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않인 Feb 05. 2022

묵직한 존재감

메릿 위버 Merritt Wever




<그 땅에는 신이 없다(Godless)>(2017, Netflix)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2019, Netflix)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Godless>(2017), 1880년의 라벨은 ‘damn’, ‘fuck’, ‘shit’ 따위의 단어가 딱히 비속어로 분류되지 않을 듯한 마을이다. 그 말들은 수식어처럼 일상적인 문장에 끼어들어, 인물의 개성을 만나 각기 다른 분위기를 입는다. 앨리스 플래쳐가 읊조리면 우아하고, 화이티 윈이 뱉으면 귀엽다. 메리 아그니스가 툭 던지면, 의도가 무엇이건 효과적이다. 고개를 살짝 내리고 눈을 올려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주로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기대어 지켜보거나, 두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한 손은 허리춤에 얹어 폼을 잡은 후 경고하듯 응시한다. 투박한 셔츠, 멜빵으로 고정한 바지, 카우보이 부츠와 모자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메리 아그니스는 남편이 죽은 후 그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에도 드레스를 입었을 뿐 그 배짱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란 짐작이 든다.


<Godless>(2017). IMDB.


꼽자면 프랭크 그리핀과 로이 구드의 서사가 핵심이나, 작품은 어떤 역할도 가벼이 다루지 않는다. 라벨 주민들 하나하나에게 일정한 깊이를 부여한다. 곁가지가 많아 취향에 따라 어수선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었겠으나, 전통적 서부극의 형식을 빌려 바로 그 서부극과 ‘아메리카’가 짓밟은 가치들을 말하는 나름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대표하는 이 중 하나가 메리 아그니스. 이 잘 쓰인 인물은 중심이 탄탄한 배우를 만나 제 멋을 찾았다.  


메릿 위버는 표정이나 말투를 드라마틱하게 휘두르는 스타일의 배우는 아니다. 살짝 우울하게 처진 눈썹과 눈꼬리, 꾹 다물려 있는 입술. 언뜻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뺨을 찬찬히 살피면, 끝이 없는 의문과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고민이 배어 있다. 그러니 침묵하다 입을 열면 귀를 기울일 수밖에. 무거운 바탕에 높은 허스키함이 섞인 보이스. 특별히 울림이 강하지는 않지만, 느긋하게 가라앉는 특유의 말투와 만나 독특한 리듬을 이룬다. 말을 강조하거나 격한 감정을 드러낼 때는, 터트리기보다는 꾹꾹 누른다. 언성도 누르고 시선도 누르며, 그 힘으로 의도에 따라 상대의 불안을 누르거나, 상대의 기를 누른다.


총을 사며 능청을 떨던 메리 아그니스는, 조카가 만지던 사탕 단지를 깨뜨린 것을 보고 고함을 지르는 가게 주인에게 조용히 총을 겨눈다. 어디 해봐,라고 속삭인다. 힘을 주지 않아 서늘한 톤이다. 경고하듯 눈을 고정한다. 강한 자는 힘을 과시할 필요가 없음을, 그와 메릿 위버는 안다. 총을 내리고 건들거리며 태연히 대사, 눈빛과 함께 동전을 던진다. 고개를 돌려 표정 변화 없이 조카에게 윙크를 날린다.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물려 있다. 그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 스스로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확신과 자신을 바탕으로 나오는 태도다. 그저 있는 것 만으로 카리스마를 지니는 이, 메리 아그니스, ‘메기’다.


<Godless>(2017). IMDB.


마을 여성들이 음식과 술, 미소를 광산업자 남성들에게 대접할 때, 메기는 상석에 앉아 내내 눈에 힘을 주고, 발렌타인과 샬롯을 번갈아 응시한다. 샬롯의 말을 막지는 않지만, 분명한 시선을 보낸다. 발렌타인을 향한 적의와는 다른,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다. 설명할 때는 빠르게 잇고, 요구할 때는 또박또박 분명하게 뱉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끼자, 테이블을 담백하게 탁 치고 일어난다. 여성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우리가 함께 무엇을 했는지’ 돌이킨다. 눈썹이 올라가고, 목소리가 높아지며 살짝 떨린다. 저들이 부리는 수작을, 알면서도 말려드는 친구들의 얼굴을 목격한다. 내내 마주하고 있던 샬롯과, 눈으로 대화한다. 메기는 우리가 지켜낸 것을 저들에게 거저 넘길 것이냐고 물었고, 샬롯은 나는 너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답했다. 메릿 위버와 사만다 소울은 그들이 입을 열지 않은 채 나눈 대화를 이해하게 해 주었다. 이내 메기의 입술에 체념이 어린다.  


