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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ul 22. 2020

그 배우는 감독이다.

자비에 돌란(Xavier Dolan) as an actor




<아이 킬드 마이 마더(J’ai tue ma mere)>(2009)

<하트비트(Les amours imaginaires)>(2010)

<마티아스와 막심(Matthias et Maxime)>(2019)

<탐엣더팜(Tom a la ferme)>(2013)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칸이 사랑하는’ ‘천재’ 감독 자비에 돌란. 유명한 수식어가 그의 매력을 가린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중 하나는 배우로서의 얼굴이다. 간단하게, 표정으로 시작해보자. 인상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는 눈썹이다. 자비에 돌란은 눈썹을 잘 쓰는 배우다. 힘을 주거나, 축 내리거나, 한쪽만 찍 올린다. 무표정을 하고 삐딱하게 응시하면, 힘을 줘 대칭적으로 올린 눈썹 탓에 고집스러워 보인다. 근데 그냥 ‘드센’ 게 아니라, 여린 속을 꽁꽁 싸매고 있는 것 같다. 눈썹을 축 내리고 울망한 눈으로 바라보면, 앙투안 말대로 강아지 같다. 웃을 때 두드러지는 앞니까지, 약간, 상투적인 표현이 떠오른다. ‘영원한 소년’. 하나 더, 자비에 돌란은 목소리를 잘 쓰는 배우다. 원래 톤은 차분하고 나직하며, 분명하다. 살짝 갈라져 매력적이다. 흥분해서 쏘아대는 경우, 비음이 많이 섞이고 소리에 울림이 적어진다. 볼륨을 키우면 귀를 긁는다. 주로 엄마와 있는 후베르트의 씬에서 들을 수 있다. <엘리펀트 송>(2014)에서도 내내 들리는데, 영어를 사용해서 인지 더 날카롭다.


역시, <엘리펀트 송>을 살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히, 이번 글에서는 본인이 감독한 작품 속에서의 모습에 집중하고 싶었다. 배우로서의 자비에돌란,인 동시에 감독으로서의 배우인 자비에돌란, 말이다. 후베르트, 프란시스, 탐, 막심. 다 다르지만, 정서의 기둥이 비슷하다. 똑같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배우에 대해 쓴 글에서도 종종 쓰는 표현인데, ‘다른 타임라인의 본인’ 같다. 감정의 막이 얇고 겹이 많은데, 인물에 따라 드러나지 않을 때도 있다. 예민하다. 때로 정신없이 곤두선다. 정서의 한구석은 십 대에 머무를 것 같다. 프란시스의 마스터베이션 씬이나 후베르트의 횡설수설 씬처럼, 종종 그가 스스로의 작품 속에서 하는 연기를 보면 소름 돋게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행동 자체 탓도 있으나, 연기가 너무 개인적으로 현실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배우 스스로, 부러 그렇게 만드는 거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



그의 연출과 연기는, 처음부터 함께였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 후베르트는, 욕실에 들어가 스스로를 찍는다. 카메라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눈을 내리깔거나 옆으로 돌리며 독백한다. (제임스 딘을 따라) 인상을 쓰며 담배를 쭉 빨기도 한다. 멋진 척하느라 그런 것도 있고, 정말 카메라와 눈을 맞추기 어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멋져 보임과 오그라듦의 경계에 있다. 자비에 돌란도 알고 있다. 그는 스스로가 멋져 보이면서도 없어 보이게 찍을 수 있다. 본인의 매력, 잘하는 것, 다 알고, 다 한다.


