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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r 19. 2021

"착한 남자".

<프라미싱 영 우먼>(2020)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2020, 감독: 에메랄드 펜넬)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렸어.”, “이미 오래 전 일이잖아.”, “본인이 자초한 거 아니야?”, “일방적인 이야기 때문에 유망한 청년(promising young man)의 장래를 망쳐서야 되겠어?”.

 

그렇다면 그 “일방적인 이야기”를 한 여성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제목은 ‘Promising young woman’. 일부러, ‘의대’라는 배경을 택했을 것이고, 니나는 수석, 캐시는 우등생이란 설정을 한 것이겠다-이에 대해 할 말이 좀 떠오르고, 필요한 말이기도 한데, 별로 ‘누구들’에게 여지를 주고 싶지 않으므로 아끼도록 하겠다.


<프라미싱 영 우먼>(2020). IMDB 이미지.


오프닝은 클럽이다. 수트를 입은 남자들의 출렁거리는 허리와 뻣뻣하게 흔들리는 엉덩이, 땀 범벅이 된 목이 보인다. 개인과 개인이 아닌, 고깃덩이들의 집합이다. 낯설지 않은 연출이다. 여자들의 노출된 다리, 발목, 허리, 엉덩이를 클로즈업했던, 수많은 영화들의 클럽 씬들이, 너무나 흔해 그 불편함에 익숙해진 컷들이 떠오른다. 반대로, 죽은 캐시의 얼굴을 작품은 끝까지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 동일한 까닭으로, 조가 찍은 성폭행 영상이나, 호텔방에서 잠든 메디슨의 모습 같은 것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니나의 마지막 날들도. 어떤 것을 대상화해야 하고, 어떤 것을 전시하지 않아야 하는지 구분이 확실한 카메라였다.

 

매번 같다. 캐시는 취한 척을 한다. 그러면 ‘젠틀맨’이 하나 다가온다. 괜찮냐고 묻고, 데려다 주겠다고 하다, 집으로 끌어들인다. (“난 젠틀맨이야.”라는 마샴의 말에 “그럼 강간하겠다는 거네.” 라며 몸에 힘을 빼던 에비게일이 떠오른다. -2018, <더 페이버릿>) 캐시는 전혀 동의의 제스처를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거절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남자는 침묵을 동의로, ‘눕고 싶어’를 ‘섹스하자’로 ‘해석’한다. 이미 잔뜩 마신 그녀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엎드린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거나,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캐시는 흐물거리는 발음으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집에 가고 싶어.”, “뭐 하는 거야?” 남자는 ‘대답’한다. “괜찮아.”, “당신은 정말 예뻐.” 늘어진 몸을 더듬느라 정신없는 와중, 캐시는 별안간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한 발음으로 묻는다. “아니 정말, 뭐 하는 거냐고.” 남자는 소스라친다. 자신 있게 아무말을 늘어놓던 그는, 마주 보는 분명한 시선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지레 겁을 집어먹고 화를 낸다. 당신 취한 거 아니었냐며, 나가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말한다,

“I am a nice guy난 착한 남자에요.”


<프라미싱 영 우먼>(2020). 트레일러 스크린샷.


[캐시는 여유롭게 남자들을 제압한다. 대충 즉흥적으로 하는 듯 하나, 모두 ‘본능적으로’ 완벽하게 계산 되었기 때문에, 효과적이다. 치밀한 것은 계획보다는 연기다. 남자들이 놀라고 소스라치는 건 상대가 취하지 않았음을 깨달아서 이기도 하지만, 그 드라마틱한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 긴장을 내보이지 않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래야만 한다. 어느 정도는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다. 대개 자신보다 물리적으로 힘이 센 낯선 남자와 단 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다. 조금이라도 얕보이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 의사가 되고 싶었던 캐시는 배우가 되었다.

 

그런 캐시는 멋지다. 멋진데, 마음 편하게 반할 수 없다. (……) 캐시가 위험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남자들과 있을 때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다. 수첩에 이름을 적고 빗금을 그을 때, 유튜브를 보며 메이크업을 완성할 때는, 멍한 무표정이다. 언뜻 건조하나, 한 겹 들추면 끈적하게 뒤엉켜 있을 것 같은 우울이다. 그 얼굴은, 캐시의 행동이 고약한 ‘취미’도, 완벽히 계획된 ‘복수’도 아님을 드러낸다. 삶의 체인을 잇는 고리가 끊어져, 하루하루를 이어갈 까닭을 그 행위에서 찾는 것 같다.]


<프라미싱 영 우먼>(2020). 트레일러 스크린샷.