메기는 똑똑하고 강하다. 마을의 상황도 꿰고 있다. 딱히 남자들의 보호가 필요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이 불안해한다는 것도, 남자를 원한다는 것도, 마을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날 밤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었던 캘리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지친 미소를 보낸다. 몇 시간 전, 플러팅을 시도하는 발렌타인에게, ‘나는 원래 창녀whore’였다고 시니컬하게 늘어놓는 캘리를 보고, 메기는 미소를 참지 못했었다. 캘리는 그를 웃게 한다.


<Godless>(2017). IMDB.


작품이 메기를 다루는 핵심 요소 중 하나는 캘리와의 관계다. 나긋나긋하지만 중심이 단단한 그는, 두꺼운 갑옷을 두르고 있는 메기의 여린 구석을 건드리는 유일한 사람이다. 함께 있을 때 메기는 뺨을 수줍게 붉힌다.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눈빛에 머뭇거림이 담겨 있다. 캘리가 고갯짓을 하자 고개를 까딱 내리고,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옆으로 다가간다. 당신을 돌봐주겠다는 말에, 혀를 내밀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다. 못 참겠다는 듯 손으로 입가를 만진다. 팔을 무릎에 괸 채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메기는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알고, 그것이 틀린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빌이 왜 캘리가 네 집에서 나오냐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대강 대꾸한다. 부끄러워하거나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늘 다음 제스처를 알고 있는 메기의 머리가 텅 비고, 못난 짓을 할 때 역시, 사랑을 할 때다. 마르타의 집에서 나오는 캘리를, 메기는 멍하니 바라본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다음 날 캘리를 만나자 눈을 맞추지 않고 걸어가다, 결심한 듯 후회할 말을 독기와 함께 뱉는다. 그러나 눈은, 머뭇거린다. 사랑은 똑똑하고 강한 사람을 이토록 어리석게 만든다. 캘리는 먼저 다가가 상처와 감정을 표현하고, 메기는 자꾸 비꼬며 피한다. 그러다가도, 멀어져 가는 뒷모습에서는 눈을 떼지 못한다. 연인과 자신 모두를 상처 입히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몸을 돌려, 구경꾼들을 향해 뱉는다, “Fuck y’all.” 그 담백한 저주엔, 평소와 같은 확신이 없었다. 그 ‘y’all’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캘리와의 사이를 의심하며 질투했던 마르타를, 남성의 폭력으로부터는 당연히 보호한다. ‘비숍 부인’을 찾아온 사립탐정을 여유롭게 따돌린 후, 그를 찾아간다. 경고하다 말고, 말문이 막힌다. 캘리의 초상을 발견하고 눈이 멎는다. 복잡하고 아련한 감정, 소유욕까지 비치는 응시다. “It’s for you.”를 듣고 멍하니 있다가 뱉는다, “Shit.”. 마구 웃으며 이마를 쓸고, 그 단어가 새삼스럽다는 듯 반복해 외친다. 진심과 더불어 멍청한 오해를 했음을 깨닫는 장면, 급변하는 감정이 그 ‘shit’에 다 담겨 있다. 상대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황이 덧붙어, 메기의 혼란스러운 심리가 그 공간에 가득하다. 그러나 갑자기 문이 열리자, 마구 움직이던 몸을 곧게 정지시키고 자동으로 총을 꺼내 겨눈다. 이 작품의 ‘재미’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누구든 언제라도 총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 ‘누구’가 앨리스 플래쳐나 메리 아그니스를 비롯한 여성일 때, ‘재미’는 배가 된다. 메기는 서늘한 눈빛을 사선으로 쏜다. 마르타가 총을 쏴버리자 긴장은 순식간에 풀어진다. 체념한 듯 뱉는 “Jesus.”. 다시 팔짱을 끼고 기대 그들을 구경한다. 갑자기 이 황당한 상황의 관찰자가 되어버린 메기는, 뜨악하게 몇 마디를 던지고는, 밖으로 나간다. 쓸쓸히 걷기 시작하자, 화면은 다시 그의 것이 된다. 캘리를 찾아가 옆에서 말없이 못질을 하기 시작한다. 화해는 그것으로 충분함을, 두 배우의 미소가 말했다.


