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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Jun 17. 2021

정말 괜찮아, 야마네 무기?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0)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0, 감독: 도이 노부히로)

Feat. <최고의 이혼>(2013)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어폰은 모노가 아니라 스테레오” 스토리텔링이 이어졌다. 사스가 사카모토 유지를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최고의 이혼> 속 하마사키 미츠오의 많은 장면들과, <콰르텟>의 “가라아게에 레몬을 왜 뿌렸어?” 씬이 겹쳤다. 예술적 강박이 있는 괴짜 둘이 과거에 그 이야기로 공감하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그저 추억의 흔적이었다는 것에 개인적으론 아주 조금 아쉬워했지만(?) -나 같은 인간이 난리 칠 요소들은 섭섭지 않게 넣어 주었다. 잔뜩 있는 문화예술적 취향과 습관이 겹치는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이라니, 얼마나 신기하고 신났을까. 같은 티켓, 같은 신발, 같은 가방. 같은 책들이 빼곡한 책장. 오시이 마모루로 시작되어 ‘로드뷰에서 발견한 그 시절의 우리’로 끝나는 짠 듯한 우연. 살짝 지나치지 않은가 싶었지만 뭐, 그것도 능력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저 아름다웠다. 지진이 난 날 함께 걷다가 이어진 유카와 미츠오가 떠올라 슬며시 웃었다.


“연애도 하나, 하나.”라는 대사처럼, 작품은 하나의 상황에서 각자의 입장을 담은 내레이션을 매번 대칭적으로 넣는다. 서로 몹시 통하고 좋아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게 엉켜 하나가 되었다가, 어긋나고 결국 평행선을 그리게 될 때 까지.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데 사실 무언가 꽉 들어찬, 뭘까 싶었다가 이내 알 것 같은 모먼트들을, 사카모토 유지는 매번 잡아낸다.


키누와 무기가 다시 이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무기의 말대로 결혼해 평생을 함께하는 결말이었다면 마음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만남처럼, 헤어짐도 이상적이었다. 그때의 자신들을 닮은 어린 연인을 보고, 말없이 꼭 껴안고 우는 모습. 누구 하나가 짐을 급히 싸서 휙 나가지 않고, 한 집에 살며 천천히 정리하는 과정. (미츠오와 유카가 이혼하고도 티격태격 지내는 모습이 떠올랐다.) 현재의 연인과 팔짱을 끼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흔드는, 이토록 깔끔한 ‘해피엔딩’.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0). 다음영화.


성격에도 삶의 모양에도 나와 닮은 데가 있어, 키누의 마음은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와닿았다. 나 같은 사람에겐, 소중한 사람과 무언가를 같이 하는 것만큼, 상대가 행위 자체를 즐길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영화든 뭐든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무기의 말에, 키누는 기뻐하지 않는다. 각자 이미 좋아하고 있어 함께 하던 일들이, 이제는 나와 있기 위해 네가 해 주는 게 되었다면, 같은 걸 해도 더 이상 나눌 마음이 없다면,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서점에서 연인이 좋아하던 작가의 신작을 발견하고 신나 달려갔는데, 그가 자기 계발서 코너에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키누는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 서운하고 화가 나다가, 슬퍼지고, 결국 아무 것도 느끼지 않게 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0). 다음영화.

키누에게 공감했기 때문에, 무기를 더 많이 생각했다. 키누가 압박 면접을 본 후 지하철 역에서 울고 있을 때, 그는 슬리퍼를 신고 달려가 안아주었다. 무기는 좋은 남자다. 예술가는 타협하면 안 된다던 선배는, 제 뒷바라지를 위해 애인이 긴자에서 ‘아저씨들을 상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키누에게도 소개해 주라고 할까?” 태연한 물음을 들은 무기의 얼굴에 스친 것은 아마도 미세한 혐오. 그나마 있던 일이 없어지자, 무기는 키누를 떠미는 대신, 본인이 취직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당연하게 여기는 바는, 선배를 비롯한 어떤 이들과는 다르다. 스스로를 좋은 남자로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은 남자라는 증거다. 사람은 변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헤어진 후, 바람 피운 적 없느냐는 물음에, 깜짝 놀라며 생각해 본 적도 없다고 답한다. 예술을 소비하거나 생산할 시간도 힘도 감각도 없어졌지만, 지쳐 웃음을 잃고 섬세함이 부족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다.


