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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an 01. 2021

자신을 '살린' 존재를 기억하는 예의

<썸머 85>(2020) - (1).



<썸머 85(ÉTÉ 85)>(2020, 프랑수아 오종)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자신을 ‘살린’ 존재를 기억하는 예의



내게 ‘믿고 보는’의 의미는 종종, ‘감수성이 의심스럽지 않은’이다. 어느 시점 이후부터, 프랑수아 오종에게도 붙이게 된 수식이다. 이 감독의 작품에 담긴 인간에 대한 감수성은, 매번 믿음을 주었다. 동시에, 나를 뒤흔들어놓았다. 때로는 예상을 벗어나는 생소한 충격을 줌으로써, 때로는 익숙한 범위 사이의 생각지 못했던 공간을 건드림으로써. <썸머 85>는 후자에 가까웠다.



<썸머 85>(2020). IMDB 이미지.


플롯은 두 개다. 알렉스의 글: 다비드를 만나고 그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기까지의 이야기와, ‘무덤 위에서 춤을 추’고 끌려온 이후부터, 글을 쓰기까지의, 또 그 이후의 이야기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 엘리오의 기억을 그려, 영화 자체를 완전하고 아름다운 추억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면, <썸머 85>는, 처음부터 이것이 주관적인 기억임을 명시하며, 현실과 더불어 시작한다. 기억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잊을 만 하면 복선을 던져놓는, 예측 가능한 이 연애와 죽음의 전개는, 계획적으로 끔찍하다. ‘네가 지겹다’는 말과 함께 이별을 선언한 연인이, 뛰쳐나간 자신을 쫓아오다 사고로 죽었다. 실연의 아픔에 빠질 새도 없이, ‘나 때문에’라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장례식에 갈 수도 없고, 추억할 사진조차 없다. 죄책감과, 점점 흐려질 기억만 남은 알렉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내 무덤에서 춤을 춰’를 지키는 것 뿐이었다. 그 행위는, 글의 계기가 된다.


<썸머 85>(2020). 트레일러 스크린샷.


전개를 누군가는 또, ‘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근데 뭐, 얼마나 신선해야 할까. 작품에서 중요한 건, 있었던 일 자체보다는, 기억하는 알렉스의 언어와 그것이 화면에 담기는 형태라고 느꼈다. 알렉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관객이 이입하는 것을 완전히는 허용하지 않는다. 본인의 감정과 다비드의 존재가 ‘이야깃거리’로 소비되길 원치 않는다. 작품 자체가, 인물을 다루는 태도이기도 하다. 알렉스의 내레이션이 ‘문 너머에서 일어난 일이 궁금하냐’고 물으며 ‘살면서 보낸 가장 아름다운 밤’을 묘사하기를 거부할 때, 화면에 잡히는 건 문고리 구멍이다. 처음부터 알렉스는, ‘그 시체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면, 여기서 멈추라’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노려봤었다.


이처럼 ‘플롯의 연출은, 알렉스의 글이 제시하는 방향대로 움직인다. 알렉스가 다비드를 따라 죽는 상상을 하며 여러 방법을 언급할 , 칼로 몸을 긋거나 목을 매다는 모습들이 화면에 등장한다. 다비드가 질주한 까닭을 상상하는 부분에서, 케이트와 키스하던 다비드는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런 연출이 나는, 매우 좋아버리고 말았다. 프랑수아 오종의 연출이나 서사에 있는, 누군가는 무리수나 사족이라고  법한 요소들에 나는 반하곤 한다. 안전한 길로 가는 대신, 영화를 보는 이들과 만드는 이들 모두에게 가능성을 열어 주는 느낌이어서다.  감독은 이미    어느 경지에 달했고(개인적 선호다), 이제 과감한 정도를 자유자재로 절묘하게 조절한다. 35년을 기다린 그는, 자신에게 굉장한 의미였던 이야기를 자신 있게, 자기 식대로, 영화에 담으며, ‘나는  만드는가 대한 답을 내린다.  


