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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Sep 24. 2021

한호열, ‘엮이다’.

한호열 in <D.P.>


한호열 in <D.P.>(Netflix, 2021)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Netflix), 1화는 힘들었다. 잘 만들었다는 뜻이다. 2화, 캐런 듀발과 그레이스 라스무센!!이 등장했다. 여전히 힘들긴 해도 그들 덕에 완전히 몰입했다. 현실적으로 잘 만들어서 버거운 1화를 겨우 넘기면, 새로 삽입된 인물, 수반되는 전개가 작품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경우가 있다. <D.P.>(Netflix), 한호열은 그런 존재다. 그가 카메라에 들어오자, 연출이 코미디 섞인 버디 수사물의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D.P.>(Netflix). IMDB.



한호열은 첫인상을 단단히 남긴다. “한 번 뿌리는 데 PX 냉동 이천원어치.” 딜을 잘 하는 인간, 그리고…. 샤워를 세상 행복하게 하는 인간? <Welcome to my home>(2013, 구교환)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됐다. 예상보다 빨리 복귀하게 되자, “내 마음의 상처는 몰라주고.”라며 아련하게 중얼거리더니, 눈을 번득인다. “자 우리 다같이 나갑시다. 아저씨 얘들 다 담배 폈어요.”


이후 한호열이 끊임없이 하는 ‘또라이짓’에서, 이 배우감독의 전작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매 순간이 반가웠다. 라면을 끓이며 홀로 라디오 디제이마냥 쫑알거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희한한 로봇댄스를 춘다. 새우깡은 말과 함께 입 안으로 비행기 태운다. 목욕탕에서는 머리에 바가지를 얹는다. 관등 성명은 단 한번도, 그냥 나오는 법이 없다. 라면을 가득 우물거리며 대충, 휴가 중 걸려온 박범구의 전화에는 불만 가득한 소리로 시위하듯, 자꾸 ‘호영이’라고 부르는 임지섭에겐, 눈을 부라리며, “상병 한, 호, ‘’”. 어찌 구교환을 캐스팅할 생각을 했을까. 폭넓은 배역을 ‘구교환스럽게’ 소화하는, 클리셰마저 새롭게 만드는 배우. 내겐 익숙한 그의 표현법은 장면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적당히 전형적이고 매력 있는 ‘사이드킥’ 정도의 인물이, 배우를 만나 ‘원앤온리’로 빛났다.


구교환의 연기에 관한 글이었다면, 그가 어떻게 온갖 끼를 부리며 시청자의 혼을 빼놓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진지한 몰입을 유도하는지를 묘사했겠으나- 이번 대상은 한호열이다. 독보적인 개성을 되새김질하며, 사람됨, 안준호와 주고 받은 영향, 그가 해낸 것과 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D.P.>(Netflix). IMDB.


안준호와의 첫 대면 역시, 첫 등장만큼 드라마틱하다. 황장수의 말을 받으며 문을 벌컥 연다. 손을 슥 들어 ‘안뇽’ 하고 인사. “뭐야, 나 투명인간이야?”, “나 죽어. 죽는대.” “한.마.디.” 구교환의 독특한 음색과 말투를 거쳐 나오는 대사 하나하나가 별거다. 대충대충, 장난스러운 듯 한데, 똑바로 뜬 눈 속에 맴도는 기운이 심상찮다. 그 눈빛을 사선으로 쏘며 “오 니가 안준호구나, 내 아덜.” 하는 순간, 잠깐 긴장했다. 다행히 기우. 지금부터 내가 널 챙기겠다는, 그리 무겁지 않은 신호였다.


장난과 폭력은 때로 한 끝 차이다. 황장수 패거리 또한 조석봉을 괴롭히며 종종 말한다, “장난이야 장난.” 그러므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호열이 안준호에게 하는 행동들의 성질을. 그들 사이엔 계급이라는 권력 관계가 있지만, 한호열은 딱히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형’이라고 칭하고, 종종 가르치려 들지만, 귀여운 꼰대 정도로 봐 줄 수 있다. “밖에서는 형이라고 불러.”는, 태도의 일관성을 수반하기에 진심이다.


