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머 85>(2020) - (2).
*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썸머 85(ÉTÉ 85)>(2020, 프랑수아 오종)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 다비드 구르망에 관한 짐작
“왜 시간을 낭비해? 우린 영원하지 않은데(mortal).”
얼마 전 알게 된 자신에게 끌리면서도 머뭇거리는 알렉스에게, 다비드는 말한다. 행동의 기준, 감정과 관계 변화의 근거가 되는 대사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알렉스의 기억이고, 이 이야기의 다비드는 그의 기억 속 존재, 글을 통해 ‘되살아난’ 다비드다. 숨막히게 매력적인 형태로 대상화되어, 온갖 완벽한 제스처와 클리셰적 멋진 말을 날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왠지 나는 ‘화자’와 함께 웃고 울면서도, 이 ‘대상’의 속이 자꾸만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돌이켰고, 상상했다. 이것은 그 짐작의 무더기다. ~했을까, ~했을 수도 있겠다, ~했을지도 모른다, 따위의 애매한 투로 적을 수 밖에 없었으나, 적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나는 <썸머 85>를, ‘성장 영화’라고 수식할 수 없었다. 다비드는, 성장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죽음에 끌리던 알렉스는 삶에 남겨지고, 삶을 느끼려고 애쓰던 다비드는 죽었다. 죽음을 비웃기 위해 둘 중 하나가 먼저 죽으면 그 무덤 위에서 춤을 추자던 다비드, 잭나이프를 연상시키는 빗으로 항상 예쁜 머리카락을 슥 넘기던 다비드. 미래를 그리기보단 죽음을 예감하며 살던 건 다비드-알렉스의 기억 속 다비드-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토바이로 속도를 따라잡기, 홀로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기, 밤마다 클럽을 돌아다니기- 살아 있다는 느낌을 위해 다비드가 하던 것들 모두, 죽음에 빠르게 가까워지는 행위들이다. 매초 죽음에 가까워짐을 깨달아서 더, 살아있음을 느끼는 데에 집착하는 무한 반복에 빠졌던 걸까.
애초에 다비드에겐 제 목소리가 없다, 보여지고, 들려지고, 생각되는 존재다. 그를 살려낸 건 배우다. 매력이 다는 아니다. 내내 능글맞게 웃음을 날리다가 가끔 멍하게 허공을 향하는 눈빛 같은 -제 기능을 충실히 하는 와중 기습적으로 보여 주는 깊이. 별안간 가슴이 내려앉았던 부분은,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싸우고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일부러 나쁜놈이 되려는 듯-아마 알렉스에게 상처로 남은 탓이리라- 저 잘난 맛을 아는 입꼬리, 애정이 다 식은 차가운 눈빛으로 응대하다가, ‘지겨운 게 너’ 라고 고함을 지른다. 그 후, 속내를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그 얼굴이, 너무 깊게 아파 보이는 게 아닌가. “넌 나 자체를 원해, 그건 부담스러워, 불가능해.” 그때부터 화나 식식거리는 알렉스는 들어오지 않고, 다비드의 마음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지겹다는 건 어느 정도 위악이었을 게다.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원하는 관계의 방식이 달랐던 것 뿐이었을텐데.
알고 싶어졌다, 다비드는 왜 그랬을까,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었을까. 타고난 성향인지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다비드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건,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해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사람들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거나, 죽음에서 최대한 멀리 떼어 놓기 위해. 술 취한 뤽을 구한 것도, 어느 정도는 정말로, 무슨 나쁜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 였던 거다. 정색하고 달려가는 얼굴에서, 언뜻 두려움이 비쳤다. 알렉스를 쫓아 헬멧도 안 쓰고 질주한 것도, 그가 갑자기 어디서 죽어서 나타날까봐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결국 그 길로 죽은 건 본인이 됐지만.
그의 엄마가 엉망이 된 가게에 들어갔을 때, 다비드의 널브러진 실루엣이 보인다. 역시 짐작뿐이지만, 그는 약간 놀라 넋이 나간 것 같았다. 타인과 함께 즐거운 것만 생각했지,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만 집착했지, 자신이 타인에게 그렇게 커다란 존재가 되어, 영원하지 않은 삶에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을까. 알렉스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는 관계 없는 충격 때문에, 놀라 정신을 빼놓고 있다가, 갑자기 무서워져서, 쫓아간 거다. 그 순간 그가 초점에서 벗어난 채 찰나의 실루엣으로만 잡히는 까닭은, 알렉스가 목격한 장면도, 상상한 장면도 아니어서다. 캐릭터를 섣불리 단정 짓지 않는 오종의 감각이 보였다.
아빠에 대해 항상 생각한다고 다비드는 말했다. “지난 일이야, 아빠는 죽었고 나는 살아 있잖아.”라고도. 그처럼, 알렉스 또한 항상 다비드를 생각하며, 죽은 그와 살아있는 자신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와의 약속을 계기로. ‘내 무덤에서 춤을 추라’는 것이 아버지와의 약속이었냐고 묻자 다비드는, “아니, 근데 그랬더라면 좋았겠다.”라고 진지하게 답한다. 예감을 하고 있었던 걸까, 스스로의 경험에 비추어, 내 죽음으로 누군가 오래도록 아프지 않았으면, 남겨진 사람들이 ‘죽음을 비웃는’ 행위를 통해 마음을 치유했으면 하고 바랐던 걸까. 구체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더라도, 무의식중에 하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마지막 장면, 다비드가 살린 알렉스와, 어쩌면 다비드가 살렸을지도 모르는 뤽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다비드가 둘을 봤다면, 왠지 흐뭇하게 웃었을 것 같다.
거 봐, 핸섬, 나 잘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