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다 마사키 as 쿠즈미
스다 마사키 as 쿠즈미 in <MIU404>(2020, TBS)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나-리-카-와-군!”
“나-리-카-와-군!”이라니. 예상치 못했다. 스다 마사키가 미스터리한 인물로 나온다는 정보는 알았고, 이쯤에서 나오겠지 하고는 있었다. 근데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대충 어두침침하고 시크하게 폼을 잡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활짝 웃으며 방언으로 흐늘흐늘 익살맞고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 남자는, 내가 ‘알던’ 스다 마사키가 아니었다.
통화를 하며 휘적휘적 횡단보도를 건너다, 아이를 보자 허리를 굽혀 해맑게 인사한다. 돌다 자전거와 부딪힐 뻔 하자, 역시 구김살 없이 웃으며 곧바로 사과한다. 범죄가 삶의 방식이지만, 음침하거나 불안한 구석 없이 밝아, 쉽게 사람들 속에 섞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뭔가 이상하다. 표면적 말투나 제스처는 전에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유사하나,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입꼬리를 찍 올려 웃지만, 쇼(<민왕>)의 순수한 눈웃음은 없다. 적당히 트렌디하고 화려한 옷차림 탓에 언뜻 자유로워 보이지만, 유키토(<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의 올곧은 눈빛이 없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뒹굴며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칠 때는 타쿠지(<그곳에서만 빛난다>)가 떠오르는데, 그 티 없는 방정과는 한참 다르다.
얼굴도 옷차림도 젊지만, 건들거리며 걷거나, 손을 훅 들거나, “편리하네~” 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려 웃음을 지으며 검지로 SNS 화면을 내리면, 나이 든 사람 같다. 혼자 있을 때 종종 보이는, 흥미를 잃은 듯한 눈빛은, 아주 오래 세상에 머물렀거나,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부터 뚝 떨어진 존재의 느낌을 준다.
2. “그게 내게 어떤 메리트가 있어?”
마른 어깨에 힘을 뺀 채, 주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다. 건들건들, 휘적휘적, 때에 따라 흐느적흐느적이나 휘청휘청이 되기도 한다. 우습고 특이한, 다가가기 쉽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붙임성 좋게 다가오는 사람.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려 웃는 것도, 어쩌면 방언을 쓰는 것도, 그러한 캐릭터를 구성하기 위함이다. 만사 귀찮은 한량의 태도를 입은 채, 모두의 심리를 파악하고 조종한다. 도움과 정을 받는 줄로 착각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경로로 단단히 묶여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매번, 처음 말을 거는 것은 쿠즈미, 이후 계속 매달리게 되는 건 상대. 사람을 손아귀에 놓고 이용해 먹는 쿠즈미의 방법이다.
반갑게 인사하고 쾌활하게 음료를 주문한 뒤, 나리카와에겐 관심이 없는 듯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주위를 대강 둘러본다. 장난스러운 말투로 일을 지시하고 돈을 건넨다. 손에서 손으로 주는 대신, 내려놓고 톡톡 두드린다. 그리고, 마법이 시작된다. 검지를 뻗어 나리카와의 시선을 집중시킨 뒤, 휘 팔을 젓다가 눈앞에서 딱 하고 소리를 낸다. 손에 ‘도넛 EP’가 있다. 직후, 스다 마사키가 하는 ‘얼굴 흐름’이 있다. 힘을 뺀 눈을 똑바로 든 뒤, 차갑게 내리깔고 눈썹을 살짝 치켜 뜸과 동시에 입을 약간 다신다. 눈가에는 냉소가 있다. 이토록 쌔할 수가 있을까. 무의식을 협박하는 것 같다. 약을 나리카와의 잔에 떨어뜨린다. “이제 얼마든지 벌 수 있어.” 입은 격려의 말을 뱉지만, 날카로운 시선은 상대가 잔을 들 때까지 떼지 않는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빵!’ 하고 소리지르거나, ‘짖거나’, 힘을 줘 긴 대사를 뱉을 때는, 오히려 별로 무섭지 않다. 소름이 돋을 때는, 가만히 화면이나 사람이나 허공을 응시할 때, 조용하고 차갑게 겁을 주거나 쳐낼 때다. 쿠즈미는 힘을 주는 대신 빼는 방법으로 휘어잡는다. 눈은 부라리는 대신 느긋하게 뜨고, 말은 무게를 잡는 대신 아무렇지 않은 듯 술술 넘긴다. 들뜬 나리카와의 말을 ‘들어주다’가, ‘에토리’라는 이름이 나오자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무관심하게 대강 구르던 눈동자는 날카롭게 사선으로 상대의 얼굴을 응시한다. 금방 또 장난스럽게 대화를 잇고 화제를 돌렸다가, 눈은 핸드폰에 둔 채, 목소리를 차분하게 내리깔아, 지나가는 말을 하듯, 경고한다.