한호열은 누구처럼 재미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장난에 대개는 의도가 없다. 그것은 일상, 메소드 배우의 필살기. 상대의 반응과 상태를 살피며 선을 지킨다. 반가워하며 꼭 껴안았다가도 안준호가 불편해하자 금방 몸을 떼고 손을 든다. 장난을 빙자한 폭력을 가하는 이는, 상대가 자신에게 같은 행동을 하면 받아들이지 못한다. 졸지 말라며 물을 뿌리던 한호열은, 안준호가 짜증을 내도 개의치 않더니, 욕을 하며 맞받아 물을 뿌리자 신나 뛰어다닌다.​


<D.P.>(Netflix). IMDB.

 

인물마다 말하기 방식이 다르다. 힘을 뺀 척 은근히 뼈를 숨겨 놓는 임지섭과, 감추고 숨기느니 그냥 않거나 지르는 박범구. 참는 듯 하지만 결정적으로 할 말은 하는 편인 안준호. 그리고, 무얼 말해도 이상하고 자연스러운 한호열. 끊임없이 특유의 리듬으로 조잘거리다, 별안간 중요한 말을 툭 던지곤 한다. 권위적으로 언성을 높이는 데에는 대개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에, 삼초면 긴장이 풀린다. 호스트 가라오케에서는 소리를 지르더니 안준호가 몸에 힘을 빼자마자 룸으로 밀어넣고, PC방에서는 “보자보자하니까 보자기- 뭐야”라며 흐린다. 진지하게 ‘화’ 비슷한 것을 낼 때는, 안준호가 허치도의 할머니를 ‘동정’했을 때, 또 엄마에게 인사 없이 떠나려고 했을 때다.


최준목 어머니가 ‘아들 같아서’ 주는 돈을 안준호가 사양하자, 한호열은 냉큼 가로막고 공손히 받는다. 곱지 않은 시선을 태연하게 넘긴 그는, 그것을 꿍치거나 부족한 여비에 보태지 않고, 영리하게 수사에 쓴다. 그런 ‘잔머리’는 단순히 경험이 쌓여 생기는 건 아니다. 일을 할 줄 아는 한호열은, 함께 일할 줄도 안다. 기꺼이, 또 친절하게 작업의 과정을 설명한다. 박범구의 욕은 혼자 듣고, 중요한 정보는 스피커폰으로 돌린다. 혼자 해도 되는 건 혼자 슥 해놓고, 결과를 공유하며 파트너의 의견을 적극 듣는다. 두 사람 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한호열의 붙임성과 능청은 안준호가 죄책감에 매몰되지 않고 일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D.P.>(Netflix). IMDB.


한호열의 작업은 배우의 것과 비슷하다. 탈영병이 ‘되어 본다’. 그러기 위해 사람들을 만난다. 한편으로 치밀하게 예측하고, 다른 한편으론 능숙하게 낯선 공간에 섞이며 묻고 또 묻는다. 타고난 붙임성을 경험으로 다져, 연기를 섞는다. 효과적으로 정보를 얻으려면, 그들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조용히 후시딘과 밴드를 내밀어 백화점 직원이 입을 열게 만든다. 화투판에 끼고, 마이크를 잡고 능청을 떤다. 그렇게 모은 것들을 바탕으로, 대상의 심리를 추측한다.


필요하면 살짝 거짓을 섞어 연기하지만, 그래야 할 때와 그래선 안 될 때를 구분한다. 최준목의 전 애인에게 ‘수양록’을 언급하며, 안준호를 향해 달라고 손을 내민다. 수양록의 존재를 처음 들은 안준호는, 대강 맞춰 준다(고 생각한다). 둘만 남았을 때 한호열은, 주머니에서 수양록을 꺼낸다, “아 나한테 있었구나!” 거짓말은, 찜질방 갈 돈이 없을 때는 해도 되는, 이럴 땐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름의 룰이다. 허치도의 할머니에게 거짓을 둘러대는 안준호를 보고, 한호열은 입술을 꽉 문다. 이후 정색한다. “뭐해? 그거 동정이야. 아픈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게 동정이고.”


