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듀얼>(2021)
<라스트 듀얼(The Last Duel)>(2021, 감독: 리들리 스콧)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대한 만큼이었다고 해야겠다. 명료한 작품이다. 넣어야 할 것을 다 넣느라 길어졌고, 실화에 대한 분명한 시선을 위해 일부 ‘영화적 재미’를 줄였다. 거의 천 년이 흐른 지금, 그날의 진실을 새삼 명백히 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스토리텔러들은 배경과 역사 서술을 바탕으로, 관점을 골라 살을 붙인다. 작품은 장, 자크, 마르그리트 각자의 이야기를 차례로 그리며, 판단을 미루지 않고 하나의 진실을 택했다. 그 주인은 마르그리트,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 속에서 애초에 배틀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던, 여성이다.
장과 자크는 본인들의 기억 속에서, 서로를 깎아내리고 스스로를 미화한다. 그 모양에서 화자의 성정이 슬쩍 드러난다는 점이 우습다. 장은 전투에서 제가 자크를 살렸다는 데에 집착한다. 황제를 위해 용맹하게 싸웠고 정당한 대가를 요구했으나, ‘제 덕에 목숨을 구한’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인배의 자기합리화다. 자크는 장이 폭력적이고 아둔하며 감정만 앞섰다고 기억한다. 자신은 뛰어난 지식과 재치로 피에르의 눈에 들었고, 맡은 일을 잘 해냈기 때문에 총애를 받았다. 항상 이성적으로 행동하며 피에르와 장을 중재하려고 애썼다. 기회주의자 나르시시스트의 자아도취다.
그들은 자칭 로맨티스트다. 제 행동 뿐 아니라 상대의 반응도 꾸며낸다. 제 기억 속에서 장은 항상 아내를 걱정하고 지지했다.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며 따스하고 부드럽게 대했다. 잠자리든, 임신이든,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압박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썼다. 아내는 그런 자신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응원했다. 강간을 당했다고 고백하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가 단죄를 원했기 때문에, 싸우기로 했다. 제 기억 속의 자크는 피에르와 ‘어울려주기 위해’ 매일 밤 여자를 안았다. 그건 흠이 아니라, 흘러넘치는 재치와 매력의 대가였다. 마르그리트를 만나고 진짜 사랑을 느꼈다. 감정은 쌍방이었고, 그들은 마주칠 때마다 애틋한 시선을 교환했다. 마침내 그녀를 찾아가 고백하고 ‘사랑을 나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었다”. 당시 여성은 그런 존재였다. 남성의 입맛에 맞게, 원하는 대로 끼워 맞춰도 되는.
그렇게 대상화되었던 마르그리트는, 삭제되었던 제 목소리로 말하며 비로소 다채롭고 깊은 표정을 내보인다. 아버지는 ‘명예로운’ 이름을 대가로 땅과 돈에 자신을 얹어 팔았다. 그녀는 석상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결혼 전에는 티부빌의 것이었고, 이제 드 카루주의 것이 되었다. 남편에게 자신은 후대를 생산하기 위한 혈통 좋은 암말이었다. 성관계는 기쁘지 않았다. 남편은 즐거웠기를 바란다고 했다, 행복한지 묻는 것이 아니었다, 빨리 임신을 하라는 압박이었다. 그가 형편없이 일하다 생색을 내며 전장에 나가면, 그녀는 사람과 땅을 관리하며 즐거움을 느꼈다. 자크 따위에게 관심을 줄 새는 없었다. 예의상 친절히 대했을 뿐이었다. 남편은 사건 전에도, 이후에도, 그녀를 지지하거나 위한 적이 없었다. 오로지 제 명예만 생각했고, 그마저도 잘 지킬 줄 몰랐다. 진실을 말했더니, 제 복수에 아내의 목숨을 걸었다.
자크의 시선이 ‘그 사건’을 어떻게 왜곡하려나 긴장하고 있었는데, 웬걸, 그가 묘사하는 것 또한 분명히 강간이었다. 카메라는 부러 마르그리트를 무감각하게 담는다. 자크가 그녀의 비명을 듣지 않았고, 눈물로 일그러진 뺨을 보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여러 번의 ‘No’를 들었고, 깔린 몸이 저항하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밀어붙였다. 사랑이든 욕망이든, ‘동기’는 중요치 않다. 이게 강간이 아니면 무엇이냐는 말이다. 고통의 흐느낌을 쾌락의 신음으로 착각했다 해도, 폭력임은 마찬가지다. 마르그리트는 자크를 좋아하지 않았고, “어떻게 강간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느냐”고 말했다. 정말이었고, 당시엔 그게 중요했다. 그러나 ‘호감이 있었는가’, ‘관계에서 쾌락을 느꼈는가’는 애초에 해선 안 되는 질문이며, ‘강간이었는가’를 가리는 요소가 될 수도 없다.
