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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Dec 14. 2018

가스파르 울리엘, 깊고 어둡게 빛나는

가스파르 울리엘(Gaspard Ulliel)




<원 네이션(Un peuple et son roi)>(2018, 감독: 피에르 쉘러)
<단지 세상의 끝(Juste la fin du monde)>(2016, 감독: 자비에 돌란)
<생 로랑(Saint Laurent)>(2014, 감독: 베르트랑 보넬로)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스파르 울리엘의 얼굴을 꽃이라 가정하고 꽃말을 정한다면, 그늘진 순수,라고 하겠다. 깊고 어둡게 빛나는 눈, 그 밑은 그늘져 있고, 볼에는 주름과 보조개의 중간쯤 되는 긴 선이 있다. 신비롭고도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인상이다. 허나 분위기가 외모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말 그대로 분위기, 그 사람만의 고유한 것이다. 말로 풀어내기 힘든 부분도 있다. 우연일까. 가스파르 울리엘이 출연한 작품들을 훑어보는데, 주연작 몇의 포스터 구도가 비슷하다. 상대 배우가 앞서 있고 그는 뒤에서 바라본다. 그 바라보는 시선에는. 뭔가가 있다. 그의 깊이 빛나는 눈은, 사람들 사이에 잘 섞이지 못하는 이방인이나, 무리에서 벗어나 지켜보는 관찰자를 표현하기에 적격이다.

 

<단지 세상의 끝>(2016)



<원 네이션>(2018)에서 가스파르 울리엘의 이름은 엔딩크레딧에 맨 먼저 등장하지만, 어쩐지 그가 맡은 바질이 주인공이라고 선뜻 말하기는 꺼려진다. 바질은 관찰자와 주인공의 경계에 있다. 바스티유 감옥을 무너뜨리고 루이 16세의 목을 베기까지 혁명의 주인공인 파리 시민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이 작품에서, 열띤 사람들을 한 발짝 물러서 관찰하는 바질. 그의 눈은 관객과 파리 시민들을 이어 준다.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그의 이름이 처음에 등장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닉 캐러웨이나,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 홈즈의 수사를 좇는 왓슨 박사처럼, 자신의 서사가 있지만 다른 진짜 주인공을 그리기 위한 매개로 쓰인 인물과는 조금 다르다. 바질은 일관되게 혁명을 관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처음엔 동떨어져 있다가 점점 혁명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끝까지 함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파리 시민과 귀족들, 역사 속의 평면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홀로 입체적으로 변화하며 서사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알겠다. 바질이 주인공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굳이 주인공을 한 명 꼽자면 바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설명이 많고 때로는 감정이 과잉되기도 하는 이 작품이 다소 지루했던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아무것도 몰랐던 바질이 파리에 가서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프랑수아즈와 사랑에 빠지며 변하는 모습만큼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 네이션>(2018)


초반의 바질은 아예 다른 캐릭터들과 동떨어져 있다. 한적한 시골, 들판을 맨발로 뛰어다니고 손에 앉은 나비를 관찰하는 바질의 온도는, 혁명의 열기에 달아오른 파리 시민들과 달리 나른하고 시원하다. 바질의 느긋함이 화면을 꽉 채우면 마치 다른 영화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며,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가스파르 울리엘의 눈은 항상 그렁그렁하다. ‘초롱초롱’이 아니라 ‘그렁그렁’이 적합한 표현 같다. 깊고 어두운(데) 순수함이 느껴진다. 갑자기 눈물이 툭 떨어져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시계를 훔치고 잘못했다고 말하며 뚫어져라 볼 때나, 잡혀가는 왕의 행렬을 따르다 얼떨결에 왕에게 머리를 숙일 때, 파리 시민들에게 식사를 대접받으며 질문공세에 답하지 못하고 눈치를 볼 때, 그의 그렁그렁한 눈은 설명할 수 없는 몰입감을 준다. 분명 눈치를 보고 있는데, 시선이 고정되는 순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파리에 도착한 바질이 밥을 먹으며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는 장면에서 그게 확 느껴졌다. 도망친 왕을 붙잡아 파리로 데려가는 행렬에 묻어온 바질에게, 파리 시민들은 질문공세를 퍼붓는다. 영웅 대접을 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바질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열심히 먹는다. 그러다 낌새를 챈 사람들이 신상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가자 그는, “나는 부모님도 집도 없이 살았어요.” 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다. 사실, 이 작품에서 눈물이 살짝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몇 있었고, 이 부분도 살짝 그러했다. 물론 바질이 왜 눈물을 떨어뜨렸는지는 알겠지만, 편집이 매끄럽지 않아 붕 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장면을 살린 건 오직 가스파르 울리엘의 눈이었다. 눈물이 떨어지는 그렁그렁한 눈이 설득력을 부여했다. 그는 훌쩍거리거나 눈물을 훔치지 않고 커다래진 눈을 굴리며 더듬더듬 말한다. “결핍된” 과거를 말하는 게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별 이유 없는 친절을 베푸는 게 어색해서, 마음이 동해서, 혹은 살짝 놀라서 나오는 반응 같아 보였다.