몇 년 전 본인이 했던 위로를 키누가 그대로 돌려주었을 때, 무기는 그 말에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이 돼 버린 채였다. ‘하고 싶은 건 하지 말라’며 집을 나와 같이 살자고 해 줬던 그는, 이제 ‘언제까지 애 같은 기분으로 살 거냐’고 말한다. 일이 전부가 됐다. 쉴 때는 서사 없는 핸드폰 게임을 한다. 무기의 삶이 속상했다. 어떤 삶의 방식이 더 낫다는 평가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제 선택에 책임을 지고, 생색을 내거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자세는 멋지다. 그러나 그게, 무기의 선택이었나. 일러스트 의뢰인이 약속한 대로 한 장에 천 엔을 꼬박꼬박 주었다면, 입사한 회사가 약속한 대로 다섯 시 퇴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너와의 현상유지’를 위해 ‘선택’한 수단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던 실이 다 닳아 버렸다. 너도, 너와 내가 함께 하는 것들도 소중했었는데, 갈수록 내겐 그것들을 할 여유가 없어지고, 그러다 보니 점점 모르게 되고, 느끼지 못하게 되고, 사랑도 설렘도 사라지고, 결국 너 하나만 남았다. ‘리얼 라이프’로 꽉 찬 무기의 삶에 그나마 쉴 곳이 키누와 사는 집이었을 테다. 뜬금없는 청혼이었지만, 알 것도 같았다. 바론을 무기가 맡게 된 건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 과정을, 무기가 ‘어른이라서’ 보자기를 냈기 때문,으로 이은 디테일은, 소소하게 절묘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0). 다음영화.


정말 무기는, 어른이 된 것 뿐일까. ‘젊은 날의 놀이’로 가스탱크를 세 시간 동안 찍거나, 역 앞에 서서 책을 읽거나, 연습장을 꽉 채워 일러스트를 그리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가 그 시절을 오로지 과거로 여기게 된 것이 슬펐다. 미뤄졌다 바스라진 그의 조각들이 아쉬웠다. 무기는 괜찮다고 할 것이다. 어른이 못 돼서 일까, 나는 그게 안 괜찮았다.





+

초반의 무기는 스다를 닮았다. 스다 저 같으면서 무기 같았다. 이제껏 맡은 인물 중 유키토보다도 더 스다를 닮은 것 같다 했다. 후반의 무기는 스다 안같다. 근데 여전히 무기 같다. 영화를 보고 집에 가는 길, 옆에 있던 분이 일행에게, 스다는 양복이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라고 말씀하셨다. 엿듣고 싶지 않아 바로 귀에 이어폰을 끼웠지만, 뭔지 알아요!! 하고 외치고 싶었다. 조금 바꿔 말해 본다. 무기인 스다는 양복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나도 안 멋졌다. 그게 포인트였다. 스다는 온통 멋질 수도 하나도 안 멋질 수도 있다.

(스다는 나이가 몇 개든 유라유라 할 것 같은 사람이라 다행이지만, 그럴 수 있는 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모든 야마네 무기들이 속상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2020). 다음영화.


++

일본 예술을 잘 몰라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마법 같은 기분이 뭔지는 안다.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낯선 동갑내기의 지갑에 짐 자무쉬 특별전 티켓이 들어 있다면. 가방에서 프라이드 영화제 굿즈가 튀어나온다거나, 그 또한 2x9필름 GV를 매번 갔다거나, 책장에 데미안은 없고 황야의 이리가 있다거나, 또 굿바이베를린 번역본과 원서가 나란히 있다거나. 쓸데없이 예가 길어졌는데, 아무튼 그런 거다. 영화 티켓을 책갈피로 쓰는 것과, 굿즈 에코백에 뱃지 매달고 다니는 건 좀 공식.


+++

사카모토 유지가 감수성이 있는 작가라고, 나는 믿는다. 감수성은 있는데, 스탠스를 분명히 하지는 않는다. 나나가 겪은 데이트 폭력을 짚고 넘어가되, 개인적인 뉘앙스로 흘린다. “무기와 같은 마음으로 슬퍼할 수 없었다.”는 정도지만, 선배의 장례식, 두 여성의 시선 교환은 의미가 있었다. 영화를 본 연인들은, 그 이야기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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