에토리에게 붙잡힌 나리카와가, 살려달라며 전화를 건다. 쿠즈미는 미동 없는 얼굴로 말한다. “나리 군, 그게 내게 어떤 메리트가 있어?” 그리고 차근차근, 제 이름 뜻을 설명한다. “쿠즈미야.”에서는 주변 공기마저 착 가라앉는다. 일방적으로 성의 없이 결론을 내리고 전화를 끊는다. 스다 마사키는 살짝 어눌한 감이 있는 본인의 말투 그대로, 쿠즈미가 쓰는 방언 그대로, 그 냉정한 분위기를 살린다. 나리카와는 쿠즈미를 볼 수 없지만, 말의 내용 뿐 아니라, 그 서늘한 뉘앙스를 통해,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게다.
3. “그렇다면 난 인간이 아닐까나?”
스다 마사키는 크게 에너지를 쓰지 않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쿠즈미의 ‘겉’을 표현한다. “수고하십니다!”라고 소리치며 경례를 붙이는 모습은 씩씩하고 해맑아 귀여울 정도이나, 이후 드론을 조종할 때는 무시무시하게 집중한다. 화면을 보며 고기를 뜯는 씬도 있는데,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꼭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어 놓는 모양새다. 과장해서 우악스럽게 먹지는 않는다, 하이에나가 떠오르는 눈매와, 열심히 씹을 뿐 별로 맛을 즐기고 있는 것 같지 않은 입모양 때문이다. 앞서 ‘겉’이라고 했다, 속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여서다. 영혼이 없다.
어깨를 굽히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는, 대충 입과 손을 놀린다. 폭탄 메일을 보낸 후,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지휘하며 음미한다’. 열쇠를 흔들며 밝게 인사하고, “대충 놀고, 대충 살고 있었어.”라고, 웃음기를 얹어 눙친다. 모든 게 너무 쉬워 시시하다. 폭탄을 터트리는 등 이것저것 범죄를 저지를 때도, 말투는 장난스럽지만 별로 즐거워 보이지는 않고, 계획대로 굴러가지 않아도 딱히 아쉬워하거나 화내지 않는다. ‘진심’, ‘절박함’이 없다.
쿠즈미의 진짜 표정은 뭘까. 통화할 때 쏘는 차가운 눈빛일까, 경찰을 비웃는 입꼬리일까.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의 ‘예상치 못했어’ 얼굴은, 의외로 이부키와의 순간에 등장한다. 처음은 사와베를 쫓아 달리는 이부키를, 저 위에서 목격했을 때다. 여전히 장난스럽지만, ‘저게 뭐냐’는 듯,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끝을 늘여 뱉는다, “빨라-!”. 입을 못나게 구기며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이부키가 회심에 차 날린 “메케메케 페렛”을 검색하고,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이게 대체 뭐야’ 표정을 한다. 단순 유머를 위한 씬들이겠지만, 시마 말마따나 “야생 바보”라서, 오히려 이부키가 쿠즈미 바운더리를 걷어내는 역할을 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4. “전부 없어져 버리면 좋을텐데”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는, 쿠즈미와 이부키의 ‘대화’씬이다. 도쿄만 마리나, 피곤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카운터에 기대 선글라스를 벗은 쿠즈미는, 이부키를 발견한다. 쿠즈미 쪽만 이부키의 얼굴을 아는 상태이나, 상대도 자신을 알아볼 것임을 예상하고 있는 듯, 대놓고 날카롭게 훑는다. 도발 당하자, 진지하게 굳어 이부키를 응시한다. 처음으로, 그의 눈에 긴장 비슷한 것이 어린다. 일반적인 범죄자의 것은 아니다, 흥분이 섞인 건지, 눈이 알 수 없는 빛으로 초롱초롱하다.
