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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아이돈노하우벗데이파운미를 들었고, 프레이터 바이올렛을 몇 장 읽었다.

by 않인




나는 오늘도, 아이돈노하우벗데이파운미를 들었고, 프레이터 바이올렛을 몇 장 읽었다.


……그리하여 내가 소비하는 예술들이 죄다 백인 남성 아티스트들의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는 고민에 빠졌던 것이다. 딱히 그런 프리빌리지를 의식하고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다른 레이스나 젠더의 아티스트들은 주로 의식적으로 좋아해야지 써야지 해서 쓰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글쎄 젠더는 내가 헤테로 피메일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고 치..ㄹ 수는 없겠지 (n개월 후 당신은 당신이 헤테로가 아니며 원래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또 n년 후 이런 글을 썼음을 기억해내게 됩니다.)


아무튼. 주로 음악 리스닝에서 그 현상이 심히 일어나는데. 내가 지닌 정치적 감수성과 상관 없이, 그 쿨한 분위기, 사차원적인 비유,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가사, 귀찮은 듯한 목소리 이런 걸 좋아하더라고 근데 그게, 그렇게 무관심하고 쿨해질 수 있는 거 자체가 어쩌면 특권일지도 모르겠더라. 그냥 자기가 가진 걸로도 괜찮으니까, 그런 예술이 나올 수 있었던 걸까. 뭐 그렇게 뭉뚱그릴 수는 없겠으나,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그 상태에서 약간 클리셰를 비틀면 -글램 록 같이- 너무 너무 취향이야 이래 버리는 거고. 록시뮤직 가사나 커버 좀 불편해도 그냥 듣지- 이러고. 암쏘리 킹프린세스 엄청 찬양하면서 글 쓰긴 했지만 사실 잘 안들어지더라고.


소설도 그런데 -물론 황정은 김숨 윤이형 다 좋아하지만 페이버릿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다. 동시대의 버지니아 울프는 취향이 아니야. 근데, 그들이 쓰는 소설은 자기 삶이랑 엄청 닮아 있거든. 내가 뭐 이야기를 쓰면 절대 이셔우드 같은 위트 안나오고 황정은 김숨 윤이형 따라하기의 영점일프로 완성도 정도 나오는 게 그 때문이겠지. 나는 그 시대 특권층, 에서 살짝 엇나가 있는 (물론 그렇다기에 영국은 실제로 형법도 있었고 그 당시 게이라는 건 엄청난 소수자성이긴 했지만-)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를, 아이돌로 우러르는 건가봐. 그게 의식으로 되는 게 아니라서 어쩔 수 없어. 내가 좋은 게 이건데 어쩌겠어.


이셔우드가 자서전에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약간 얄밉게 상아탑의 부르주아 하고 -굉장히 가볍게고, 울프에 대한 리스펙트와, 셀프 디스랑 함께이긴 하지만- 디스했는데, 자기가 독일 워킹클래스 보이즈랑 놀 수 있었던 건 어쩌면 화이트 메일이기 때문이잖아. 버지니아 울프가 누릴 수 있었던 삶은 그런 부르주아적인 -표면적으론 그냥 프리빌리지이지만 사실 선택지가 그것뿐이었을수도- 것이었고. 근데 정말 미안한데 나는 그거 보고 웃었어. 이셔우드의 그 문장들이 좋았어. 어쩌면 내가 이셔우드를 너무 좋아하는 건 time, race, country, class, 등 내가 갖지 못한 요소- 대개 특권인 것-를 가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지만 결국 그것을 비트는 위트를 빛내기 때문인가봐. 그리고 하나의 마이너리티-그게 그의 작품 전반에 깔려 있지-는 내가 갖지 않은 것이고.


애초에 주어진 선택지 자체의 문제도 물론 있다. 그치만 이 글은 거기까지 가진 않고 개인적으로 끝낼 거라. 자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겨우 시작이다. 고민을 좀 발전시킬 필요가 있겠다. 이미 형성된 취향의 문제라 어쩔 수 없다는 건 변명, 근데 또 덕질의 포인트는 무의식중에 저절로거든. 어렵다. 아무튼,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영원히 내 아이돌이다. 이것은 수정불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