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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Nov 16. 2021

“네가 무엇이든”

<티탄>(2021)




<티탄(Titane)>(2021, 감독: 줄리아 뒤크루노)

 Feat. <로우>(2017)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우>(2017), 커다란 눈과 동그란 , 앳되고 야무진 얼굴의 가랑스 마릴리에는 눈을 뒤집은 채 사람을 뜯어 먹었다. <티탄>(2021), 날카로운 눈과 각진 , 단단하고 강한 인상의 아가타 루셀은 입을  다문  웅크린 몸과 흔들리는 눈으로 연약함vulnerability 뿜어낸다.


개인적으로 ‘재미’는 <로우>가 더 있었다. 약자의 위치에서 폭력을 겪던 쥐스틴이, 자신을 ‘잡아 먹으려는’ 이들을 물어 뜯는 프레데터predator가 됨을 지켜보는 데에서 오는 전복적 쾌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알렉시아는 사람을 죽이는 프레데터에서 보호와 감시를 받는 ‘약자’가 된다. 원피스를 입고 의자로 남성의 입을 찍어 누르던 그가, ‘소년의’ 옷을 입고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장면을 보면, 불안해진다. 작품이 의도한 바다. 그러나 한편으로, 쥐스틴의 전복에는 윤리적 감정적 혼란이 뒤따른다. 정체를 감춘 채로 타인의 삶을 살며 불안과 압박에 떠는 알렉시아는, 뱅상의 집에서 그가 정한 생활을 하며 안전과 안정 또한 느낀다.



<티탄>(2021). IMDB.


오프닝, 마치 인간의 몸을 대하듯, 카메라는 차체의 부분들을 천천히 훑는다. 작품의 시선이 ‘차와 섹스하고 인간을 죽이는 자’인 알렉시아의 것이라는 뜻이다. 관객이 특정 행동과 욕구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괴물’로 규정해버리기 전, 그의 입장, 변화하는 감정과 상태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도록 돕는다.

사고를 당해 머리에 티타늄을 박은 후, 차와 교감하게 된 알렉시아. 페티시가 아닌 대상 자체를 향한 욕구다. 몸의 매력을 드러내는 도구로 차를 이용하는 다른 댄서들의 것과 달리, 그의 춤은 차와 ‘함께’ 하는 것이기에 특별하다. ‘비정상적 욕망’-‘증상’에 대한 분석은 딱히 없고, 필요치 않다. 쥐스틴(<로우>)과 달리 알렉시아의 경우, ‘증상’은 익숙하고 당연하다. 혼란의 원인은 그로 인한 결과, 신체의 변화다. 그의 눈에 자리 잡은 공포는, 임신에 차가 관계했다는 사실보다, 몸 속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쥐스틴(<로우>)의 ‘증상’은 타인을 해하게 만들었다. 알렉시아는 ‘증상’과 상관없이 제 의지로 인간을 해한다. 살인을 두려워하거나 그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지만, 행위를 즐기는 것 같지도 않다. 비녀가 보이지 않으면 극도로 불안해 하는 그의 살인은, 공포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수 있겠다. 쫓아와 팬이라며 들이대는 남자를 대하는 몸은 두려움으로 굳는다. 남자가 강제로 키스하기 시작하자, 마치 ‘마음을 바꾼 듯’ 풀린다. 받아 주는 척 하다, 조용하고 정확하게 찌른다. 이후 몸에 묻은 남자의 분비물에 질겁한다. 화면에 처음 등장하는 살인이다. 쥐스틴(<티탄>)을 찌른 것은, 임신 사실에 겁에 질려 셀프 임신중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나서다.


<로우>가 쥐스틴이 몸을 긁고 살을 뜯는 장면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던 것처럼, <티탄>의 카메라는 찔린 남자가 거품을 흘리는, 알렉시아가 쥐스틴(<티탄>)의 니플 피어싱을 집요하게 물어뜯는/비녀를 밀어 넣어 임신중지를 시도하는/부러 세면대에 코를 박는/부풀어 오른 몸을 싸매거나 긁어대는-모습과 소리를, 스스로 주사를 놓는 뱅상의 멍든 엉덩이/붉게 달아오른 상반신을, 일부러 담는다. 주로 인물이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 화면은 관객의 말초적인 혐오와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알렉시아가 목격자들을 연이어 죽이는-공포 보다는 필요에 의한 살인을 하는- 장면에는, 음악과 롱테이크를 활용한 오락적 연출이 쓰였다.