한 손에 술병을 들고 휘적휘적 걸으며, 묻는 말에 대강 답한다. 분명 귀찮아하며 상대를 깔보고 있으나, 동시에 약간 재미있어한다. “뭘 하고 싶은 거야?”라는 질문을 받는 것도, 어떤 까닭에서건,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도, 처음이지 않았을까. 대화가 지속되자, 약간 짜증마저 내며 속을 드러낸다. “넌 신이냐”고. 적나라하고 파괴적인 진심이 이어진다. 꼭 공기를 푹푹 가라앉히는 듯한, 탁한 말투다. 환멸이 어른거린다. 내키는 대로 휘청거리는 걸음이나 독특한 제스처와 맞물려, 공연을 관람하듯 숨죽이고 휘감기게 만든다. 쿠즈미는, 이곳에 무엇이 있고,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꿰고 있다. 말의 흐름에 맞춰, 올라가 병을 던지고, 바가지를 집어 든다. 흔들흔들 가지고 다니다, 던져 틈을 벌고, 도망간다. 초점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웃고 있다, 신난다는 듯.
이어 도착한 시마와의 대립은, 또 다르다. 방독면에 목소리가 가려 나오고, 얼굴과 눈빛이 잘 드러나지 않는 상태이므로, 스다 마사키는 살짝 다른 연기 톤을 사용해, 쿠즈미의 캐릭터를 유지한다. 흐물거리는 말투는 그대로이나, 비음이 더 많이 섞였고, 날카롭다. 고갯짓과 손짓, 뚜렷한 눈썹의 움직임을 주로 사용한다. 시마와 이부키의 꿈 속 쿠즈미는, 미세하게 더 극적이고 ‘악마적인’ 뉘앙스다. 눈에 힘을 꽉 주고 이를 악문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반복해 ‘짖는다’. 진지하게 ‘훈계’한다. 각자의 마음속 갈등과 두려움이, 쿠즈미의 옷을 입고 형상화된 것이어서다. 처음 볼 때는 감과 단서만 쥐고 가슴을 졸이며 따라가기 급급했지만, 그 정체를 정확히 알고 나자, 그 연출과 연기에 감탄하게 됐다.
마약 공장 근처에서 검문을 한다는 연락이 와도, 느긋하게 “어쩔까나~”라며 말끝을 늘였던 쿠즈미는, 두 형사가 바다에 뛰어든 것을 보고도, 여전히 대충 “안 되겠네~” 할 뿐이다. 스스로에 대한, 아니 제 예상에 대한 믿음이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바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인형이 될 것이라는 믿음. 배에서 뛰어내려 연락처를 슥 훑어 누르고는, 목을 희한하게 악 하고 가다듬고 능청스럽게 통화를 시작한다.
5. “난 너희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거야.”