“재밌잖아 시간도 잘 가고.” 박성우처럼 활동을 핑계로 밖에 나가 노는 게 아니다. 일 자체를 ‘즐긴다’. 별로 대단한 가치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꼴 보기 싫어 황장수에게 맞섰고, 재밌으니까 디피를 한다. 가끔 속은 없고 뒤끝은 있어 보이지만, ‘초코파이 훔쳐 먹은 놈에게 질 수 없어!’ 정도로- 솔직하고 귀여워 미워할 수 없다. 의뭉스러운 구석이 없다. 칼을 든 조석봉을 놓친 후 힘이 빠져 있는 그에게, 박범구는 말한다, “안 덤빈 거 잘했다.” 한호열은 “예.”라고 답한다. 떨리지만 시원스럽다. 건강한 자기애를 지닌 사람의 것이다.  



<D.P.>(Netflix). IMDB.

 

<D.P.>의 주인공을 하나 꼽자면 안준호지만, 한호열 없는 디피는 상상할 수 없다. 자신에게 박하고 올곧은, 꾹꾹 누른 상처가 눈에 드러나는, ‘젊은 애가 눈빛이 왜 그러냐’는 말을 듣는 안준호, 속을 다 내놓는 듯 하지만 가끔 알 수 없는, 젊은 애가 저렇게 넉살이 좋을까 싶은 한호열.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전혀 다른 그들은, 의외로 닮은 데가 있고, 잘 맞는다. 박범구가 그들을 디피로 뽑은 까닭과 어느 정도 통할 것이다. 남을 괴롭히는 걸 싫어한다. ‘눈치’가 좋다. 깡과 용기가 있다. 또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일에 진심이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그들의 이유-진심은 점점 가까워진다.


한호열은 안준호가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을 막고, 자신과 주변 사람의 마음을 살피도록 돕는다. ‘자기야’ 문자를 받고 억지로 집에 들렀던 안준호는, 에피소드 끝에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300만원을 ‘엄카’로 쏠 수 있는 여유 덕에 적당한 오지랖을 부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감’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부모는 나를 왜 낳았을까. 내가 태어난다고 한 적도 없는데.” 아빠한테 안 맞으려고 복싱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잠깐 침묵하던 한호열이 한 말이다. 그 ‘한탄’은, 안준호가 “그러게 말입니다.”라는 답을 할 수 있게 했다. 이상하게 적절한 ‘위로’다.

<D.P.>(Netflix). IMDB.


‘이입하지 말자’더니, 끝내는 허치도를 풀어준다. ‘잡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하던 ‘탈영병이 되어 보기’가, 어떤 ‘선’을 넘는 순간이다. 헤아리고 ‘이입’하게 된 것. 놓쳤다는 전화에 박범구가 별 말 않고 씩 웃는 것을 보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안준호가 왜냐고 묻자, “그냥 그러고 싶었어. 나 충동장애 있잖아.”란다. 표현법은 역시, 그답다. 후에 조석봉을 찾으러 갈 때도, 그런 식이다. “그래. 지구를 지키자. 멋있는 거 하자.”


한호열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멋있는 걸 하고’ 싶어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도망칠지언정 용역 깡패에게 창의적으로 유치한 방법으로 욕을 날리고, ‘한마디만 더 하면 아가리를 찢어버린다’는 황장수의 눈을 똑바로 보며 ‘한마디.’라고 해야 직성이 풀린다. 저보다 힘 있는 인간들에게 더 그렇다. 웬만하면 엮이지 않지만, 절대 져 주진 않는다. 황장수와 한호열이 마주치는 씬은 몇 없고, 과거도 알 수 없다. 허나 대충 상상해 볼 수 있다. 디피여서 만날 일이 잘 없기도 했겠지만-제 폭력이 ‘먹히지 않는’ 한호열을 향해 황장수는 이를 갈았을 것이다. 그런 황장수의 ‘실세놀이’를, 한호열은 무지 싫어했을 것이다.