초반, 엄마의 입과 후베르트의 눈을 클로즈업하는 아침 식사 씬부터, 엄마를 향한 후베르트의 기본적인 태도가 보인다. 질색하는 눈초리로 뜯어보다 눈을 내리깔거나 고개를 돌린다. 엄마를 대할 때만 목소리를 다르게 낸다. 마음에 안 들어하려고 작정한 듯 불만을 가득 묻혀 쏘듯 내보낸다. 본인이 우월한 존재인 양 상대를 내려다본다. 얄밉고 재수 없다. 하지만 그 오만함이 십 대 소년 특유의 것이라서 우습고 귀엽다. 차 속에서, 주방에서, 엄마와 아들이 서로의 신경을 긁으며 싸운다. 두 사람은 분명 표정을 굳히고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데, 한편으론 웃음이 나온다. 닮아 있어서다. 결국 그가 엄마와 싸우는 건, 닮았기 때문이다. 취향은 다를지라도, 그 성질이 말이다. 자비에 돌란은, 스스로 성숙하다고 여기는, 그 미성숙한 성질머리를 재치 있게 드러낸다.


시니컬하게 짜증을 내며 툭툭 던지거나, 폭발해서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거나, 잘해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도돌이표. 아파트를 보고 와 흥분해서 들뜬 소리로 엄마에게 말하다가, 엄마가 안 된다고 하자, 그 톤 그대로 표정이 굳어 소리를 지르며 막 화를 낸다. 오락가락하는 감정대로 예민하게 소리를 내지른다. 기분이 좋아서 엄마 사랑해,라고 하거나, 뚱해서는 최악의 엄마야!라고 하거나. 정서에 별로 논리적인 흐름이 있는 건 아니다. 엄마가 후베르트를 대할 때도 그렇듯, 가장 편하고 가까운 존재라서 어떤 막 없이 막 대하고, 잘 지내자고 다짐했다가 다음 순간 잊어버린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


태연하게 엄마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해 놓고는, 저절로 찔려 눈을 맞추지 못하는 장면이, 줄리와의 첫 투샷이다. 그 거짓말은, 그를 자신의 ‘어른’에게로 연결해 준다. 줄리와 있을 때, 후베르트에겐 다른 면이 드러난다. “사탕 줄게 차에 타 봐”에서 헤헤 웃는 순간부터, 마음이 열리는 것이 보인다. 줄리 앞에서는 ‘어른인 척’ 힘을 주지 않고 속을 드러낸다. 상대를 똑바로 보고, 어색하고 순수하게 웃고, 예의와 진심을 다해 대화한다. 이제까지 후베르트를 엄마와의 관계로만 묘사했지만, 그의 속에는 덜 자란 아이도 있고, 섬세한 예술가도 있고, 정말로 놀랍도록 깊은 마음도 있다. 그런 면면을 자비에 돌란은, 줄리와의 시간으로 드러낸다. 대칭적인 화면과 정적인 연출이, 차분한 톤의 연기와 만나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후베르트는 어떤 수식어로 정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엄마의 아들이지만 본인 말대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은 참자)‘자기만의 인생과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보인다. 프란시스나 막심이 연상되기도 한다.


앙투안을 대할 때는 완전히 풀어져서 편안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의 엄마를 볼 때는 눈썹이 축 처진 채 거리감이 있는 동경의 눈빛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부러워하는 씁쓸한 미소를 띤다. 헌데 기숙학교로 돌아가기 전날 밤 저녁 식사를 하다가는 돌연,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빤히 응시한다. ‘절망적인’ 상황,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버린 -아니 ‘비밀’을 말할 기회를 빼앗아 간 사람에게 보내는, 약간 화풀이 성격의, 도발적인, 자기 파괴적임으로써 공기를 파괴하고 그 공간의 모든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시선. 그 일부러 무례한 눈빛에서, 이 배우의 다른 가능성이 얼핏 보였다면, 과장일까.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


연기에 감탄했던 장면과, 연기와 연출이 완전히 어울려 그 전체가 너무 좋았던 장면이 하나씩 있었다. -전자는 물론, 약을 하고 엄마를 깨워 말을 늘어놓는 씬이다. 눈은 잘 떠지지 않고, 몸은 흐느적거린다. 발음은 새고, 목소리 볼륨은 제멋대로 오르내린다. 불필요한 공기와 비음이 잔뜩 섞여, 코로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뇌에서 문장을 만들어서 의식적으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이 입으로 흘러나온다. 이것을 횡설수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안에 진심이 있어 헷갈리고 안타깝다. 울음과 웃음의 경계에 있는 특유의 표정이, 빛을 발한다.


