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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Sep 25. 2020

스크린에 스며든,(1)

로버트 패틴슨(Robert Pattinson)(1)



 

<테넷(Tenet)>(2020,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라이프(Life)>(2015, 감독: 안톤 코르빈)

<더 라이트하우스(The Lighthouse)>(2019, 감독: 로버트 에거스)

<하이 라이프(High Life)>(2018, 감독: 클레르 드니)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세계를 휩쓸 무렵, 나는 짐 자무쉬의 힘 쭉쭉 빠지는 뱀파이어물에 푹 빠져 있었다.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벨라와 에드워드의 유명세와 가십은 귀에 들어왔고, 그런가 보다 하였다. <런어웨이즈>(2010)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작품들을 통해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에 호감을 갖게 되었으나,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세드릭 디고리로 봤을 뿐이었고, 딱히 다른 모습이 궁금하진 않았다. 몇 년 후, 데인 드한의 캐릭터를 살피기 위해 <라이프>를 봤다. 와중에 상당히 여러 번, 로버트 패틴슨에 관한 글도 시작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최근에 <테넷>(2020)을 보고 말았다. <테넷> 이전, 크리스토퍼 놀란과 로버트 패틴슨에 대한 내 감흥에는 유사한 면이 있었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완성도 높은 표현력을 보여 주는 영화인들 -리스펙은 하지만 딱히 팬은 아니었던. 그러나 <테넷> 이후, 여전히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음 작품에는 딱히 호기심이 생기지 않지만, 로버트 패틴슨의 다음 작품은, 대놓고 기대하게 됐다. 뱀파이어의 미모로 화제가 됐던 그 얼굴은, 화면에 스며들어 내가 스토리에 집중하는 기준이 돼 줬다.


<테넷>(2020). IMDB.


사실 관객에겐 과 프로타고니스트의 ‘우정’에 이입할 만한 시간이 별로 주어지지 않는다. 구조를 이해하려고 온 신경을 쓰고 있다가, 이제 다 끝난 건가 하고 긴장을 약간 풀고 있을 때,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이브스 뒤를 서둘러 따르던 닐이 마치 요약하듯, ‘너에겐 시작이고, 나에겐 끝’이라고 설명한다. 나왔던 당시에는 관계의 깊이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였던 대사 “Our rule.”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동작은 급하나 얼굴의 미소는 여유롭다. 그런데 슬프다. 짐을 둘러메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사선으로 상대를 본다. 구조의 뛰어남과는 별개로 서사에 이입이 잘 되지 않고 있었는데, 그 각도 때문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닐의 존재 자체가 복선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론 서사나 연출보단, 연기가 설명해 준다고 느꼈다. 애매하고 묘한 제스처, 까닭 모를 쓸쓸한 여유. 말과 행동에 묻어나는, ‘미래로부터 온’ 사람 같은 뉘앙스. 캐릭터 자체가, 아련하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의 눈에 고인 눈물의 설득력은, 로버트 패틴슨의 슬픈 미소에 있었다. 그가 ‘테넷’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는 기사를 얼핏 본 적이 있다. 그랬든 어쨌든, 그가 드러낸 닐의 감정선은 놀란 팬도 물리학도도 아닌, 나 같은 평범한 관객이 집중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테넷>(2020). IMDB.



<테넷>의 닐이 통찰하는 얼굴이었다면, 데니스는, 관찰하는 얼굴이다. <라이프>(2015)는 데니스 스톡이 제임스 딘의 사진을 찍어 ‘라이프’지에 내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다, 마치 영화 속 지미처럼, 서두르지 않는 템포로. 화자는 데니스다. 본인의 서사를 지니면서, 지미를 관찰하는 카메라의 역할 또한 한다. 생각나는 대로 비교하자면,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를 보는 닉 캐러웨이나, 이셔우드의 <베를린이여 안녕>에서 베른하르트 란다우어를 보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역할. 배우에겐 전설적인 ‘대상’으로 존재하는 제임스 딘을 연기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있겠다.