황장수가 조석봉과 안준호를 괴롭히고 있을 때, 어슬렁거리며 등장한 그는, 괜히 욕을 하며 안준호를 창고로 끌고 간다. 잔뜩 억울해하는 후배를 조용히 시키고, 예의 ‘메소드’ 모션을 하더니, 열과 성을 다해 때리는 연기를 시작한다. 알리거나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적당히 머리를 굴려 모면하기. 나름의 해결법이다. 보고 있자니, 그토록 24시간 폭력에 노출된 환경에서 적당히 ‘좋은 사람’이려면, ‘약아야’ 하는 걸까-란 생각이 든다. 한숨 돌리고 나서 하는 말은, “일 좀 만들지 말자.” 이어 한탄한다. “아니다, 니가 뭐가 죄송하니. 백날 천날 탈영병 잡아와 봐라. 여기서도 저지랄인데.”


“내무반 애들이랑 엮이지 마. 우린 우리 할 것만 잘하면 돼.” 안준호와 처음 만나던 날 한호열은 말했었다. 정말 ‘엮이지말자’주의자였다면, 그냥 모르는 척 했을 것이다-안준호야 당하든 말든, 본인은 전역하면 끝이니까. 그는 제 생각보다 ‘엮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호열이 안준호의 ‘순간을 구한’ 것은, ‘아들이어서’ 이기도 하다. ‘내무반 애들’ 중 하나인 조석봉까지 챙길 새는 없었다. 그는 종종 그 자신, 혹은 다른 이들의 순간을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구하지 못한 자신의 순간들도 분명 꽤 되었을 것이며, 더 많은 시간 동안 외면했을 것이다.


<D.P.>(Netflix). IMDB.

흐물흐물한 척 단단했던 그는 조석봉 앞에서 흔들린다. 먼저, 쫓던 조석봉이 칼을 들었을 때. 탈영병을 체포하려다 칼을 맞은 적이 있는 그는 얼어버린다. 그리고, 조석봉이 총을 겨누고 있을 때. 이번 흔들림은, 무기의 위협 때문만은 아니다. 아마 그는 적당히 잘해 주는 선배였을 것이나(그랬으니까 “석봉아 형이야 형.”을 뱉을 수 있었을 게다.), 조석봉 입장에서는, 방관자다. 대부분 일로 자리를 비웠겠으나, 크게 다르지는 않다.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한호열 만큼의 용기와 재치를 지닌 이는 드물다. 나였다면 그 누구의 순간도 구하지 못했을 거다. 그런 생각도 든다, 거기서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죽을 뻔 하고도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황장수에게, “너 전역한 걸 다행으로 알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적당히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작품은, 한둘의 ‘좋은 개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한다. 한호열이 마지막 순간 조석봉 앞을 막아서며 했던 말에, 그에 대한 인지가 담겨 있다. “군대가 바뀔 수 있다면? 부대 다 조사하게 할게. 걔네들 다 벌받게 할게, 황장수 범죄사실, 우리들이 방관했던 거.” 단순히 조석봉을 진정시키려고 둘러댄 것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동그랗게 뜬 눈에는 공포와 날카로운 긴장도 있었지만, 분명한 진심도 섞여 있었다. 한호열은 그동안, 안준호와 함께 활동하며 특히 더, ‘정말 내 할 일만 잘 하면 되는 걸까’라고 스스로 물었을 것이다.


그것이 작품 속 한호열의 마지막. 이후는 알 수 없다. 임무를 다했으니 조용히 퇴장할지, 최선을 다해 ‘엮이기’를 이어가기로 마음먹을지. 작품은 답을 내리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카메라를 멈추고 시청자가 현실로 눈을 돌리게 한다.  

<D.P.>(Netflix). IMDB.



작품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려니 좀 겁이 나기도 하고 막막해서, 사랑하는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풀어보았다. 구교환이 아니었다면 아마 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 덕에 견뎠으나, 자체로 의미 있는 이야기였다. 원작자가 각본에 참여하고 감독이 제작에 참여하였기에 이 정도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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