후자는, 엄마가 기숙학교 다음 학기 등록금을 냈다는 것을 알고, 엄마의 물건을 마구 던지는 씬이다. 거리를 두고 방문 앞에 고정된 카메라에 그 과정이 담긴다. 마침내 커다란 도자기 그릇을 높이 쳐드는 순간. 늘어진 머리칼 사이로 망설이다 사그라드는 표정이 보인다. 천천히 팔을 떨구고, 내동댕이치는 대신 허탈하게 툭 내려놓는다. 순간의 복합적인 정서를 그 동작으로 표현한다. 다음 순간부터는, 내던진 것을 다시 주워 담기 시작한다. 하기 싫어서 대충 하는 게 아니다. 정성을 다해 원위치시키는 데에 집중한다. 아마 여전히 분노는 남아 있을 것이나, 누그러든 채 일단, 정리한다. 약간 웃기면서, 그 심정이 ‘뭔지 알 것 같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연기, 배우만이 할 수 있는 연출. 후베르트가, 엄마랑 말다툼을 하고 접시를 깨는 상상을 하거나, 상처를 받은 후 관에 누워 있는 엄마를 떠올리거나, 엄마와 엄마 친구의 어떤 모습이 머리에 스치거나, 하는 편집이 들어간 다음의 얼굴에는, 그의 머릿속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연기 덕’ 혹은 ‘연출 덕’이라고 지정할 수 없는, 감각이다. 처음에 언급했던 아침 식사 씬의 클로즈업도 그렇다. 본인이 느끼는 것, 표현하고 싶은 것,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을 나노 단위로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캐릭터도 연기도, 예민하고 날카롭다.


그 날카로움이, 닐 슈나이더의 예측 불가한 흐물흐물함과 맞닥뜨려 생성하는 케미는, 흥미롭다. 무방비 상태가 되어, 누그러지고, 휘둘린다. 이 작품에서 잠깐 등장해 매력만 흘리고 갔던 닐 슈나이더는, 자비에 돌란 다음 작품의 중심에 위치해, 일관된 분위기를 내뿜는다. 두 사람은 전작과 비슷한 케미를 이루지만, 캐릭터의 성격에 미묘하게 차이가 있고, 관계의 방향도 다르게 어긋난다. 약간 시퀄 에피소드 느낌이 들다가도, 결국 독자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나는 닐 슈나이더를 니콜라로 먼저 알았기에, 에릭이 특별 출연 느낌으로 반가웠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



<하트비트>(2010)의 마리와 프란시스가, 마음속 말을 그대로 내보내는 경우는 별로 없다. 허나 얼굴이, 어깨와 발걸음과 손의 머뭇거림이, 심리를 전부 말해준다. 프란시스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숨기지도 못한다. 마리가 어느 정도 ‘아닌 척’을 하지만, 감독의 의도로 관객에게 심리가 보인다면, 프란시스는 사람 자체에 다 드러난다. 다만, 밖으로 분출되는 게 아니라, 안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후베르트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뻥뻥 분출하는 장면이 많은 캐릭터였다면, 프란시스에겐, 감정을 눅이고 삼키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홀로 있을 때 마저 그렇다. 욕실에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빤히 보다, 벽에 있는 빗금을 슥 보고 나가는 씬 같은 것. 거의 유일하게, 폭발하는 연기는, 매우 독특하다. 일 년 만에 니콜라를 마주친 그는, 마리와 함께 한쪽 눈썹을 올리고 니콜라를 관찰하듯 째려보다, 별안간 짐승이 울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른다. 그만이 낼 수 있는 소리, 그만이 할 수 있는 표현법. 보편적이지 않고, 이상한데, ‘뭔지 알 것 같다’. 관객을 당황하게 만들고는 순식간에 납득시킨다.