자크는 마르그리트의 ‘No’를, ‘여자의 의례적인 반항’으로 넘겼다. 애초에 상대의 의사는, 그렇게 멋대로 정해버리면 되는 거였다. “내 사랑”의 안전을 위한 경고로 착각하며 강간범의 협박을 늘어놓은 그는, 방을 나가기 전 위로처럼 덧붙인다. “We couldn’t help ourselves.우리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녀는 어찌 할 수 없었으나 그는, 어찌 할 수 있었다. 안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했다. ‘그래도 되는’ 지위에 있었으므로. 죄를 인정하더라도 최악의 상황은 명예를 잃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죽어 거꾸로 매달리게 된 건, 그저 운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자크 르 그리는 사실 다 ‘알았’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정말로, 제가 한 게 강간이 아니라고 믿었을 것이다.
자크와 장이 나쁜놈과 멍청이가 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발밑을 중세 유럽의 극단적 가부장제가 받치고 있어서였다. 여성에겐 법적 지위가 없었다. 지주가 토지를 소유하듯 남편은 아내를 소유했다. 소작농이 소작료를 내듯 아내는 남편에게 성관계와 자손을 ‘지불해야’ 했다. 마르그리트를 강간한 자크의 죄목은, 장에 대한 재산권 침해였다.
자신도 강간당했지만 침묵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니콜은 말한다, “넌 뭐가 그렇게 특별해서.” 특별하지 않았다, 그 특별하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이 동일한 폭력을 겪었는데, 벌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말할 수가 없었다, 진실과 목숨 중에 선택해야만 했기에. 마르그리트조차 귀족 여인이 아니었다면, 장이 자크에게 ‘복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면, 무시당하고 묻혔을 거다. 그 나름의 ‘프리빌리지’를 지니고 진실을 말한 대가는, 모욕적인 심문과 생명의 위협이었다. 그녀 또한, ‘내 아이가 엄마 없이 자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 침묵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살아남은 건 남편 덕도, 신이 도와서도 아니다. 결국 사람들이 외치는 이름은 ‘장 드 카루주’. 이 모든 과정은 괴상하고 끔찍하다. 군중 한가운데에 서서 족쇄를 차고 ‘긴장감 넘치는 최후의 결투’를 강제로 내려다보며, 남편이 이기기를 바라야만 했던 마르그리트에게, 그건 죄다 뭐였을까.
자크 르 그리도, 장 드 카루주도, 모든 것을 재미있어하거나 지루해하며 낄낄거리던 황제도, 아내를 두고 수많은 여자를 침대에 들이던 피에르도, 억측으로 조롱하며 몰아붙이던 심문관도, 모두 한패다. 그 옆에 앉은 아내들은,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진실을 덮거나 방관하는 남편들을, 미묘한 표정으로 곁눈질한다. 장은 몇 년 후 죽었으며 마르그리트는 재혼 없이 삼십 년을 더 살았다는 역사 서술을 보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일이지만, 남편을 매우 사랑해서 홀로 남았을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 장면, 풀밭에서 노는 아들을 바라보는 마르그리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아이의 아버지가 자크인지 장인지, 알 수 없다. 자크의 강간이 있고 며칠 후 장에게 털어놓았더니, 이번에는 그가 자신을 강간했다. 그 조그만 아이가 무사히 자란다면, 아마도 가부장제를 충실히 이어 갈 ‘남자’가 될 것임을 그녀는 알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언제든 황제를 위해 싸울 준비’를 해놓기 위해 소작농들의 혈관을 쥐어짜 세금을 걷던시절- 중세 유럽 여인에게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장과 자크의 기억에서 개인적 이해관계와 시대적 디테일을 걷어내면, 특정 부분이 현재 누구들의 사고 회로와 닮아 있음이 보인다. ‘No means NO’. 이제 그만하면 알아들을 때도 되지 않았나. 동시에 마르그리트의 기억에는, 현재와 동일시 할 수 없는 당시 여성들만의 역사가 있다. 수많은 이들의 존재와 경험은, ‘그땐 그런 시대였어’ 라며 그냥 넘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작품은, 게으르고 아름답게 얼버무려지곤 하는 ‘그 시절 이야기’들이, 자크와 장 같은 이들의 기억에 불과하다는 고발이며, 수 세기 동안 참고 견디고 말하였으나 무시 당하고 협박 당하고 죽임을 당한 모든 여성들에게, 그리고 마르그리트에게- 바치는 헌사다.
(+또한, ‘이 영화를 만든 우리는, 그런 게으른 남자들이 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