지미와 데니스는 둘 다 아티스트지만, 성정과 상황은 다르다. 지미는 자기 표현대로 ‘게으른’ 자신만의 속도와 온도로, 기분과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 막 스타의 자리에 올라 그 느긋한 균형이 자꾸 어긋나자 답답해하고, 관심을 부담스러워한다. 인생에 스스로의 자리를 만들 여유가 없었던 데니스는, 타인과 세상의 속도에 맞춰,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 사진에 재능, 열정, 자부심이 있고, 스스로가 기획한 사진을 찍길 원하나, 의뢰하는 잡지사가 제시하는 조건에 맞게 작업해야 돈을 벌 수 있는 상태다. 그는 지미의 얼굴에서 기회를 본다.


<라이프>(2015)


데니스에겐 스타를 알아보는 감각도, 그 스타의 진실된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할 순발력도 있다. 계산보다는 직감에 따라 움직인다. 지미처럼 강한 캐릭터를 갖고 있지는 않으나 나름의 고집과 기준이 있다. 예민하고 섬세하다. 스스로를 잘 숨기거나 멋져 보이게 꾸며낼 줄 아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표정이 아주 풍부하거나 다양하지는 않으나, 순간순간의 속내가 투명하게 읽힌다. 감정의 흐름이 ‘보편적이지 않은’ 지미와 대조되어서 이기도 하지만, 데니스가 ‘평범하게 순수한’, ‘나쁘지 못한’ 사람이어서 그렇기도 하다.


멀끔하게 차려 입고 세련된 미소를 짓지만, 근육이 금방 굳어진다. 눈은 내내, 동그랗게 뜬 채 긴장해 있다. 카메라를 들며 생긴 버릇 때문인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고 있다. 톤은 일정하고 낮게, 발음은 명확하게. 그러나 빠르고 급하게 말하느라 약간씩 더듬기도 한다. 유머 감각은 자조적이고 시니컬하고 힘이 쭉쭉 빠진다. 지미가 오토바이 뒤에 타겠냐고 묻자, 속으로는 질색했으나 티 내지는 않고 또 굳이 숨기지도 않으려는 얼굴로, 잠깐 눈을 내리깔고 굳었다가, 부드럽게 그러나 방어적으로 거절한다. 결국 거절에 실패하고, 도착하자마자 사색이 되어 화장실을 찾는다. 전개상으로는 ‘장소 이동’에 해당하지만, 데니스와 지미의 캐릭터를 은근히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라이프>(2015)


이런 ‘도시 촌놈’ 같은 분위기를 종종 풍기며 다급하게 쫓아다니는 데니스와, 그를 느긋하게 대하며 가끔 피해 다니는 지미의 모습은, 대조되며 웃음을 부른다. 전화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축 늘어져 있다가, 지미가 전화를 받자 급하게 벌떡 일어난다. 방 앞에서, 약간 어색하게 머뭇거리며 지미를 부른다. 대답이 없자, 대뜸 옆에 있던 양철통을 밟고 올라가 문 너머를 들여다본다. 질색하며 문 옆에 숨은 지미와 틈 너머로 빼꼼 보이는 데니스의 치켜뜬 눈. 좋아하는 장면이다. 두 배우의 재치 있는 호흡 덕에, 이런 행동을 하는 데니스가, 그렇게 의뭉스럽거나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며, 지미가 그를 그렇게 혐오하지 않는다는 것도 느껴진다.


지미를 따라간 술집에서, 데니스는 약간 삐딱하고 어색하게 앉아, 관찰하고, 건배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씬 중 하나는, 그가 벤제드린에 취한 후에 나온다. 지미는 어사와 춤을 추고, 베로니카는 거의 울며 그 광경을 지켜본다. 데니스는,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그를 향해, 뉴욕에 대한 감상을 열정적으로 늘어놓는다. 카메라의 초점은 베로니카의 휙 돌린 얼굴에 있다. 그 흐린 화면의 반쪽에서, 로버트 패틴슨은 열심히, 오락가락하는 톤으로 긴긴 대사를 쉬지 않고 뱉는다. 뺨은 벌게져 있고, 이목구비는 집중하지 못하고 따로 논다. 그 부자연스러운 흥분을 모조리 자연스럽게 표현해, 중심이 본인에게 벗어나도록 하면서, 존재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아, 한 화면에 여러 정서가 공존하는 데에 핵심 역할을 한다.