그 안에서, ‘큰 그림’을 위해 낭비되는 존재는 없다. 오종은 늘 그렇듯, 감수성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알렉스는 다비드의 시체를 보기 위해 ‘여장’을 한다. ‘노말’한 이성애 로맨스 서사로 감독관을 속이기 위해, 다른 형태로 ‘퀴어’해진다. 그가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입는 것에 유머 코드는 없다. 처음에 알렉스는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거울을 보며 “다비드가 좋아했을까?”하고 묻는다. 집에 돌아온 후, ‘혐오’하며 벗어버리지 않고, 그 상태로 멍하니 주저앉는다. ‘네가 여자 속옷을 입고 뛰는 게 웃겼으니 봐준다’는 건 케이트의 정서지, 작품의 정서가 아니다. 알렉스는 그 말에 웃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화내는 등의 어떤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음 대화를 잇는다. 엄마가 언급하는 ‘엉클 마키’로, 작품의 태도는 더 확실해진다. 크로스드레서나 트렌스젠더의 존재를 해프닝으로 소비하거나, 삭제하지 않는다. 다비드의 무덤에 가는 길, 알렉스는, “엄마는 엉클 마키 좋아했어?”라고 묻는다. 엄마는 그렇다고 답한다.


<썸머 85>(2020). IMDB 이미지.


알렉스가 다비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지지가 있었다. 언급하고 싶은 두 인물이 있다. 먼저 미스터 르페브르, 이상적인 멘토 형태의 엘라이다. 처음부터 알렉스가 ‘글쓰기’를 선택지에 놓을 수 있도록 했으며, 동등한 인간으로서 알렉스를 존중한다. ‘약속을 깰 수 없다’며 이야기는 본인에게서 들으라고 자르기도 한다. <신의 은총으로>(2019)에서 오종과 함께 작업했던 멜빌 푸포의 섬세하고 무심한 연기에, 왠지 마음이 놓였다.


또 케이트가 있다. 어떤 ‘역할’을 하는 기능적 인물인데, 역할의 변화가 상당히 입체적이다. 감수성이 완전하지는 않으나, 지지는 완전하다. 다비드의 죽음 후, 그와의 관계에 대한 알렉스의 말을 듣고, 다비드의 호모섹슈얼리티에 대해 놀라는 대신, 곧바로 사과한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유쾌한 에너지를 주고, 물리적으로 도우며, 판단은 주제넘지 않게, 조심스럽게 건넨다. 알렉스에게 건넨 키스는 케이트식 응원의 표시(로 해석하고 싶)다. 재판이 끝난 후 그는 잠시 알렉스를 바라보다, 미소를 띠며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간다, 마치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썸머 85>(2020). IMDB 이미지.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첫째로 그 죽음의 당사자 다비드가 있었다. 이를 설명하려면, 먼저 그가 살아있던 순간들을 묘사해야 한다. 다비드는 알렉스가 바라보는, 함께하는 대상이자, (의도했든 아니었든)알렉스가 스스로를 다시 바라보고 온전한 혼자가 되는 것을 돕는 이다. 화자는 알렉스, 대상은 다비드인데, 두 사람이 함께 누워 있는 씬에서 대상화되는 몸은 알렉스의 것이다. 카메라는 다비드의 손동작을 따라 그의 몸을 훑는다. 그리하여 화자에 이입한 관객이, 그와 함께 대상을 ‘보는’ 것 뿐 아니라, 함께 ‘느끼게’ 만든다. 타인의 손길과 시선에 의해, 스스로의 몸을 새로이 느끼고 욕망하는 경험이다. 후에 알렉스가 다비드의 시체를 만져 심장을 뛰게 하려 했던 까닭은, 그의 손길에 의해 살아났던 감각을 무의식중에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클럽에서 신나게 놀던 두 사람. 다비드는 알렉스의 뒤로 다가가, 헤드폰을 씌운다. 빠른 템포의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과, 별안간 흘러나오는 느리고 웅장한 멜로디, 대놓고 <라 붐>(1980)이다. 작품 자체로도 패러디/오마주 인데, 극 안에서부터 패러디라는 점이 재미있다. <라 붐>이 1980년도 작, <썸머 85>의 배경은, 1985년. 다비드는 영화의 유명한 한 장면을 따라 알렉스에게 로맨틱한 장난을 건 것이다. 사실 고전을 챙겨보는 편은 아니어서, 처음엔 오리지널인 줄 알고 살짝 신기해했다. 영화가 끝난 후 스틸컷을 보다 깨달아, 그 장면만 찾아봤다.