왜 캐시가 대학을 중퇴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메디슨, 착한 예비 남편이 되어 있는 알, 그 알을 훌륭한 학생으로 기억하는 딘 워커. 캐시는 가해자의 입장에 선 여성들에게는, 특정한 감정을 겪게 한다. 나름의 방법으로, 나름의 ‘선을 지키며’ 단죄한다. 남자에게 메디슨의 방에 들어가 정황만 만들 것을 의뢰하고, 학장의 딸을 ‘그 방’에 데려다 놓았다고 거짓말한다. 후에 캐시는, 메디슨에게 사과하고, 그를 안심시킨다. 메디슨이 여성이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했다는 것을 이용한 폭력이었으므로.

 

캐시가 그들을 찾아가기 시작한 건 라이언을 만난 이후부터다. 그는 기승전결의 중심이다. 등장은 우연이었으나, 이후의 전개는, 필연적이다. 라이언과 행복하게 지내는 캐시의 모습은 최선을 다해 예쁘게 담긴다. 전형적 로맨틱 코미디 같은 편집, 음악, 마치 다른 영화 같다. 핑크빛 네온을 입은 화면은,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일상이 지속될수록, 의심스러워진다. 예상은 쉽다. 라이언은 알의 무리와 현재까지도 어울리는 사이이고-등등. 왜 그때 ‘중절모를 쓴 변태’에게 기대 취한 척을 하고 있었는지, 캐시는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여러 다른 까닭이 있었겠고, 그저 짐작일 뿐이지만, 캐시의 무의식은 어느 정도 느끼지 않았을까.

 

‘나는 착한 남자’라고 말하지 않는, 라이언은 착한 남자다. 사려 깊고, 적당히 눈치 있고, 상대를 존중할 줄 알며, 선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방식으로 유머러스하다. 실수를 곧바로 인정하며 어설프게 사과를 늘어놓다 그녀가 침을 뱉은 커피를 마시던 그. 역시 어설프게 집으로 그녀를 이끌다 어긋나자 여러 번 사과하던 그. 점수를 따기 위한 행동일까 의심했지만, 술에 취한 척 하는 그녀를 데려가던 남자에게, “그녀 이름은 알아요?”라고, (캐시가 닐에게 했던) 질문을 하던 장면에서, 나는 넘어갔다. 본인의 ‘이상한’ 상태나 행동에 대해 캐시가 선을 긋자 캐묻지 않는 배려심까지. 이토록 젠틀하다.


<프라미싱 영 우먼>(2020). IMDB 이미지.


캐시가 착한 남자와 현재를 살고 있을 무렵, 패닉한 메디슨이 등장한다. 겪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그가, 범죄의 고발에 힘을 써 줄 것이라는 기대를 잠깐 했지만- 비디오를 가지고 온 건, 짐을 덜기 위해서였다. 그는 ‘다신 내게 연락하지 마’라고 진저리 치며 문을 나선다. 비디오와 함께, ‘착한 남자’의 과거가 드러난다. 별로 반전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뻔하고 현실적인 전개다. 글쎄, 그 ‘순수한’ 웃음에 변명의 여지가 있기는 한가. 라이언은 사랑한다며 애원하다, ‘루저’라고 공격한다. 죄책감이 어른거리기는 하는데, 그건 그냥 감정일 뿐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라이언의 존재는 과거에 살고 있던 캐시를 현재에 머무르도록 하는 버팀목이 되었다가, 다시 과거로 던져 돌아올 수 없게 만들었다.

 

감독은 캐시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관객이 똑똑히 목격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울고 넘기면 안됩니다 여러분. 클로즈업되는 건 캐시의 버둥거리는 팔다리가 아니라, 공포에 질려 안간힘을 쓰는 알의 얼굴이다. 이후 조가 들어오고, 캐시의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까지, 불편함을 느끼도록 늘어진다. 조는 알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위로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이 당신들을 위해 있는 게 아닐 텐데. 가해자들의 연대는 눈물 나게 굳건하다. 이후 알이 행복하게 식을 올리는 장면은 크리피하다. 그대로 끝났더라면, ‘영화로는’더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픽션에서라도, 잘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나. 뭐, 캐시의 캐릭터를 봤을 때도, 영화가 택한 결말이 더 설득력 있다. 결국 캐시가 다, 했다.

 

<프라미싱 영 우먼>(2020). 트레일러 스크린샷.


