 약에 취한 라울 듀크가 겪는 환상에 대한 원작의 묘사를 영상에 옮겼듯- 초반 흑백 필터 탓에 약간 관조하는 것 같은 착각을 주던 <라이프 하우스>의 카메라는, 점차 객관적 상황이 아니라 ‘인물이 보는 것’을 그린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프레임 윈즐로-토마스 하워드’는 주변 상황에 반응하는 대신(본인의 상태가 주변을 보는 필터가 되었다는 해석에 따른다면) 자기 머릿속으로 점점 들어간다. 관객은 반대로, 이입하기보단 지켜보며 따라가게 된다. 카메라는 그의 내면이 보는 것을 향했다가, 갑자기 화면 밖으로 빠져나오기도 한다.


관객은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인물의 내면이 만들어내는 환상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짐작이나 해석을 할 뿐이다. 배우는, 실제로 그것을 본 듯 연기하되, 이 인물의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것도 드러내야 한다. 고립돼서 정신이 나간 건지, 빛이 그렇게 만든 건지, 어느 것이 진짜이고 먼저인지 알 수 없는 뒤죽박죽의 상태다. ‘이프레임 윈즐로’가 등대를 열고 ‘빛’을 마주한 순간, 그 혼란은 최대가 된다. 여태껏 ‘이프레임 윈즐로’와 그가 보는 것들을 번갈아가며 담던 카메라는, 이번에는 무언가를 목격하는/겪는 얼굴만을, 길게 담고 그친다. 내 선에서는 묘사와 설명이 불가능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저절로 입이 쩍 벌어지며 ‘이거 어떻게 한 거지’ 하는 감탄이 나오다가, ‘정말 어떻게 했을까’ 싶어 좀 감히, 걱정이 됐다.


<더 라이트하우스>(2019). IMDB.


이어 말하자면,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던 작품이었다. 엎어놓고 연기에 찬사를 보내기엔, 걸렸다. 쓸데없는 오지랖일 수도 있겠으나, 보는 내내 놀라면서도, 배우들, 특히 로버트 패틴슨의 상태를 걱정했다. 신체적으로도 힘들었을 것이다. 고강도 육체노동을 하거나 몸싸움을 하는 장면이 워낙 많았으니. 그러나 그보다, 미쳐서 울거나 악을 쓰거나 할 때, 너무 감정을 혹사하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지만, 어떤 거대한 비유를 위해 캐릭터와 배우를 소비하는 느낌이어서- 개인적인 취향은 아니었달까. 그래도 조심스럽게 묘사를 해봤다. 걸린다고 그냥 덮기에, 이 배우가 보여준 무언가는 지나치게 대단했으니까.  



<하이 라이프>(2018). IMDB.


<하이 라이프>(2018)는 <더 라이트하우스>와 더불어, 고립되어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프레임 윈즐로’에게 삶을 이어나가는 것 자체를 비롯한 본능적인 욕망의 기운이 적나라하게 풍긴다면, 몬테에겐 욕망이랄 것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처음에 완전히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나, 얼굴에 맴도는 분위기는 아주 다르다. 주로 힘을 줘 긴장을 유지한 상태인 ‘이프레임 윈즐로’의 얼굴은 꽉 차 있고, 몬테의 얼굴은 대개 멍하게, 텅 비어 있다. 홀로 끊임없이 생각하며, 서서히 죽어가는-그러니까 사실상 사람은 누구나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만, 대개 의식하고 살아가지는 않는데, 그는 남은 날을 셈하며 죽음의 속도를 자의로 조금씩 높이고 있는 사람 같다.


작품은 차근차근 설명해 주지 않는다. 몬테의 서사를 듣지 못한 채 특수한 상황에 던져진 관객은, 일단 그를 우주에서 홀로 딸을 돌보는 아빠라고 여기게 된다. 딸 윌로우를 향해 부드럽게 높은 톤으로 속삭이는 말투나,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 표정들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아기자기한 표정들을 짓고 끊임없이 말을 하지만,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하는 행동들은 아니다. 가만히 있는 윌로우를 안심시키듯 하는 “Everything’s okay.”도, 엉엉 우는 윌로우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는 “It’s gonna kill me.”도, 꼭, 자신에게 되뇌는 말 같다.