<Godless>(2017). IMDB.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앨리스와의 케미다. 최대한 피해 왔지만, 이제 대면할 수밖에 없다. 또렷하고 빠르게, 딱히 적의는 없이 설명한다. 진정성 있게 제안한다. 장황한 설득이나 격한 감정이 오갈 필요는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그들 사이에 있었던 건 ‘어쩔 수 없는 협력’ 이상의 것이었다.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스스로 지켜온,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이들의 공감과 유대다. 메기와 앨리스, 건물 옥상에서 나란히 총을 겨누고 있는 두 명사수의 투샷은 너무나 위대하였다.  


프랭크 그리핀이 도착하기 전, 총을 나누어주며, 메기는 주민 한 명 한 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들을 알고, 관리하고, 보호할 역량이 되는 사람. 걱정하고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 그것이 메리 아그니스다. 모든 것이 끝나고, 메기는 화이티의 묘지 앞에서 비로소 긴장을 풀고 눈물을 흘린다. 뒤늦게 도착한 신부의 말을 멍하니 듣는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두 눈으로 담는다. 늘 그랬듯, 유유히 자리를 뜬다.




<Unbelievable>(2019). IMDB.


2년 후, 메릿 위버는 또 하나의 리미티드 시리즈 <Unbelievable>(2019)에서 다시금 중심을 잡았다. 메리 에그니스에게 있던 그 묵직한 존재감을, 캐런 듀발의 직업과 시대, 성향에 어울리도록 옮겨왔다. 캐런은 사건을 담는 올바른 눈이다. 평범한 몰이해와 무능이 모여 마리를 궁지에 몰아넣는 과정을 목격하고 나면, 그의 등장에 감사할 지경이다. 사건에 대한 섬세한 이해,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 그런 것들을 당연히 갖춰야 한다고 믿는 태도가 맞물려 차이를 만든다. 그는 앰버에게 ‘내가 하는 일을 잊지 않으려고’ 이사야서 구절을 차에 붙이고 다닌다고 했다. 첫 등장으로 이미 메릿 위버는, 그 진정성을 화면 너머로 건넸다.



캐런의 방식과 까닭


팔짱을 끼고 앞뒤로 몸을 흔들며 생각에 잠겨 있거나, 허리에 팔을 얹고 좌우로 흔들리며 집중한다. 언뜻 고요해 보이는 실루엣, 그 속에서 온갖 것들이 떠오르고 이어지고 엮이고 풀리고 있음을, 메릿 위버는 미세한 미간의 주름과 깊은 눈빛, 꾹 다문 입으로 드러낸다. 캐런의 서두르지 않는- 필요에 따라 빠르기와 세기를 조절하는 리듬은, 그레이스의 재빠르고 날카로운 만큼 확실하며 융통성 있는 스타일과 만나, 일과 관계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들은, 맡은 일의 무게를 이해하기에 더 유능한 형사들이다. 메릿 위버와 토니 콜레트, 이야기의 무게를 이해한 두 베테랑 배우는, 그들이 만나 부딪히고, 공감하고, 일과 고민을 나누고, 호흡을 맞추는 과정에서, 인물과 관계를 설득함을 넘어, 작품의 의미를 또렷이 드러냈다.


집중해 무언가를 추측할 때, 캐런의 에너지는 안으로 모인다. 타임라인이 적힌 보드 앞에서 매카시를 프로파일링 할 때가 그렇다. 허스키하고 나직한 목소리. 혼잣말을 하는 투지만, 주위에 들릴 정도로 분명하다. 예리한 질문을 이어, 결국 중요한 정보를 추리해낸다. 일을 지시하거나 설명할 때, 캐런의 속도는 완전히 바뀐다. 에너지를 한데 내리꽂거나, 사방으로 뿌린다. 말은 빠르고 정확하게, 톤은 약간 올려서. 허스키함이 줄어들고 음색이 또렷해진다. 언성을 높일 때는, 팀원들이 일을 철저히 하지 않았을 때다.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감정을 앞세워 다이나믹하게 소리를 지르지는 않는다. 선 채로 몸을 낮춰 앉아 있는 상대와 눈을 똑바로 맞추며,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손과 어깨를 크게 움직이며, 목과 배에 힘을 주고 마디마디를 정확히 뱉는다. 캐런은 그들이 일의 중요성을 새기고, 최선을 다해 ‘잘’ 하기를 바란다. 목적과 효과가 분명한 ‘훈계’다. 마치고 긴장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쉰다.


