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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Apr 14. 2021

행복하십시오.

<리틀 조>(2019)



<리틀 조(Little Joe)>(2019, 감독: 예시카 하우스너)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실, 배양된 식물들을 내려다보는 카메라가, 기이하게 회전한다.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람들이지만, 시선은 그들에게 있지 않다. 이런 류의 독특한 카메라는, 종종 기괴한 사운드트랙과 함께 등장한다. 천천히 공간을 둘러보다 허공에서 멎는 시선. 두 사람이 대화하는 와중, 각각의 얼굴이 아니라 그 사이를 향해 천천히 클로즈업 되다, 더 이상 신체가 잡히지 않을 때 멈춘다. 꼭, 사람들의 심리나 감정에는 관심이 없는, 리틀 조의 시선 같다.


또 다른 순간의 카메라는, 어떤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를 택한다. 붉은 온실에서 크리스가 앨리스를 때리는 순간, 그는 화면 끝에 위치한다. 담기는 것은 올라간 주먹 까지다. 맞고 넘어지는 앨리스는, 온실 벽에 흐리게 비친 실루엣으로만 보인다. 정신을 잃은 모습은 담지만, 크리스의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유사하게, 벨라가 계단으로 굴러떨어진 후, 쓰러진 그의 몸은 화면에 잡히지 않는다. 작품은 무방비한 여성의 몸을 전시하지 않는다.


<리틀 조>(2019). IMDB 이미지.


리틀 조의 ‘세뇌 바이러스’가 소재,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으로 전개되지만, 그것이 실재하는지 끝까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어떤 방향의 암시 정도가 다다. 크리스가 쓰러진 앨리스의 마스크를 벗긴 까닭이, 꽃가루를 흡입하게 만들기 위함인지, 그 틈을 타 키스(…..)하기 위한 건지(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아니어 보이고), 영화는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다. 조와 셀마의 ‘리틀 조로 묶인 우리’ 고백도, 표면적으로는 조크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묘한 시선 교환, 표정, 행동의 연결고리 등, 뉘앙스로만 유추할 수 있을 뿐, ‘증거’는 없다. 내가 적을 수 있는 건, 리틀 조가 ‘지켜본’, 인간들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결국, 벨라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고, 조는 ‘나랑 다르다’던 아빠랑 살게 됐고, 앨리스는 자신을 때린 남자와 데이트하게 됐다. 리틀 조는 아마도 성공적인 상품이 될 예정이다. 앨리스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조도, 벨라도, 아무것도. 그의 상상이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상담사의 말처럼, 무의식중에 아들과 분리되고 싶어하는 심리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시작된 불안감- 아니, 만약 그 말이 맞다면, 리틀 조에 사실 ‘문제’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다 괜찮은 건가? 이 ‘행복’한 상태는, ‘정상’인가? 앨리스가 크리스와 키스하는 장면은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리틀 조>(2019). IMDB 이미지.

홀로 남은 집에서 앨리스는, ‘행복’한 얼굴로 리틀 조를 내려다본다. 화면이 꺼지고, 목소리가 들린다. “Hi mom.”. 결국 자신을 만든 앨리스의 케어를 독차지하려는 리틀 조의 큰 그림이었다는 건가?(아니다.) 리틀 조는 무엇인가? 식물? 선물? 괴물? 없던 존재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식물이었고 선물이 될 예정이었지만 괴물이 된- 이런 식으로 수식할 수도 있겠으나- 뭐 아무래도 상관 없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과 함께 음악이 흘러나온다. 제목은, ‘Happiness Business행복 사업’이다.


애초에, 리틀 조는 무엇이었는가? 행복 비즈니스를 위한 ‘상품’이었다. 섬세한 돌봄을 필요로 한다는, 돌보는 이와 유대감을 형성하고, ‘행복’한 감정을 유발하는 꽃가루를 날린다는. 화초에 물을 주는 행위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리틀 조에 물을 주는 이는, 그 행위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특수한 꽃가루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행복 바이러스’다. ‘진짜’ 행복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애초에 ‘행복’은 감정이므로.


리틀 조는 허구의 존재이지만, 연구원들이 벨라를 대하던 태도는 현실의 것이다. ‘행복’이 무엇이라는, 이러이러할 때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행복해야 한다는, 강요, 꼭 행복하지 않은 상태는 비정상인 듯 여기는 현상은, 어디 미래소설 속 디스토피아에 있는 게 아니다. ‘리틀 조 식’ 행복은, 공감을 막는다. ‘보편적으로’ 행복한 유대감을 갖는 이들과의 연결만 좇게 하고, 아픔과 슬픔,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차단한다. 자신과 몸싸움하다 넘어져 피를 흘리는 앨리스를 차분하게 내려다보던 조,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지만 힘내 일하자’던 칼처럼.


<리틀 조>(2019). IMDB 이미지.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데에 의문을 갖지 않던 시기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단어 자체가 종종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몇 년 전 <멜랑콜리아>(2011)를 다시 보면서는, “행복해져야 한다”는 말이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자잘한 위화감들로부터 비롯된 고민을 살짝 풀어 봤다. ‘리틀 조’가 아직 없는 세상, ‘어떤 감정을 느낄지’에 대해, 개인에게 완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묻는 중이다, 행복하면 되냐고-다냐고. 폭력의 기억, 타인의 고통, ‘극복되지 않는 것들’을 무시하고, 무감각하게 ‘행복’해져도, 정말 괜찮냐고.



“그 약들은, 날 슬프지 않게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이게 내 옵션이었어, ‘Sad or None’. 약을 그만 먹기 시작하고, 난 무서웠어요. 미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근데 아니었어, I feel great, I feel alive!”


-빌리, <미스 스티븐스>(2016)  


<리틀 조>(2019). IMDB 이미지. 컬러에 대해서는 컬러 전문가 님들이 말씀하시겠지 뭐.(귀찮다)




+

물론 “내 개가 아니어서 안락사 시켰다”, 는 용납할 수 없다.


 

++

“다른 사람들보다 피부를 한 겹 덜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배우.(Trevor Nunn)”. 벤 위쇼에 대한 글에 인용했던 문장이다. <리틀 조>의 서사를 가져온다면, 그야말로 가장 ‘리틀 조 행복 바이러스’에 덜 감염된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섬세하게 느끼고 풍부하게 공감하는.


<더 랍스터>에서도 그랬고, 특수한 상황의 평범한/기능적 서포팅 롤/전형적인 면이 있는 이성애자 남성을 연기하는 벤 위쇼는, 또 다르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매력이랄까. 벤 위쇼의 미스터리한 분위기 체인지 연기는, 화면에 아주 잘 스며들었다. 처음의 그 엌워드한 긴장과 예민함이 붙은 사랑스러운 남자는, 갈수록 자신감과 무심함이 섞이며 미묘하게 소름끼치는 인간으로 변한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키스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 할 때 보내는, 사랑이 하나도 안 담겨 있는 눈빛. 오 세상에, 그 순간, 벤 위쇼를 약간 더 사랑하게 됐다.


<리틀 조>(2019).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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