<하트비트>(2010). IMDB.



<마티아스와 막심>(2019)막심을 보며, 프란시스가 떠올랐다. 잔뜩 취한 막심이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자꾸 손바닥으로 점을 가리는 씬에서, 홀로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던 프란시스의 모습들이 겹쳐졌다. 비슷하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면이 있는 연기였는데, 더 깊고 풍부했다. 늘었다,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고, 맞지도 않는다. 흐름과 방식이 다른 작품이니까.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남자들의 시선을, 막심은 방어적이거나 어색하게 받는다. 마티아스를 바라볼 때도, 리사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때도,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관객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미 갖은 근심과 생활로 지친 막심의 얼굴에는, 순수한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부족하다. 그것을 덮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 꽂혀야만 분명히 드러나는데, 여전히 복합적이다. 솔직히 나는 자비에 돌란이 그런 류의 연기를, ‘못 할 거’라기보단 별로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매카피가 말했지)2019 년 현재, 실재하는 사람처럼 연기를 하는 거다.


친구들과 있을 때 막심은, 기본적으로 릴랙스 되어 있다. 별로 주도하지 않고, 주로 듣거나 리액션을 한다. 가장자리에 말없이 있어도 겉돌지는 않지만, 자주 홀로 생각에 잠겨 다른 공기를 형성한다. 엄마와 있을 때는 질리고 지쳐 날카롭게 대하는데, 닳고 닳은 애정이 언뜻 드러날 때마다 마음이 아린다. 실랑이하다 얼굴에 침을 맞은 후, 방으로 들어가 주먹을 쥐고 어쩔 줄 모르며 운다. 그대로 엄마와 남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스스로를 분리한 것일 게다. 그 눈물에는 아주 복잡하고 진득한 것이 들어 있었다. 울다 주먹으로 거울을 깨고, 다시 운다. 항상 애매하고 미묘한 표정을 하던 막심이 우는 모습을, 정확히는 ‘눈물을 참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막 울 수조차 없어진다. 마티아스의 엄마에게 번호를 다시 부탁할 때, ‘M과 M의 농장’ 그림을 보고 울음을 참을 때, 울먹이며 통화로 메일 주소를 겨우 부를 때.


그러나 더 아픈 얼굴은, 눈물 없이 나온다. 막심의 미소에는 자주 슬픔이 섞인다. 가끔은 툭 치면 울 것 같은 얼굴을 한다. ‘너와 주말을 함께 보내고 싶어’라고 하는 막심은, 눈을 살짝 내리깔아 사선으로 상대를 응시한다. 설렌다기보단 괴로워 보인다. 그 눈빛이, 한참 헤엄친 후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는 마티아스를 내려다보던 때와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다만 그때의 눈이 생각에 빠진 듯 약간 흐려져 있었다면, 이번에는 아리도록 분명히 마티아스에게 집중하고 있다. 알 수 없다고 여겼던 막심의 얼굴들이 하나하나 다시 떠올랐다. 어쩌면, 막심은 계속, 눈으로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넌, 어떻게 하고 싶냐고. 전개에 따라 의미를 달리 입힐 수 있는 깊은 표정, 배우 자비에 돌란의 것이다.


<마티아스와 막심>(2019). IMDB.