<Unbelievable>(2019). IMDB.


왜 일을 잘, 해야 하는가. 이성적/당위적 설명으로 끝낼 수도 있었겠으나, 작품은 감정적/개인적인 설득의 순간을 마련한다. 메릿 위버는 처음부터 캐런의 그늘을 일관성 있게 내보이다, 그것을 털어놓을 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캐런이 홀로 운전하며,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 있다. 고개를 느긋하게 흔들며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러다 서서히 멈춘다. 웃음기가 사라진다. 가만히 앞을 본다. 앰버를 친구의 집에 데려다주었을 때, 캐런은 고맙다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뒷짐을 진 채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말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문이 닫히자, 잠시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런, 대사나 특별한 제스처 없이 머무르는 순간들에, 태도와 고민이 담겨 있다.


캐런은 피해자와 지속적인 소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형사다. 일단 상대의 마음을 살피고 나서야 질문이나 정보를 전하고, 끝난 후에 다시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때로 그의 방식은 ‘수사할 시간도 부족한데 여기서 뭘 하냐’는 반응을 맞닥뜨린다. 그럴 때면 변명을 붙이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 화와 슬픔, 답답함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되새기며 수사에 쏟아붓는다. 놓쳤던 것을 알게 될 때마다 스스로를 옥죈다. 남성 경찰의 40퍼센트가 가정폭력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듣고, 캐런의 얼굴은 멍하게 확장된 채 멎는다. 그는 그레이스처럼 우울한 농담으로 넘기지 못한다. 소리 내 웃다가도, 그늘은 금세 돌아온다. 그레이스는 철저히 일하면서도 유머나 취미로 적절히 자신을 분리해 놓는다. 캐런은 일에 몰두하면 그것밖에는 볼 수가 없다. 경험과 성격의 차이다. 카드를 뽑고 내려놓으며, 캐런은 그날의 사건을 털어놓는다. 몇 년 전 마음의 소리를 무시한 결과가 내내 그의 얼굴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메릿 위버가 신중하게 두른 여백은 시청자를 숨죽이게 만든다. 캐런의 ‘까닭’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Unbelievable>(2019). IMDB.



캐런과 그레이스 사이 유대와 케미


동등한 위치에서 ‘일’하는 여성과의 유대감, 동료애. <Godless>에서 미셸 도커리와 짧고 강렬하게 이루었던 그 케미를, <Unbelievable>에서 토니 콜레트와 시원하게 뿜어낸다. 캐릭터와 관계성에 어울리는 형태로. 캐런의 동경과 배려가 포함되어 살짝 일방적이었던 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호 방향으로 변한다. 일을 제대로 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그들은 너무나 잘 맞는다. 날카로운 감각과 통찰력, 꼼꼼함과 꾸준함이 만나, 속도와 완성도를 배 이상으로 높인다. 수사 자체뿐 아니라- 그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대할 때도 서로에게 힘이 된다. 그레이스는 캐런의 근심을 덜어주고, 캐런은 그레이스의 분노를 누그러뜨린다. ‘저들에겐 왜 분노가 없냐’며 그레이스가 분노하자, 릴리의 어머니에게 그랬듯, 캐런은 고집스럽게 눈을 맞추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잇는다. 그 부드러운 끈기는 효과적이다.