1부터 5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은 완벽하여 약간 판타지 같다. 까닭은 카산드라 토마스 라는 존재 하나다. 일부러 비현실적인, 작품이 말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최후는 드라마틱한 연출과 함께 그려진다. 라이언이 메시지를 받고, 변호사의 집에 우편물이 도착하고, 사이렌이 울리고, 알이 붙잡히고, 조가 도망가는 장면들이, 웅장한 음악과 함께 이어지는 것을 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껴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나는, 게일이 캐시의 목걸이를 꺼냄과 함께 깨달았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니나와 캐시는 죽었다. 캐시가 부리는 마법에서 한 발짝 물러나면, 주위는 죄다 현실이다. 알 먼로의 혐의는, ‘니나 피셔 성폭행’ 이 아니라, ‘카산드라 토마스 살해’ 였다.

 

형사에게서 ‘실종’이나 ‘자살’이란 단어를 들은 라이언이, 엉엉 울며 털어놓는 순진한 상상을 했던 내가 우스워졌다. 사랑이란 스스로의 안위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얼마나 우스워지는 단어란 말이냐. 그래, 그는 착한 남자로 남을 수 있었다. 계속 과거가 묻혀 있었다면. 가해자들은, 시대가 변하자 너무도 쉽게 착한 사람, 연인, 부모가 되어 피해자를 잊고 잘 살아간다. (‘척’이 아니라, 정말로 ‘착한’. 피앙세를 사랑하므로 성매매는 하지 않겠다던, ‘캔디’의 리얼 네임을 자상하게 묻던 나이스가이 알 먼로를 보라.) 잘 살지 못하는 건, 피해자, 피해자의 곁에 남은 이, 가해자를 옹호했던 죄를 잊지 못하고 후회하는 이다.

 


<프라미싱 영 우먼>(2020) 한국판 포스터.


“칠 년 전 그날 완벽한 복수를 약속했다.”

아니, 캐시는 그때 복수를 약속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해자들이 죗값을 당장 받게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니나와 함께 앞으로의 삶을 살아 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칠 년이 지난 후 어떻게 됐나, 니나는 죽었고, 가해자들은 멀쩡한 채로 캐시의 삶에 끼어들었다. 캐시는 용서할 수 없었으므로, ‘칠 년 후’ 현재에 ‘복수’를 결심한다. 그러나 ‘복수’라는 표현에 집착하는 건, 요점을 흐리고 이야기를 개인적이기만 한 것으로 만든다- 개인의 이야기가 맞고, 개인적이어야 하지만, 오로지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다른 문제다. ‘5장’에서 작품은, 캐시의 얼굴을 다시 등장시키지 않는다. 캐시의 이야기이면서, 끝내 사진으로만 등장했던 니나의, ‘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의미일 테다. 그러나 다시, 이것은 캐시의 이야기다. 완벽함을 연기해야만 했고, ‘완벽하게’ 죽음을 맞이한, ‘promising young woman’.  

 



+

끝내 걸리는 것은, “내가 당신을 용서해요.” 라는 대사다. 캐시는 니나의 반쪽 같은 존재였고, 내내 니나를 지켰겠지만, 그 말을 할 자격은, 변호사를 용서할 자격은 캐시에게 없다. 어쩌면 스스로 살아가기 위한 제스처였을 것이라고, 해석해본다. 캐시도, 현재를 살아보려고 했다. 연애도 하고 일도 하고 그래보려고 했는데-  

……..[카페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목걸이를 숨기는 캐시를 자꾸 상상했다.]



++

스토리라인에 집중하느라 스타일을 언급하지 못했다. ‘toxic’한 삽입곡들, 파스텔톤 색감. “올드 패션 리벤지 스릴러, 다크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감독과 배우 본인들의 언급이다.)” ‘보통은’ 함께 쓰지 않는 요소들을 한데 모아 독보적인 에스테틱이 탄생했다. 감독은 “Timeless”한 분위기를 원했다고.


“팝 컬쳐에서 이런 젊은 여성들이, 아이러니하게… 혹은 무슨 길티플레져처럼 여겨지곤 하는데 난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정말 사랑하고, ‘Toxic’은 이제껏 만들어진 가장 굉장한 곡 중 하나라고 생각해.(……) 옷, 메이크업, 팝 뮤직 같은, 일부 혹은 모든 여성이 즐기는 것들이 진지하게 받아 들여지길 바랐어.”

-에메랄드 펜넬, 플레이리스트에 관해. Interview with Variety.



* []: 캐리 멀리건에 관한 본인의 글에서 인용.


* 참고 인터뷰

https://youtu.be/HFg8Hh5LpZ4



“그(보 번햄)는 <유브갓메일> 씨퀄을 찍고 있었어(웃음). 우린 그게 사라지지 않길 바랐지.”

-에메랄드 펜넬, Interview with Variety.


<프라미싱 영 우먼>(2020).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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