<티탄>(2021). IMDB.

 

아버지에게 들키자, 알렉시아는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다. 지하철에 붙은 본인의 지명수배와 실종 아동 광고를 본 후, 일단의 거처를 위해 ‘아드리앵’이 되기로 한다. 남에게 드러내는 젠더를 트랜스 하고, 실종되었다 돌아왔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대놓고 사방을 경계한다. 입을 다문 그의 심리는, 눈빛이나 어깨의 모양, 그것들이 향하는 방향, 고갯짓과 손짓, 미소로 드러난다.

 

버스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들의 성희롱을 견디며, 알렉시아는 그 대상인 여성과 눈을 마주친다. 눈은 확장되어 온통 요동친다. 그는 그 말들 앞에서 여성과 유사한 입장이나, 상대의 눈에 비친 것은 남성이다. 여성이 보내는 눈빛에는 동질감보단 도움 요청, 혹은 무기력하게 겁먹은 상태가 담겨 있었고, 그게 알렉시아를 더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홀로 있을 때는 알렉시아가, 남들 앞에서는 ‘아드리앵’이 되는-실제 자신과 보여지는 모습의 괴리에서 오는 두려움. 더불어 전처럼, 위협을 가하는 남자들을 죽임으로써 그 모든 공포를 ‘해결’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흔들리다, 뱅상에게서 도망치려고 탔던 버스에서 내려버리고 만 것이 아닐까.


<티탄>(2021). IMDB.


긴급구조 팀을 이끄는 뱅상은, 강한 남성성으로 부하들을 통제한다. 대원들에게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장면은 오바스러워 우습다. 그는 힘 있는 가부장이 아니다. 남성성을 잃어가며 그것을 두려워하고 부정하는, 과거의 상실에 매몰된, 알렉시아와는 다른 방향의 ‘비정상적’ 욕망, ‘결핍’을 지닌 자다. 알렉시아가 임신이라는 낯설고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로 공포를 느낀다면, 그는 노화라는 예정된 변화로 좌절한다. 나이 들어 약해지는 몸에 약과 주사를 밀어 넣는다. 되돌아온 ‘아들’은 그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달래 줄, 보호하며 위안 삼을 존재였을 것이다. 아드리앵의 어머니는 임신한 몸을 드러낸 알렉시아의 손을 꽉 잡고, 니 꿍꿍이가 뭐건 저 남자를 돌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연쇄살인을 저지르던 알렉시아는, ‘아드리앵’인 채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돕는다. 뱅상이 부르는 마카레나에 맞춰 그가 응급처치를 해내는 씬은, 다크코미디스러우면서도 벅차다. 뱅상은 ‘이래야 수염이 난다’며 ‘아드리앵’의 코밑을 면도한다. 우스운 연극, 해프닝으로 보이기도 하나, ‘날 믿느냐’는 물음과 끄덕이는 고개, 조심스러운 손놀림과 상대의 얼굴을 살피는 시선은 진심이다. 타인을 지킴으로써 제 의미를 찾는 인간인 뱅상이, 주사를 부탁하며 가장 약한 곳을 맡기는 장면은, 완전한 신뢰의 표현이자, 이제는 지키면서, ‘돌보아지고’도 싶다는 뜻이다. 그들은 서로를 돌보며 거짓 속에 진심을 쌓는다. 결국 알렉시아는 긁어내려 했던 뱃속의 아이에게 ‘미안해’라고 속삭일 수 있게 된다.​


<티탄>(2021). IMDB.


뱅상이 ‘아들’에게 보내는 키스들은 묘하게 에로틱하다. 애초부터 그가 ‘아드리앵’이 아님을 느낌으로나마 짐작하고 있었으리라는 암시다. 결국 ‘유방’을 목격-영화사에서 가장 전통적인 방법-하고, ‘공식적으로’ ‘아드리앵’이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된다(사실 유방은 유방일 뿐 무엇도 정의하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묘사되는 여성의 신체 부위이고 그렇기 때문에 알렉시아가 숨겨 온 것이므로.). 뱅상은 흘러내린 수건을 올려 주며 말한다, “네가 무엇이든 상관 없어, 너는 내 아들이고, 내가 지켜줄거야.” 알렉시아는 ‘들켰으나 받아들여진’ 것으로 끝내지 않고, 춤을 통해 일종의 ‘커밍아웃’을 한다. 방금 전까지 남성들 사이에 끼어 열심히 슬램하던 그는, 차 위에서 자신의 춤을 춘다. ‘아버지’가 도착한 후에도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몸을 움직인다. ‘네가 뭐든’ 지켜주겠다던 이에게 내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나’, 여성이자 남성이자 둘 다 아닌, 차와 교감하는, 이제 당신과 교감하고 싶은 ‘나’를.