 

<원 네이션>(2018)


후반의 바질은 느긋한 자신만의 온도를 간직한 채, 나름의 방식으로 혁명에 동참한다. 공화국을 만들자는 논의를 하려고 파리 시민들이 모인 자리, 왕을 없애도 되는지에 대한 말다툼이 벌어진다. 그때 바질이 벌떡 일어나 “나, 나 여기 있어요! 나는 서명할 겁니다!”라고 북받쳐 외친다. 말이라기보다 속에서 나오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던 그 짧은소리는, 어느 달변가의 말보다 충분했다. 프랑수아즈가 바질의 어깨를 내려 낙인을 보여주고 두 사람이 함께 서명할 때, 이상하게도 덩달아 북받쳤던 건, 단지 캐릭터 설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개인들이 모여 혁명을 이룬다. 바질은 한 평범한 개인에게 혁명은 무엇인지 보여주는 캐릭터였고, 가스파르 울리엘의 개인적이고 섬세한 연기는, 작품에서 그 역할을 잘 살려냈다.

 


<단지 세상의 끝>(2016)


혼자 동떨어진 듯 개인적이고, 우수수 떨어질 듯 섬세한 가스파르 울리엘의 연기. 이 말을 적으니 <단지 세상의 끝>(2016)의 루이가 떠오른다. 그는 바질과는 설정과 성격이 아주 다르지만, 통하는 면이 있다. 루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다른 아우라를 풍긴다. 루이와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는 기본적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의 어둡고 복잡한 정서를 가지고, 과잉된 제스처 없이 차분하게 표현한다. 듣고, 지켜보고, 바라보고, 생각에 잠긴다. 그 연기로 가스파르 울리엘은 세자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타낸다.

루이는 주인공이지만 대사가 많지는 않다. 할 말이 있지만, 가족들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다. 오랜만에 만난 루이에게 가족들은 말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지 않을 때는 말하기를 강요한다. 루이는 자신을 맞이하는, 그러다 싸우고 난리 치는 가족들을 바라본다. 따뜻한 대화는 없다. 가식과 진심 사이 어딘가의, 어색하거나 날 선 일방적인 문장들뿐이다. 루이는 쉬잔의 넋두리를, 앙투안의 화를 바라본다. <원 네이션>에서와 같이, 관찰자와 주인공의 경계에 서서.

루이에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답을 할 여유가 없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하기 바쁘다. 쉬잔의 방에서, ‘서 있을 거냐’는 그녀의 물음에, ‘여기가 편해’라고 하는 대답, 그때 짓는 애매하게 웃는 표정. 그게 가족들이 사는 집에서 루이의 위치이며, 영화 속 루이의 상태다. 서로의 말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힘겹게 뱉는 마디마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말일수록 루이는 힘들다. 그 친숙한 어색함을, 가스파르 울리엘은 입꼬리와 눈으로 표현한다.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으며. 가족들의 눈치를 보는 동시에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억지웃음을 짓는 것은 아니나 완전히 웃고 있지도 않은. 다음 순간 바로 내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입꼬리가 표정을 완성한다.

오히려 루이가 가장 진심으로 대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건, 그날 처음 만난 카트린인 것 같아 보인다. 카트린은 이 집안에서 자신처럼 눈치를 보고 있는, 섞이지 못하는, 날 세울 수 없는 존재다. 또한 자신을 처음 만났기에 숨기는 감정도 없는 사람이다. 카트린이 아이 이야기를 할 때 루이는 그늘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이야기를 듣는다. 입은 활짝 웃기보다는 미소를 살짝 머금고 있는 정도다. 이후 앙투안이 핀잔을 줄 때, 그는 진심으로 앙투안을 나무라며 카트린을 걱정하는 눈빛을 보낸다.