<라이프>(2015)



이런 그에겐, 아들이나 전 와이프를 살가운 톤으로 대할 ‘재능’이 없다. 아들을 만났지만 어쩔 줄을 몰라, 전 와이프가 지나가듯 던진 말대로 눈이 쌓인 공원에 데려간다. 아들과 나란히 걸어가는, 아들과 벤치에 앉아 있는 뒷모습은, 잠잠하지만, 어쩔 줄 몰라 보인다. 데니스는 아들이 샌드위치를 먹는 모습을 찍는다. 뭘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자신이 가장 익숙한 것을 하는 것 같다. 아들이 카메라 부품을 손에 쥐자 반사적으로 건조하게 제지한다. 자상 해지는 법을 몰라 어색한 말투로, 고개를 기울이고 얼굴을 난처하게 구긴 채, 머뭇거리며, 간결하게, 가봐야 한다며 사과한다. 아들을 사랑하고 위하지만,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고 대하는 법이 서투르다. 시간을 들여 노력할 정도의 우선순위가 아니기도 하다.


<라이프>지에게 한 번 거절당하고, 옛 가족에게 못 볼 꼴을 보인 후, 데니스는 다 포기한 듯 가라앉는다. 씁쓸한 미소를 짓고, 허공을 멍하게 응시하고, 고개를 자꾸 숙인다. 흥미롭게도 데니스와 지미의 속도가 비슷해지는 순간이다. 허나 오래가지는 않는다. 놀이처럼, 빗속을 걷는 지미를 찍던, 비에 축 젖은 데니스의 얼굴에, 빛이 반짝거린다. ‘인디애나에 가야 될 것 같다’고 말한다. 눈은 피사체에 고정시킨 채, 입술 새로 말이 흘러나오듯 중얼거린다. 아티스트로서의 직감이 무의식 중에 결정으로 나온 걸로 보인다.


<라이프>(2015)


평소 기회를 보느라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던 눈은, 스스로의 포부나 작업에 대해 말할 때는 다른 느낌으로 커져, 번뜩인다. 비슷하나 더 본능적이고 재빠른 번뜩임은, 작품을 찍을 때 나온다. 지미를 처음 만난 파티에서 사진을 찍을 때 보이던, 어쩐지 ~찍긴 하는데 내가 이걸 왜 찍냐~ 하는, 그 순간과 스스로에 대한 약한 혐오가 모두 묻어나는 눈과는 아주 다르다. 정말 찍고 싶은, 아니 찍어야겠는 -이 작품에서는 지미의, 이발을 하는, 기자회견장에서 애인의 결혼을 축하하는, 담배를 무는- 순간을 포착하고, 사진을 찍을 때, 데니스의 눈은 날카롭게 번뜩인다. 그 눈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향하는 적은 없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본질을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인디애나에서, 데니스는 어색하게 눈치를 보며, 별 말을 할 기회도, 사진을 찍을 타이밍도 보지 못하고 앉아 있다. 예의를 차리느라 입꼬리를 올리지만 초조함이 다 드러난다. 입과 눈가에 불안이 어려 있다. 그러다가도, 영감을 받으면 금방 눈이 번뜩이며, 공간에 있는 사물과 사람을 능숙하게 배치한다.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인다. 거창한 명분이나 멋진 줏대를 읊기보단, 행동이 먼저 나가는, 그게 데니스의 방식이다. 집중하느라 입을 살짝 벌리고 잔뜩 힘을 줘 찌푸린 로버트 패틴슨의 얼굴은, 영락없는 포토그래퍼, 아티스트의 것이었다.