헝클어진 금발은 불안정하고 어수선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안경은 맑은 눈빛을 가려 인상을 흐린다. 은, 앞의 인물들과 사뭇 다른 ‘상태’다. <탐엣더팜>(2013)은 ‘보편적이지 않은’ 욕망과 심리를 표현하는 자비에 돌란을 볼 수 있는, 그의 작품 중 유일한 ‘리얼 스릴러’다. 평상시의 탐이 어떠했는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현재 그는 절어있다. 지쳤다. 스스로가 귀찮아 보인다. 슬픔이 ‘더해진’ 게 아니라, 그가 쓴 말처럼 ‘내 몸의 일부 같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무언가가 ‘빠졌다’. 가끔 뭔가를 되뇌듯 입술을 달싹거린다. 처음 농장에 도착해서는, 결투를 신청하려는 듯한 걸음걸이로 집주인을 찾아다닌다. 긴장해서다. 열쇠를 찾아 들어가 잠들었다가, 아가사의 목소리에 깬 그는, 멍하다. 몽롱한 채 얼굴을 닦으며 사과하고, 소개하고, 몰래 탁자의 침을 문지른다. 이 순간만큼은 ‘보통의’ 감정이, 새로운 사람을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만난 정신없는 긴장과 당황이 앞선다.


동료이자 친구로 자신을 소개하며, 탐은 차분하게 웃지만, 붕 떠 있다. 존재를, 죽은 연인과의 관계를 감추며, 아픔도 함께 감춰져 버린 듯하다. 그러다 어떤 모먼트에 갑자기, 눈을 빠르게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뺨이 살짝 붉어지며 입을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자비에 돌란은 별안간 찾아오는 감정을 드러낸다. 가짜 여자 친구 ‘사라’의 말인 척, 진심을 뱉을 때는, 미묘하게 뺨이 흔들린다. “난 내가 싫어.”라고 ‘인용’하며,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탐엣더팜>(2013)


안경을 벗고 머리를 넘기자, 인상이 깔끔해진 동시에, 프란시스를 훔쳐보는,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번뜩이는 눈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슬픔을 다른 감정으로 밀어내려는 듯-아니 가슴의 빈 곳을 채우려는 듯, 집요하게 프란시스를 찾고 좇는다. 협박당할 때, 떨리는 어깨에는 두려움이, 필사적으로 노려보는 눈빛에는 분노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섹슈얼하게 도발적인 데가 있다. 프란시스의 눈에 담긴 멸시에 욕망이 섞여 있듯, 탐의 눈에도 욕망이, 섞여 있다. 그래서 화면에 흐르는 긴장감은, 단순하지 않다. 탐은 차 속에서 뒤늦게, 마구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는데, 좀 ‘연극’ 같다. 진짜 화, 보다 화내야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진다. ‘가방’이라고 중얼거리며 차를 돌린다. 기계적이다. 핑계 같다. 불안정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허공을 노려본다.


옥수수밭에서 프란시스에게 맞은 후, 탐에겐 괴상한 안정감이 생긴다. 누그러진 눈으로 프란시스의 눈치를 본다. 의사의 물음엔 인형 같은 미소로 답하고, 더 이상 ‘사라’를 인용할 때 머뭇거리지 않는다. 자비에 돌란은 탐이 느끼는 감정의 흐름을 다 알고 있을 게다, 자기가 쓴 이야기니까. 그러나 아는 것과 표현하는 건 다르다. 그는 보편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탐의 심리를, 관객이 단순히 ‘정신이 나갔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납득할 수 있게 한다. 프란시스는 혼자인 까닭을 애매하게 말하며 남아달라고 요구한다. 불이 꺼지고, 탐은, 잠깐의 침묵 후 ‘알았다’고 답한다. 화면이 검어, 감각이 대사에 집중된다. 짧은 말인데, 소리가 이상하다. 까지고 떨리나, 끝이 이상하게 차분하다. 폭력이 지속될 것임을 알면서, 마음에 난 구멍을 이 독으로 메우려는 거다. 솔직하게 상실감을 드러낼 수 없고,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고, 스스로가 싫어, 자기를 파괴한다.