그 한구석은, 꽉 막혀 있다. 어렸을 때 여러 번 읽었던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가슴에 매듭이 하나 묶였다’(정확한 문장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었다. 생소한데 묘하게 와닿아, 꽤 오래 곱씹었다. 바로 그런 느낌이다. 마음속 어떤 부분에 단단한 매듭이 묶여 있는 것 같다. 몬테는 종종 멍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연장을 떨궜을 때도, 냉동되어 있던 사람들을 버리고 난 후에도, 그것들이 떠내려가는 우주에 가만히 눈을 둔다. 언 시체들을 꺼내며 몬테는, 난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밍크를 들며 “너무 가볍네, 밍크.”라고 중얼거린다. 저들과 욕망이나 애정으로 얽힌 클리셰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면서도, 어쩐지 그 아련함이 건조하다. ‘어쩐지’를 불러일으키는 미세한 다름은, 연출 의도를 섬세하게 파악한 연기에서 나온다.    


<하이 라이프>(2018). IMDB.


‘욕망의 주체는 남성/ 대상은 여성’이라는 클리셰를 깨듯, 몬테는 박사에 의해 욕망의 대상이 될 뿐, 아무도 욕망하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드러내지 않는다. 박사는 비꼬듯 말한다, ‘monk수도승’. 실로 몬테는 수도승 같다. 짧은 머리카락 때문만은 아니다. 힘을 최소한으로 사용해 몸을 움직이고, 표정을 만든다. 체르니와 유대감을 형성하며, 그와 있을 때면 편안하고 힘 빠진 미소를 짓는다. 바른 자세로 천천히 걷고, 눈을 확장시켜 저 멀리에 둔다. 평소 대사 톤은, 내레이션과 거의 비슷하다. 중얼거리듯, 나직하게, 입술로 조용조용 말한다. 욕을 뱉어도 별로 상스럽지 않다. 이미 오래전 죽은 마음을 붙든 채, 홀로 버티고, 화내고, 주저앉고, 생각에 잠기고, 사라져 간다.


몬테는 다른 이의 폭력을 제지하는 순간에만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 주먹으로, 보이즈를 강간하려 했던 남자를 거의 반 죽여놓는다. 그러나 반복하여 때리는 동작에는 별 감정이 들어 있지 않다. 그에겐 그런 면이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우정은 있어도 욕망이나 기대는 꺼진 지 오래인 사람이라는 짐작이 든다.


<하이 라이프>(2018). IMDB.


실험영화는 아니나, 실험적인 서사를 지닌 영화다. 클레르 드니는 닳고 닳은 플롯을 기이한 방향으로 비틀어 괴상하고 생소한 무언갈 창조했다. 몬테는, 기억에 없는 성폭행을 당해 아버지가 된 ‘아담’이다. 현실이 그러한 탓이기도 하나 -픽션에서 성폭행을 당해 낳은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서사는 드물지 않으나, 몬테와 같은 케이스는 거의 없다. 태어난 아이를 보는 그의 눈은 복잡하다. 홀로 남은 몬테의 눈에는,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행했고 겪었던 폭력의 순간들이 적혀 있다.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눈이 텅 빈 채로 가만히 있던 몬테는, 갑자기 스스로의 얼굴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몇 번 친다. 뺨을 움찔거리며 남은 화를 삭인다, 이마의 힘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초반 잠든 아이 앞에 주저앉아, ‘널 죽이고 나도 죽을 걸 그랬어’라고 중얼거리던 장면이 떠오른다. 몬테는, 이미 예전에 감각이 다 소진된 사람처럼, 별 표현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절제되었으나 묵직한 감정의 덩어리를 퍽 퍽 하고 드러낸다.


