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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Dec 04. 2020

나는 울었고, 메라비는 울지 않았다.

<And Then We Danced>(2019)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And Then We Danced)>(2019, 감독: 레반 아킨)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And Then We Danced>(2019) 포스터.


노란 배경에 붉은 옷을 입고 날아오르는 사람 하나, 그리고 ‘And Then We Danced’. 포스터 속 글과 그림의 어우러짐이 예뻐,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용도 모른 채 좋아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 부러 시놉시스만 슥 읽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두 시간 후 엉망진창이 되어 터덜터덜 걸어나오며, ‘예쁘장한’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한 것에 대해, 또 당신의 삶을 눈물로 소비해 버린 것에 대해, 메라비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아직 조금씩 울먹이고 있었다.

카메라는 춤추는 댄서들의 신체를 클로즈업하며 빠르게 움직인다. 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팔이 공기에 스치는 소리, 숨소리 따위의, 현장의 소리가 들린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라, 속에 들어간 노력과 간절함이 두드러진다. 이와 달리, 메리네 모여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정적으로 이어진다. 전날 밤의 만남 후 이라클리와 메라비 ‘사이에 끼어 있는 것들’을 보여 준다. 조각난 사회를 전통이라는 허상으로 덕지덕지 꿰매는 기성세대에 억눌린 숨을 틔우려는, 조지아의 누군가들 모두의 이야기라는 뜻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녀의 순결’을 강조하던 무용단 선생의 고루한 눈동자와, 임신한 채 웨딩드레스를 입은 소포의 그렁그렁한 눈물이 겹쳤다.


<And Then We Danced>(2019). IMDB.


동시에, 이것은 메라비만의 이야기다. ‘식상한 플롯의 퀴어 로맨스’라는 식의 평을 언뜻 봤다. 내가 본 <And Then We Danced>는, 로맨스 영화나 성장 영화 따위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없는, 메라비의 이야기, 동시대 조지아를 살아가는 젊은 댄서의 이야기였다. ‘부딪혀봐 모두 걸고’라는 한국판 포스터의 문구는(또 태클)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걸 게 남지 않은 메라비는, 상처 가득한 온몸을 이미 오래전부터 부딪히고 있었으니까.

연습이 끝나면 버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식당에서 접시를 나른다.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싸들고 집에 온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도, 노트북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댄서들의 영상을 보다 잠든다. 새벽에 일어나 연습실로 향한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의 일상엔 생활이 꽉 들어차, 힘들어할 겨를이 없다. 꿈이나 예술과 단단히 얽혀 있는 것은, 생존이다. 춤은 순수한, 자유로운, 아름다운 미래이기 전에, 필사적인, 절실한, 현재의 생계 수단이다. 메라비의 부모님과 외할머니도 댄서였고, 메라비도 메리도 아주 어려서부터 춤을 췄다는 언급으로 봤을 때, 조지아에서 전통무용은 그나마 안정적일 가능성,이 있는 직업 중 하나인 듯 하지만, 국립 무용단에 들어가도, 유명한 무대에 올라도, 결국 ‘잘 되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메라비의 춤에 대한 열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는 쉬거나 놀 때도 춤을 춘다. 종일 열심히 췄으면서, 추지 않아도 될 때조차 기꺼이 춘다. 누구와 함께, 누구를 위해, 어떻게 추는가에 따라, 업이 되기도, 놀이나 사랑이 되기도 한다. 춤은 그에게, 삶의 방식이다.


이라클리와 메라비가 서로에게 끌리는 과정은, 흔하게 아름답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첫사랑 서사는 어찌 보면 거기서 거기지만, 그 디테일과 묘사 방법에 따라 새로워진다. 이 사랑 안에는 ‘삶’이 얽혀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가난하고 평범한 역사, 빼곡한 일상의 틈새를 나누며 가까워진다. 겉으로는 우정-둘만 아는 애정,을 주고받으며 파트너로서 춤추는 그들의 즐거운 케미가 특별했다. 넋을 놓았다, 이라클리를 ‘앓는’ 메라비의 자글거리는 눈가가, 간질거리는 입가가, 너무 예뻐서. 그러다 눈물이 났다. 긴장된 얼굴로 하루를 버티다가도, 이라클리와 춤을 출 때 만큼은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메라비의 실루엣이, 너무 예뻐서. 숲 속 커다란 바위 뒤에서 사랑을 나누고 난 메라비와 이라클리는, 한참 온몸으로 서로를 부둥켜 안은 채 웅크려 있었다. 이 밤이 지난 후를, 알 수 없으므로.


<And Then We Danced>(2019). IMDB.


보수적인 사회 속 남성과 남성 간 로맨스를 다룬 몇 작품에서, 사랑은 평화롭고 풍족한 일상을 뒤흔든다. 메라비에게 사랑은, 흔들리는 일상을 붙잡아 주는 존재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형과 함께 일터에서 쫓겨난 상황, 낯선 이에게 겨우 얻어낸 1리라는, 핸드폰을 충전해 이라클리에게 문자를 보내는 데에 쓰인다. 다른 ‘퀴어’들과 함께 게이바나 클럽을 도는 모습은, 무너져서 ‘막나간다’는 전형적인 묘사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너지기 직전 자신을 다 드러내도 되는 공간을 접하고, 약간의 힘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밤을 샌 후, 서라면 서고, 돌라면 돌던 메라비는, 처음으로 선생의 말을 어긴다. 음악이 멈추고도 턴을 계속하다 발목이 나간다. 엉엉 울며 아파하던 그는, 이라클리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이제 아프지 않다’고 말한다.