<탐엣더팜>(2013)


프란시스를 향한 탐의 눈빛은 계속 오락가락한다. 붕대를 감아 줄 땐 순종적인 긴장이, 탱고를 출 때는 아찔한 욕망이, 혐오가, 두려움이, 다시 욕망이 어른거린다. 자신을 속이며 거짓된 안정을 유지한다. 계속 육체노동을 해 몸을 힘들게 만들고, 그 핑계로 불안을 드러낸다. 손에 범벅된 피를 신경질적으로 닦으며 무방비 상태로 눈물을 터트렸다가 웃음을 터트린다. 목소리는 다 까지고, 시선은 내리깐 채 맞추지 못한다. 술에 취해 목이 졸리며 눈물을 흘린다. 짜내는 소리로 말한다. “그 애와 똑같아.” 그날 밤, 홀린 듯 냉장고를 청소하다 맛이 간 눈으로 또다시, 입을 달싹거린다. 눈썹을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동시에 웃음을 흘리며, 입꼬리를 올린다. 자비에 돌란의 연기는, 탐의 복잡하고 ‘비정상적인’ 심리를, 설명 없이 직구로 느끼도록 만든다. 플러스, 자체로 소름 돋게 아프고 아름답다. 치명적이다.


<탐엣더팜>(2013)


걱정하는 사라를 향해 탐은,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특유의, 눈을 쳐지게 만들고 눈가와 뺨을 찡그리며 울듯 씩 웃는 표정이다. 줄리를 향해 웃는 후베르트의 얼굴 근육 움직임과, 형태는 비슷하나, 멍한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다. 바 오너의 이야기를 듣고, 탐은 살짝 굳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엷게 웃는다. 눈빛은 모호하다. 공포로 질렸다기엔 차분하다. 단순히 무감각해진 탓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취해 사라에게 추파를 던지는 프란시스를 보며 질투로 불타올랐었다. 그가 그 정도까지 갈 수 있다는 걸 과연 몰랐을까. 아침에 일어나 멍하고 익숙하게 아가사를 찾던 탐의 눈빛이, 별안간 홱 돈다, 아니 돌아온다. 정신을 차렸다. 짐을 마구 챙겨 떠난다. 프란시스의 폭력적인 욕망은, 자신이 그에게 특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 이상 빈 심장을 채워 주지 못한다는 것, 그렇기에 그도 자신에게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는 죽은, 살아 있을 때는 숨 쉬듯 바람을 피웠던, 기욤뿐이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망설일 까닭이 없다. 짐 핑계, 차 핑계, 소 핑계 다 팽개치고 붙잡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칠 일만 남았다. -자비에 돌란이 탐의 옷을 입고 대사 없이 들려준 얘기다. 도시로 돌아온 탐의 얼굴은, 잔뜩 지쳐 있다. 허나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눈빛에 얼핏, 생기가 스친 것 같기도 하다.


육 년 전인가, <탐엣더팜>을 처음 보고 남은 기억은, 불편하게 쫄렸던 뱃속의 느낌이 다였다. 다시 보니, 이걸 어떻게 안 좋아하고 배겼는지 의문이다. 아까 ‘리얼 스릴러’라고 적었던가, 부족하다. <탐엣더팜>의 장르는, ‘탐엣더팜’이며, 그 장르의 핵심 중 하나는, 연기다.


<탐엣더팜>(2013)



<와일드 라이프>(2018)를 보고, 폴 다노는 연출도 자기 연기처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비에 돌란의 연기를 살피며, 연기도 자기 연출처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와 감정이, 드라마틱한 대로 현실적이다. 그 표현법은, 자유롭고, 솔직하고, 때로 어느 공식에서 벗어나 있다. 자신의 작품 속 그를 보고 있으면, 종종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고 연기에, 아니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캐릭터를 제 연기 욕심에 이용하거나, 어떤 감정적 목표로 몰아붙이지 않아서다. 그러다, 이 배우가 감독이었지, 하고 새삼스러워진다. 이 감독은, 스스로에게 맡길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를, 모두 정확히 알고 있다. 후베르트, 프란시스, 막심, 그리고 탐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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