긴장해 얼굴에 힘이 잔뜩 들어간 무표정으로 덮개를 천천히 열고,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멈추어 아이를 찬찬히 보다, 갑자기 시익 웃는다. 카메라가 비추는 각도는, 얼굴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옆모습 위쪽 사선이다. 그 특수하고도 보편적인 감정이, 그 정도의 각도로 드러난다. 아니 그렇게 드러나서, 더 이상하고 벅찬 느낌이었다.


<하이 라이프>(2018). IMDB.


딸이 자라고, 머리칼이 샌 몬테는, 자주,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있거나, 몸에 힘을 쭉 빼고 앉아 있다. 곧 죽을 사람처럼, 피로한 눈을 찌그리며 기지개를 켜고, 입을 움츠리고, 멍하게 웃는다. 딸의 어깨에 팔을 두르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동작은, 오랜 친구에게 하듯 무심하고 투박하고, 따뜻하다. 전과 말을 뱉는 모양은 비슷하나, 목소리가 더 쉬고 지쳐 있다. “So what?” 우주선에서 나고 자라, 타인이 필요하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윌로우의 물음에, 몬테는 널 어쩌면 좋을까, 하는 얼굴로 이마를 쓸며 허탈하게 웃는다. 이 표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개를 데려오지 않은 그에게 윌로우가 ‘cruel’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화내자, 몬테는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눈을 하고, 높게 흔들리는 톤으로 중얼거린다. “What do you know about cruelty?” 이어지는 “Move away from the door.”는 (아마 이제까지 중 가장) 언성을 높인 경고인데, 겁을 잔뜩 먹은 듯 소리가 높고 새되다.


몬테는 인간의 ‘본능’, 종 유지의 ‘의무’ 같은 것을 따르지 않는다. 원치 않았던 자손과 함께 블랙홀로 뛰어든다. “You’re special. So different. Ain’t like no one else. I love that.” 자살하기 전 딸에 대한 복잡한 애정을 표현하는 대사다. 쉰 목소리로, 짧은 문장들을 끊어 툭 툭 뱉는다. 살짝 내리깐 눈은 윌로우를 향하고 있지만 그 순간 우주선에서의 모든 기억을 다 떠올리고 있는 듯, 초점이 흐리다. ‘블랙홀 속으로 비행하기’는, 표면적으론 애초의 ‘임무’를 따르는 행위이지만, 몬테 스스로 택한 자살이기도 하다는 것이, 새삼스레 와닿았다.



영화가 좋았냐, 고 하면 답하기 망설여진다. 그런데 자꾸 곱씹게 되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며칠 내내, 몬테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동안, 엔딩크레딧에 흘렀던 사운드트랙, ‘Willow’를 들었다. 여리게 흔들리는 그 목소리가, 왠지 짐작했던 대로-로버트 패틴슨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윌로우에게 건네는 말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세상에,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 같았다, 영화 속 몬테의 속삭임과 시선처럼.


<하이 라이프>(2018). IMDB. “You’re special. So different. Ain’t like no one else. I love that.”



닐에 관한 설명이 짧았던 것은, 상영 중인 작품이라 돌려볼 수 없어서이기도 했으나,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운은 남는데, 까닭을 적으려 하니, 문장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요새 많이들 쓰는 표현대로 '스며들어서', 그가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 거다. <라이프>나 <하이라이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칫 과해질 수도 있었을 <더 라이트하우스>에서와 같은 연기조차, 과장과 생략을 잘 조절해 -그러니까 데니스처럼, 계산이 아니라 직감으로 하는 듯- 화면 속 제자리를 찾아 파고들었다. '잘한다'고 각인시키려 애쓰는 대신, 스크린에 스며듦으로써, 존재감을 증명했다. 그의 연기가, 점점 더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기를 바란다. 아마 그럴 것이다.


<하이 라이프>(2018).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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