<라이프>(2015)


지미를 졸졸 따라다니던 데니스가 드물게 언성을 높이는 장면들이 있다. 먼저, 기자회견장을 나온 후, “You are this other stuff.”라고 터트리는 지미의 말에 대응할 때다. 목을 살짝 뒤로 빼고, 약간 빈정이 상한 얼굴로 차분하고 날카롭게, 의문문의 형태를 띠고 있는 몇 문장을 늘어놓다, 마지막 문장의 끝을 내린다. “네가 느끼는 상실감이 진짜라고.” 곧바로 진정하고는, 설득으로 넘어간다. 다른 하나는 인디애나에서, ‘걘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른다’는 지미의 말을 엿듣고 화내는 장면이다. 앞이 지미의 태도에 대한 순간의 반응이었다면, 이번엔, 좀 더 깊고 복잡하다. 현실에 짓눌려도 꼿꼿이 움직였던 바탕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채로, 내 예술을 향해 간다’는 신념이, 상처받았다. 거기에 상황과 현실에 대한 자각이 겹쳐, 복합적으로 감정을 터트린다. 얼굴이 벌게져,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전에 없는 흥분 상태로 마구 말한다.


오래 가진 않는다. 홀로 앉아 가라앉혔다가, 지미와 사촌동생이 노는 소리를 듣고, 씁쓸하게 가라앉은 그대로 흐뭇하게 웃는다. 그 어두운 옆모습으로 대사 한 마디 없이, 로버트 패틴슨은 데니스가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알려 준다. 절대 누구나 한때 겪는 정서 같은 것으로 요약해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거기에는, 열여섯부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던, 데니스의 삶의 그늘이 접혀 있었다. “어떻게 넌 그렇게 다 쉬워?” 계속 이어지는 생활과 생활에 쫓겨 여기까지 온 자신과 달리, 항상 느긋해 보이는 지미에게, 데니스는 묻는다. 그 씬의 핵심은, 대사 자체(물론 딱히 맞는 말도 아니다)가 아니라, 그것을 뱉는 데니스의 심리다.


<라이프>(2015)


데니스가 발견한 건 지미의 재능만이 아니다. 스타 제임스 딘이 아닌 ‘지미’의 ‘다른’ 순간들을 목격할 때마다, 수정하지 않고 ‘온전히’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러나 셔터 소리가, 그 ‘온전한’ 모먼트를 깨트린다. ‘모든 것이 다 빨리 변한다’며 생각에 잠긴 지미를, 데니스는 찍는다. 지미는 순간의 불쾌감을 숨기지 않지만, 그 정도로 넘기고, 데니스도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 대칭 샷에, 둘 사이의 얇은 벽이 느껴졌다.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차이를 받아들이며 동업자와 친구 사이에 머문다. 관객은, 그 관계를 느낄 수 있다. 로버트 패틴슨이 여태껏 차근차근 올려놓은 시선 때문이다. 비슷한 벽은, 지미가 프리미어 직전 LA에 가자며 찾아왔을 때도 느껴진다. 이번에는 허공을 향하는 각자의 얼굴에, 어떤 예감 같은 것이 어린다. 창문을 통해 지미를 바라보는 데니스의 눈에 스치는, 설명할 수 없는 빛이 마음을 흔들었다.



지미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건 데인 드한이기도 하지만, 그를 관찰하는 로버트 패틴슨의 눈빛이기도 하다. 감정을 드러내어 공감을 불러일으키되, 장면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로버트 패틴슨은 담백하고 정직하게, ‘보편적이고’ ‘평범하게’, 데니스의 순간들을 지난다. 정서의 겹은 절대 얇지 않으나, 엇갈리지 않고 차근차근 쌓여 압축되어 있어, 오래도록 곱씹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음 깊숙이 내려가더라도, 오래 머무르지 않고, 휙 넘겨버리고 다시 주위로 시선을 준다. 로버트 패틴슨은 정확히 알고 있다. 이 이야기 속 데니스의, 자신의 역할을 알고, 화면에 스며든다.


<라이프>(2015)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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