영 ‘헤테로’ 남성 집단에서, 누가 누구를 ‘목격’하고 폭력을 가하는 서사는 ‘종종 있는데’(감히 식상하다고는 하지 말라. 실제로 빈번히 발생하는 일이니까 담는 거다.), 그날 밤 ‘목격’ 이후 루카의 행동은, 그 무렵 메라비가 겪는 여러 일들 중 하나(혹은 메라비가 데이비드에게 커밍아웃하는 계기) 정도로 지나간다. 메라비는 부정하지 않고, 화풀이처럼 반사적으로 맞받아쳐 싸운 후, 그냥 무시해 버린다. 신경을 쏟아 주지도, 져 주지도 않는다. 양아치 무리의 괴롭힘은 괴롭지도 않을 만큼, 고통이 이미 넘쳤기 때문도 있겠지만-메라비 스스로, 이 사랑이 잘못된 것일 리가 없음을 알고 있는 듯 했다. 여리고 섬세한 만큼 강하고 곧은 메라비가, 나는 대단하고 아팠다.


<And Then We Danced>(2019). 트레일러 스크린샷.


메라비 원톱 주연인 이 영화의 두 번째 주인공은, 이라클리가 아니라 메리다. 따지면 이야기 속에서 메라비에게 화낼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자, 메라비를 가장 온전히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이다. 내내 메라비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정확히 알아챈다. 작품은 무용단에서 쫓겨난 자자의 이야기를, 메리의 귀에 들어가도록 설정했다. 메리에겐 좀 못된 전개다. 상처와 원망을 걱정이 덮게 만든다. 메리는, 분노나 서운함이 아닌, 걱정이 맥시멈이 된 순간에야 언성을 높인다. 어쩌면 이 관계가 로맨스보다는, 유대감과 우정에 기반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형의 결혼식장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약혼 소식을 들은 메라비와, 그를 눈으로 좇던 메리는, 껴안고 엉엉 운다. 자유롭게 춤을 추는 메라비를 보며 메리는 환호하다, 또 눈가를 훔친다. 그 눈물들은, 완벽한 지지의 표현이었다.

여기 또 한 형태의 지지가 있다. 데이비드는 ‘호모’의 뉘앙스와 의미 모두를 당연히 모욕으로 받아들이며, 동생을 위한답시고 결혼식 날 주먹질을 한다. 메라비 본인에게 ‘호모’가 맞다는 것을 듣고 난 그는, 잠깐 멈춰 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움직인다. 눈치채지 못한 메라비가 고개를 푹 움츠리자, 멈칫 했다가 다시 뻗는다. 그 답지않게 조심스러운 머뭇거림에서, 진심이 어른거렸다. 그는 말한다, ‘네가 나보다 나아, 넌 조지아를 떠나서 잘 살아야 돼’. 직접적이고 완벽한 ‘이해’나 ‘인정’은 아니나, 그 정도 반응이, 데이비드에겐 최고의 지지가 아니었을까. (<분장>(2016)의 송준과 정 반대에 있는 태도랄까.)

 

<And Then We Danced>(2019). 트레일러 스크린샷.


메라비는 발목에 붕대를 감고, 오디션을 본다. 명예나 생계 때문이 아니다. 메라비는 사랑과 함께 자신의 춤을 완성했다. 이루어졌다 부서진 사랑은 메라비 속에서 춤추고, 메라비는 기억이 담긴 옷을 입고 온몸으로 사랑을 그린다. 전통 의상을 입고, ‘우리 춤을 모욕하는’ 몸짓을 한다. 최선을 다해 순수와 ‘남성성’을 버리고, 한 남자로서 섹시해진다. 메리와 나는 울었고, 메라비는 울지 않았다. 선생을 똑바로 노려보며 ‘우아하게’ 옷자락을 들어 올려 인사했다. 마지막 순간 뒤돌아 천천히 걸어나가며 옷을 벗었다. 춤의 마무리이자, ‘메라비의’ 춤에 시작이 되는 제스처다. 그 등이 말했다, “이라클리, 나는 너를 입고 비로소 나의 춤을 찾았어, 그리고 이제는 널 벗을거야.”

의도적으로 우겨 넣지 않아도, 메라비의 춤엔 그의 사랑과 역사가 담겨 있었다. 자리를 지키는 메리, 장단을 잇는 연주자들 모두 그의 싸움을 응원하고 있었다. 나는 감히 그 마음들을 서술하려 들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린’ 춤을 추었다. 이라클리의 기억과 함께, 메리의 연대와 함께, ‘전통’이라는 그들만의 룰에 억눌려 있던, 예술가들의 에너지와 함께, 메라비는 홀로, ‘우리의’ 춤을 추었다.  


<And Then We Danced>(2019). 트레일러 스크린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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