그러나 루이의 이질감은 마리옹 꼬띠아르가 맡은 카트린과는 조금 다르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며 눈치를 보는 토끼 같다면, 그는 살피는 동시에 어두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늑대 같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두 배우가 마주 볼 때 마리옹 꼬띠아르의 얼굴을 보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지만 눈은 슬프다. 한 얼굴에 두 감정을 풍부하게 담아낸다. 애써 말하지만 계속 무시당하거나 방해받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말을 이어나가는 카트린을, 루이는 바라본다. 그는 열심히 듣고 있는 표정이지만, 눈에는 다른 것이 담겨 있다. 시선이 멍해지기도 한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얼굴에 감정을 담을 때 드러내기보다는 숨긴다. 상대방을 바라보지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할까. 한 꺼풀 감춘 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그런 루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채 천천히 화면이 움직이고 음악이 흐르는 장면이 꽤나 많다. 엄마에게 무언가 말하려다 삼키는 장면 같이.


<단지 세상의 끝>(2016)


루이는 대사 자체가 별로 없지만, 말을 할 때는 높고 풍부한 가족들의 톤과 달리 나직하고 차분한 톤을 쓴다. 죽음에 가까운 것 같기도 해서 듣는 사람도 묵직하게 가라앉도록 만든다. 특히 차 안에서 앙투안과 대립할 때는, 날카롭고 확실한 뱅상 카셀의 말투와 대조되어 그 장면의 감정을 이끌어낸다. 아침에 공항에서 커피를 마신,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하며 잠깐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이후 형이 열등감에 가득 차 자신을 깔아 누르려고 하는 말을 들으며 두 배로 숨이 막히게 된다.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변화를 가스파르 울리엘은 약간의 목소리 톤 변화와 고갯짓, 입과 눈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담아낸다. 앙투안이 루이에게 퍼붓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는,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는 뱅상 카셀의 연기가 눈에 들어왔었다. 다시 그 장면을 돌이켜 보니, 가스파르 울리엘의 섬세한 움직임이 있었기에 뱅상 카셀이 빛날 수 있었겠다, 는 생각이 든다.   

개성이나 분위기가 강한 배우들을 관찰하다 보면, 스스로의 느낌이 강해 어울리는 상대 배우가 한정되어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상대 배우와도 무리 없이 매치되어 서로를 돋보이게 하는 배우가 있다. 어느 편이 낫다고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말이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후자다. 그의 분위기는 독특하고 치명적이지만, 주위를 먹어치우는 대신 화면 전체를 살려낸다.  


<단지 세상의 끝>(2016)


<단지 세상의 끝>은 스타 감독인 자비에 돌란이 프랑스의 스타 배우들을 캐스팅해 만든 작품이다. 작품을 이끄는 루이를 가스파르 울리엘에게 맡긴 것은, 그가 각기 다른 개성과 스타일을 가진 만만치 않은 배우들 모두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칫하면 부담스러운 ‘연기 대결’의 느낌이 날 수도 있었을 장면들을,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를 살리고 상대 배우가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부드럽게 이끌어준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매력은 잃지 않는다.



 <생 로랑>(2014)


그가 쉬잔을 맡은 레아 세이두와 함께 있을 때는 좀 더 특별한 에너지가 나온다. 레아 세이두가 가스파르 울리엘의 여린 에너지를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을 받았다. 두 배우는 <생 로랑>(2014)에서도 함께 출연해, 그 아름다운 호흡을 보여준다.

가스파르 울리엘의 생 로랑은 레아 세이두의 룰루 외에도 루이 가렐의 느끼하고 강하고 여유로운 자크 드 바셰, 제레미 레니에의 이성적이고 역시 여유로운 피에르와 대조되는 동시에 어울리며 조화로운 장면을 이끌어낸다. 루이 가렐과 가스파르 울리엘이 클럽에서 처음 만나 서로를 뚫어져라 보며 빠져드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진다. 중간중간 색색의 조명 아래서 화려한 무늬의 두건을 쓴 룰루가 춤을 추는 모습이 섞여 장면의 매력을 더한다.


<생 로랑>(2014)



생 로랑은(여기서의 ‘생 로랑’은 현실의 이브 생 로랑이 아닌, 작품 속 인물 생 로랑을 지칭한다.) 천재이지만 패션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 연약하고 제멋대로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직원에게 선심 쓰듯 돈을 건넨 후 뒤에서 조용히 해고하는 장면을 보면, 별로 따뜻한 사람도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밉지만 지켜주고 싶다. “전구를 가는 법을 왜 알아야 하죠?”라고 물을 때는 어 그래 너는 알 필요 없어 내가 다 갈아줄게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가 주인공 이어서만은 아니다.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그 속에 녹아든 가스파르 울리엘의 치명적인 생 로랑, 아니 이브. 그의 외모는 색과 음악, 패션과 함께 완벽하게 화면 속에 어우러진다.