오리지널 씬에선 사람들 속에서 둘만 교감하는, ‘둘만 남는’ 장면일텐데, 여기선 좀 다르다. 다비드는 알렉스의 머리에 헤드폰을 씌우고, 그의 리듬에 맞춰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라, 울려 퍼지는 댄스음악에 맞춰, 누구보다 난리나게 몸을 놀린다. 희한하게 어울리며 배경이 된다. 알렉스는 멈춰 서서, 그런 다비드를 ‘관람’하며, 사람들 속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어, 사랑에 빠진 스스로와 마주해, 순간의 감정과 공기에 취한다. 그리고 당연히, 알렉스가 다비드의 무덤에서 춤을 출 때 듣는 음악은 ‘바로 그 곡’이어야만 했다.


<썸머 85>(2020). IMDB 이미지.


작품이 ‘그 곡’으로 ‘Sailing’(Rod Stewart)을 택한 까닭은, 단순히 두 사람이 배 위에서 만났기 때문은 아니다. 들을수록, 죽음의 이미지에 가까운 곡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sailing’은 ‘dying’의 뜻으로, ‘we are sailing’은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간다’는 비유로 들렸다. 이야기 안에서 이 곡을 처음 고른 것은, 다비드다. 알렉스는 다비드가 들려준 죽음을 들으며 그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춘다. 약속의 실행이자, 죽은 그에게 닿으려는 행위다. “I am dying, forever crying. To be with you, who can say.”라는 가사는 꼭, 영어를 잘 못한다던 알렉스가 하는 말 같았다. 다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죽어 누워 있는 다비드마저 알 수 없는, 혼자만의 느낌, 기억, 약속, 애도다. 그때도 지금도, 알렉스는 홀로였다.


문제의 그 씬은, 묘사가 불가능하다. 내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고, 대충 어떤 타이밍일지,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지도 다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스크린을 통해 보는 순간, 숨을 헉 하고 들이쉬곤, 날숨을 뱉을 새도 없이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에이단 체임버스의 아이디어, 화면 가득 흘러나오는 로드 스튜어트의 갈라지는 목소리, 펠릭스 르페브르의 ‘바로 그거’라고 표현하고픈 엉성하고 완벽한 몸짓, 그걸 모두 절묘한 각도로 조합한 프랑수아 오종.


‘내 무덤 위에서 춤을 추라’는 건, 다비드가 강요한 약속이었다.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던 약속, 죽음 이후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 이었던, 당사자는 ‘죽음을 비웃는다’고 표현한 그 행위는, 죽음이 존재를 먹어버리지 않게, 존중하고 기억할 수 있게 했다. 알렉스가 죽음을 ‘극복’이 아니라 ‘체화’하는, 치유의 실마리를 건넨 것은, 다비드 본인이었다. ‘약속을 지켰으니 됐다, 누구도 알 필요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알렉스가 쓰기로 결심한 것은, 다비드를 기억으로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썸머 85>(2020). IMDB 이미지.


이것은, 어떤 시체에 대한 기억, 알렉시로 불렸던 화자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알렉스로 정의하게 된 시간, ‘85년의 여름’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알렉스를 살아있게 했다. 자신의 칼립소를 몰던 다비드는, 빌린 배가 뒤집혀 물에 빠진 알렉스를 살리고, 함께 배를 타고, 결국 죽는다. 케이트의 말처럼, 알렉스가 사랑한 건 스스로 만든 이미지였는지 몰라도, 그가 여름에 만난 이도,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그 시체’도, 실재하는 다비드였다. 그가 남긴 칼립소를 방치하지 않고 취하며 알렉스는, 잊어버리거나, 예쁘장한 색을 입혀 ‘추억’하는 대신, 가슴이 찢어지더라도 실제 모양을 ‘기억’하기를 택한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또 ‘살아나게’ 해 준 존재에 대한 예의다.



*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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