마구 달려 유람선을 쫓아오는 이부키를 목격한 쿠즈미는 또, ‘예상치 못했어’ 표정이 된다. 몸을 낮추고는, 약간 질색마저 한다. 여전히, 튀김은 열심히 씹으며, 상황을 지켜보다, 애매하게 긴장된 미소를, 보일 듯 말 듯 띄운다. 이부키-시마-코코노에를 차례로 피하며 계속 도주하지만, 별로 난감하거나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다리에 머리를 박고, 숨 가빠 하면서도 여유롭게 설명하고, 피해자 연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상황이 그의 손을 벗어난다, 본인이 놓은 덫 때문에. 갑자기 필요가 없어진 인형 무리 앞에서, 쿠즈미는 얼이 빠진다. 이 ‘패배 표정’에는, 격한 감정이 없다, 아무것도 없다. 달라붙는 일행을 손으로 툭 밀어내고, 휘청휘청 그대로 굳어 있다. 피가 흐르는 이마에 시마가 수건을 대자, 반사적으로 입이 벌어지며 ‘아’를 뱉는다. 눈은 시마 쪽을 향하고 있지만, 초점이 어긋나 있다. 어떤 결심을 한 것 같기도, ‘인형’이 된 것 같기도 한 묘한 얼굴이다. 스스로가 만든 세계에 걸려들었을 때, 그는 멍해졌다, 고장 난 것처럼.
병원에 누워, 쿠즈미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중얼거린다. 본명과 출신에 대한 물음에, 한숨을 푹 내쉬고, 의욕도 장난기도 없이 묻는다. ‘뭐가 좋으냐‘고. 전 인형들에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의, 그 ‘애써 괜찮은 듯한 아련함’은 어디서 온 걸까, ‘진짜’ 과거가 궁금해지지만, 본인도, 작품도, ‘범죄의 배경’에 대한 호기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손을 얼굴에 푹 내려놓고, 나직하게 말한다, “난 너희들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거야.” 차분하고 차가운 말투, 마지막 대사다. 끝까지 아무도 신뢰하지 않고, 인간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쿠즈미의 결정이기도 하고, ‘어떤 과거를 겪었든 범죄의 까닭이 되지는 않는다’는, 작품의 스탠스이기도 하다.
쿠즈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건, 후반 3화 정도 뿐이지만, 작품 전체에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는 말한다, “난 별로 한 게 없어.” 달콤한 말을 속삭여 인간의 약한 구석을 끌어내 조종하는, (또) 시마 말을 빌리면, 메피스토펠레스. 스다 마사키는, 작가와 감독이 원하는 느낌을 정확히 잡아낸 후, 배우의 개성을 지우지 않고 캐릭터에 녹여 쿠즈미를 표현했다. 어떤 전형도 따르지 않고, 힘을 쭉쭉 빼,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풍기는, 일본 드라마 역사에 길이 남을 ‘악인’을 완성했다.
‘Not Found’ 에피소드, 유심을 강에 던진 쿠즈미는, 흐느적흐느적 몸을 돌려 발을 옮긴다. 다리 난간에 나비가 와 앉는다. 다가가 손을 뻗지만, 나비는 날아간다. 햇빛에 반쯤 감긴 눈, 벌어진 입, 허공에 떠 있는 팔 -꿈꾸듯 멍하다. 같은 에피소드의 마지막, 경찰을 따돌리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나비 그래픽이 겹친다. 같은 그래픽이, 쿠즈미의 마지막 씬에도 등장한다. 교도소로 끌려가며, 건조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슥 고개를 돌리는 순간이다. 그는 갇혔지만, 나비는 날아갔다. 이제 그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자기 속으로 숨을 것이다. 호접지몽이라도 꾸는 듯한 태도로 ‘사는’, 나비 같은 인간. 영원히 그의 정체를 알 수 없으리라. 왜 쿠즈미가 스다 마사키여야 했는지, 아주 납득했다. 늘 잘 하는 배우였지만-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통달한 경지에 이른 듯, 화면 속에서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 찍지 못한 3화분에 쿠즈미의 배경이 있었을까? 뭐 모르지. 에피소드가 줄어든 것은 아쉽지만 나는 뭐 이대로도 좋다.
++ 대사 인용 소제목은 전에도 몇 번 글에 써먹었지만, 앞으로도 우려먹을 계획이다. 아니, 소제목이 문제가 아니라… 제목이 오그라들지만, 스다 마사키 팬인 글쓴이의 커다란 감동이 담겨 있으니 봐주자(?).
* 스다 마사키 글
https://brunch.co.kr/@yonnu2015/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