영화 속 캐릭터의 ‘외모’는, 단순히 이목구비나 체형, 스타일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자신의 신체를 사용하는 방식이, 걸친 옷이나 메이크업 등의 분장과 화학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내는 분위기 전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생 로랑>(2014)


 
<생 로랑>에서 그는 마치 성대를 완전히 사용하지 않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낮고 작지만, 차분하기보다는 날카로움이 묻어난다. 전화통화를 하거나 독백을 할 때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다. 자막을 봐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목소리로 말하는데 신기하게도 대사는 전달이 잘 된다. 씩 웃을 때 선명히 드러나는 깊고 긴 보조개와 턱은 예민함을 더한다.

대화할 때는 목을 한쪽으로 꺾거나, 빠르고 작은 고갯짓과 손짓을 자주 사용하는데, 표정이나 몸을 많이 쓰지 않는데도 항상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인다. 디자인을 하거나 옷과 모델을 살필 때는 뚫어져라 바라본다. 안경은 눈을 가리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돋보이게 만든다. 잡다한 감정들은 안경알에 걸러지고 예리함만 뿜어져 나온다. 눈에는 앞에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다. 반면 혼자 있을 때는 항상 생각에 잠긴 듯 멍하거나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으면 홀로 다른 차원에 던져진 사람 같아 보인다. 생 로랑의 주인공은 당연히 생 로랑, 관찰자라고 하기는 힘든 역할인데도, 가스파르 울리엘은 때로 화면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느낌을 준다.

이브 생 로랑이 한동안 작업을 하지 못하던 시기, 자신이 만든 옷을 입은 모델에게 중얼거리는 장면에는 이 작품 속 생 로랑이 모두 담겨 있다. 미적 감수성이 탁월한 천재이지만 그 예민한 천재성 때문에 스스로를 갉아먹는, 순수한 웃음기를 지니고 있지만 금세 자기 속으로 파고들어 버리는 사람. 지친 얼굴로 모델에게 아름답다는 칭찬을 건넬 때 잠깐 반짝이던 미소는 곧 가시고, 어두운 얼굴로 자신의 작품을 보는 게 지겹다고 말한다. 평소보다 더 나직해 웅얼거림에 가깝게 느껴지는 그 말은, 스스로를 향하는 것 같기도 하다.   


<생 로랑>(2014)



베르트랑 보넬로 감독의 <생 로랑>은, 같은 해 완성된 자릴 레스페르 감독의 <이브 생 로랑>과 같은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이듬해 세자르 영화제 남우주연상은 <생 로랑>의 가스파르 울리엘이 아닌 <이브 생 로랑>의 피에르 니니에게 돌아간다. 두 작품을 다 본 내게, ‘누가 연기를 더 잘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연기라는 것이 ‘더’나 ‘잘하다’와 같은 말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냐고 되묻고 싶다. 다만 두 작품의 포인트가 달랐다는 점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브 생 로랑>이 생 로랑의 삶에서 드라마적인 부분, 특히 생 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의 관계에 집중해 정직하게 연출해낸다면, <생 로랑>은 생 로랑 개인에도 주목하지만, 마치 그의 디자인처럼 음악과 화면의 스타일에도 비중을 둔다. 따라서 배우의 연기보다는 연출 스타일이 드러났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가스파르 울리엘의 연기가 묻혀서 상을 받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려는 것도 아니고, 앞에서 그가 <단지 세상의 끝>으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적기도 했지만, 상은 어쩌면 ‘상’ 일뿐이지 않은가, 하는 말을 던져보고는 싶다.


배우에게, 연기를 ‘잘한다’는 말은 흔하고도 뿌듯한 칭찬이다. 나도 종종 감탄사처럼 내뱉곤 했다. 허나 언어와 표현에 대한 고민이 늘어나면서 잘 쓰지 않거나, 특정한 경우에만 쓰게 됐다. 좋아하는 배우를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굳이 ‘잘한다’는 단어를 넣지 않고도 그의 연기를 통해 받은 느낌을 묘사할 수 있어진다. 가스파르 울리엘의 연기에는 섬세한 떨림이 있다. ‘개인적’이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자기 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다. 이런 것들이, 정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배우에 대한 애정을 갖고 공들여 표현한 말들이다.


<생 로랑>(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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