그가 ‘her-알렉시아’일 때와 ‘him-아드리앵’일 때 추는, 닮은 춤에 대한 남성들의 반응은 아주 다르다. 알렉시아의 춤을 본 남자들은, 그를 만지고 싶어하고, 끝나면 다가가 사인을 요구하고, 팬이라고 말하고, 심지어는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아드리앵’의 춤을 본 남자들은,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도 있으나-대놓고 인상을 쓰거나 고개를 돌리는 게 대부분이다. 머리 길이나 옷차림이 달라졌을 뿐 같은 사람이고, 이 존재는 스스로 그것을 알기에 거침없이 몸을 놀린다. 춤으로 ‘him-아드리앵’은 ‘her-알렉시아’와 연결되고, 경계는 사라진다.


춤은 섹스로 이어진다. 알렉시아의 모습으로 춤을 춘 후의 섹스는, 방금 죽인 남자의 분비물을 씻어낸 다음 시작되고, 그를 임신하게 만든다. ‘아드리앵’의 모습으로 춤을 춘 후의 섹스는, 뱅상이 말없이 자리를 뜬 후 만삭의 몸으로 하게 된다. 전자에서 알렉시아의 얼굴에 오로지 관계로 인한 쾌감이 떠올랐다면, 후자에서 괴로움 섞인 신음을 내지르다 결국 우는 얼굴엔 복합적인 슬픔/좌절이 묻어난다. 일종의 ‘실연’으로 인한 상처부터, 처한 상황과 과거에 대한 절망, 회한, 그리고 사랑에 빠진 인간의 고통이 있다.  


<티탄>(2021). IMDB.


여러 모로 다른 작품이나-<누에치던 방>(2016)이 떠오른다. 거짓으로부터 시작된 낯선 이들의 만남이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서사다. 자신을 의심하고 멀리하는 아버지와 살며, ‘아버지’의 ‘부재’를 겪은 알렉시아와, 아들을 잃은 뱅상. 아들이 아닌 자와, 그의 아버지가 아닌 자의 ‘비정상적’ 관계, 근친상간적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던 유대는, 결국 관객을 감정적으로 설득하고 만다. 홀로 누운 뱅상은 멍하니 몸에 불을 지르고, 불길이 잦아든 후 찾아온 알렉시아는 사랑을 고백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 아이를 받으며, 뱅상이 알렉시아를 ‘알렉시아’로 부르는 모먼트는, 위대하다. 정신을(목숨을) 잃은 알렉시아에게 밀어냈던 입맞춤을 돌려 준 후, 그는 티타늄 척추를 지닌 존재를 감싸안는다. ‘네가 무엇이든’ 사랑하리라는 제스처다.


엔딩, 갓난아이를 끌어안고 누운 뱅상의 지친 얼굴은 따스하나 위태롭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마음을 안정적으로 울리기보단 초조하게 흔든다, 그러나- 불안하고 이상한 자체로 아름답다. 그 순간 관객은 예상치 못한 눈물을 맞이하며, 너무도 당연하나 늘 생략되었던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랑/존재에 있어, 정상/비정상이란 무엇인가?’.





+

쥐스틴을 로우의 쥐스틴인 가랑스 마릴리에가 연기했는데, 동명이인이거나 다른 유니버스의 쥐스틴일 것이다. 바로 그 쥐스틴이었다면 알렉시아는 찔러 보기도 전에 먹혔을 거다.


<티탄>(2021). IMDB.


++

아가타 루셀 페이스 느낌이나 표현법에 바르토시 비엘레니아가 겹친다. 나중에 같은 작품에 나와서 각자의 언어로 연기하는데 말이 통하는(?희한하게 구체적이네) 장면을 보고 싶다.  

<티탄>(2021). IMDB.


+++

알렉시아의 아버지를 연기한 베르트랑 보넬로는 <생 로랑>(2014) 감독이다. 비슷한 시기 나온 두 생로랑 중 보다 내 스타일이었던, 가스파르 울리엘을 처음 본 바로 그 생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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