매카시의 집 앞에서 잠복해 있을 때, 캐런은 그레이스를 처음 만난 기억을 꺼낸다. 추억하듯 눈을 허공에 두고 미소를 살짝 띤 채 고개를 흔들며, “total fangirl”이었음을 고백한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다시 일로 이어지고, 캐런의 얼굴엔 다시 그림자가 내린다. 이렇듯 작품과 캐릭터 특성상, 순수한 즐거움이 비치는 순간은 잘 없다. 그러나 유독 그레이스 앞에서 자주, 캐런은 저도 모르는 새에 긴장을 푼다. 초반부터 그랬다. 그레이스가 “Bitch, you are on you game! Okay, let’s do this!”하고 시원스러운 투로 말하자, 캐런의 눈은 동그랗게 풀어지고 낯빛은 수줍게 밝아진다. 그레이스가 특유의 하! 를 뱉으며 장난스럽게 툭 치자, 살짝 뒤로 물러나며 얼굴을 전체적으로 찡긋, 한다. 공동 수사를 제대로 하게 됐다는 기쁨과 더불어- ‘그 그레이스 라스무센’에게 인정받았다는, 같이 일하게 됐다는 개인적인 설렘도 섞여 있다. 그가 코를 찡그리고 눈을 내리깔며 씩 웃는 찰나들은, 드문 만큼 매력적이다. 메릿 위버의 진중한 얼굴은, 조금이라도 웃음이나 빛이 들어가면 흥미롭게 변한다.


<Unbelievable>(2019). IMDB.


캐런이 늘 그렇듯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겨 몸을 천천히 앞뒤로 흔들고 있을 때, 다른 멤버들은 검지를 코에 대기 시작한다. 마침내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해하며 따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캐런은 정말로 그게 뭔지 모른다. 그레이스가 “캔자스에 갈 사람은 너야.”라고 하자, 아직도 뭔지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드는 듯, 순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여전히 코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수사할 때는 민첩한 캐런이 그렇게 둔할 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시청자는 그레이스가 가끔 캐런을 재미있어하는 까닭을, 정이 가득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까닭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눈을 맞추거나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은 단순히 웃음을 주는 걸 넘어, 그 유대를 드러낸다. 같이 일하며 어느새 눈짓 고갯짓 손짓 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이가 됐다. 매카시를 잡은 날 밤, 그들은 함께 서를 나서며 피곤에 절어 힘없는 민낯 그대로 주먹을 툭 맞댄 후 각자의 차로 걸어간다. 파일을 열기 전 준비됐냐는 듯 캐런을 슥 보는 그레이스, 시선도 주지 않고 고개를 대강 움직이는 캐런. 그런 장면들이다. 강약 조절이 자유로운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호흡이다.


<Unbelievable>(2019). IMDB.



캐런 듀발이 감당하는 무게


캔자스서 담당 형사에게서, 캐런은 그레이스가 태거트를 비롯한 남성들에게 없다고 한 그 ‘분노’를 감지한다. 고개를 든 채 ‘인정’하듯 천천히 끄덕이며 사선으로 잠깐 응시한다. 그 ‘사선 응시’는, 이후 음식점에서 뉘앙스를 달리해 등장한다. 책을 읽던 그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든다. 피하지도 않는 저 남자. 다시 책으로 돌렸던 눈을 성가시다는 듯 치켜뜬다. 다시 그를 보고, 책을 본다. 한 무리의 젊은 여성이 들어오자, 남자의 시선은 그들에게 가닿는다. 이제 캐런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노려보는 것은 아니나, 힘을 빼 더 강렬한 응시다.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있고, 꾹 다물린 입은 약간 튀어나와 있다. 재킷을 부러 휙 올려 건과 배지를 내보이며 지갑을 꺼내고, 나가기 전 남자 옆에 잠깐 머무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처럼 캐런의 카리스마는, 그의 속도가 낮을 때 최고조를 찍는다. 이를 테면 스캇 페리시를 취조할 때. 캐런은 빠르게 압도하지 않는다. 서서히 옥죈다. 눈에 힘을 빼고 “그게 뭔데?”, “무슨 일?” 정도의 짧은 질문을 던지며 주위를 천천히 맴돈다. 흠, 같은 애매한 소리로 맞장구를 치거나, 한쪽 입꼬리를 올리기도 한다. 그 상태가 지속되자, 상대는 알아서 흥분한다. 그제야, 들고 있던 사건 파일을 테이블에 툭 던지고 의자에 앉는다. 또렷한 목소리로 묻기 시작한다.


<Unbelievable>(2019). IMDB.


매카시에게 수갑을 채울 때도, 그의 종아리를 걷어 모반을 확인할 때도, 캐런은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작정 열심히 일을 벌이거나 팀원들을 재촉하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큰 그림을 그려 남들이 아직 눈치채지 못했거나 놓쳐버린 것을 본다. 그렇게 포괄하는 눈으로, 방을 꼼꼼하게 둘러보며 결정적인 증거들을 찾아낸다. 앰프를 뜯어보다, 인상을 쓰고 팔짱을 낀 채 천천히 걸어가, 삐져나온 지퍼백을 가리킨다. 신중하고 정확한 손놀림, 사이사이 이어지는 차분한 “Get this.”, “Again please.”. 낯은 섣불리 밝아지거나 붉어지지 않는다. 매카시는 잡았지만, 이미 범죄는 벌어졌고, 피해자들은 아직도 고통받고 있다. 선고일, 맨 뒤에 앉아 있다 조용히 나가는 앰버를 따라가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얼굴. 사건과 피해자 하나하나를 가슴에 담아 둔 이의 것이었다. 그 자신의 마음은 천근만근이겠으나, 그것이 쌓여 지금의 캐런 듀발을 만든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메릿 위버는 자리와 일의 무게를 대하는 캐런의 방식을 그렇게 입는다.


그랬기에, 전화 한 통으로 마리와 두 형사가 이어지는 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값졌다. 캐런은, 마리의 말에 시간을 두고 답한다. 신중함과 얼떨떨함이 함께 있다. 전화를 끊고 그레이스에게 전할 때까지 남아 있다. 어떤 면에서는, 캐런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대화였다. “Thank you for calling.”은,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옆모습이 고요했기에 오히려 요동치는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모른다. 유사한 경험을 했다 해도, 시청자는 마리의 심정도 캐런의 심정도 완전히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은, 고민과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사건 자체를 중심에 두는 것을 잊지 않으며, 섣불리 단정 짓지 않는 메릿 위버의 연기였다.


<Unbelievable>(2019). IMDB.





두 작품은 달랐다. <Godless>는 픽션인 데다 서부극, 캐릭터와 플롯의 매력이 필수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Unbelievable>은, 사건을 다루는 입장과 방향이 중요했다. 그러나, <Godless>는 설정과 전개에서 대안적 감수성을 보였다. 매력만큼 방향성도 핵심으로 가져갔다. 기존의 서부극이 무시하거나 착취했던 여성, 원주민, 흑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또한 <Unbelievable>이 사건을 ‘픽션’으로 재구성하며 중점을 둔 것 중 하나는, 캐릭터- 두 형사의 매력이었다. 포인트와 범위가 다른 두 작품에는, 닮은 데가 있었다.


그처럼, 메리 아그니스와 캐런 듀발도 다르고 닮았다. 일단 달랐다. 메기가 1880년대 무법지대에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총을 항시 지니는 이고, 캐런이 현대에서 법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이라는 표면적인 차이가 다는 아니다. 메기는 종종 행동과 감정이 앞서는 만큼 털어 내기도 잘한다. 캐런은 항상 신중하게 고민하고 배려하며 모든 번뇌를 짊어진다. 그러나 다시, 둘은 닮아 있었다. 마을을 지키고 주민들을 챙기는 메기와 팀을 이끌고 작전을 총괄하는 캐런이 겹쳐 보였던 건, 포지션 때문만은 아니었다.


메기나 캐런 같은 인물을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고 권위와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대강 묶는 시대는 간 지 오래다. 메릿 위버가 표현하는 강하고 주도적인 여성들은, 폭력적이고 비겁한 것들에 맞섰다. 그러나 약하거나 상처받은 이들 앞에서는 흔들렸다, 보호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에. 그러나 무너지지는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고 타인과 연대하며 더 강해졌다. 그 방향과 형태는 다르지만, 그들은 닮아 있었다. 옳다고 믿는 것을 따르며, 타인을 지키려는 용기. 두 사람이 지닌 힘의 핵심은 거기에 있었다.


두 여성의 닮고 다른 심리와 개성을, 메릿 위버는 안정적인 깊이로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의 묵직한 존재감은 시청자가 캐릭터의 매력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이야기의 무게와 힘을, 이해하게 했다.


<Unbelievable>(2019). IMDB.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