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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Feb 11. 2022

이름하야 뉴 웨스턴

영화, 드라마



 

* 언급하는 작품의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시가를 문 백인 남자들이 허리춤에서 멋지게 권총을 뽑아 들고 서로를 혹은 ‘야만인’을 겨누며 폼을 잡는다. 또 다른 백인 남자들은 땅을 파헤쳐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개척사’를 다룬 기존의 서부극은 그런 이미지다. 그것들이 착취하고 무시한 존재와 가치를 현대적 감수성과 각자의 온도로 담아낸 작품들을 모았다. 선택 기준과 설명의 방향은 글쓴이의 취향에 기반한다.



 1. <데드 맨(Dead Man)>(1995, 짐 자무쉬)


리스트 중 유일하게 20세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리튼 앤 디렉티드 바이 짐 자무쉬.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로 유명한 그의 필모그래피는 사실 장르영화가 반을 차지한다. 그 이야기들은 뱀파이어물, 범죄물, 킬러물, 좀비물이 아닌 ‘짐 자무쉬’라는 장르로 구분된다. 서부극도 다르지 않다. ‘윌리엄 블레이크’와 ‘노바디’라는 위대한 말장난. 여백이 있는 리듬으로 흑백의 화면이 이어지며 두 이방인의 느긋한 도망길을 담는다.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갈수록 빛이 나는 윌리엄은, 죽음의 여정을 따라가며 ‘멍청한 백인들’의 몸 위에 총으로 시를 쓴다.  


<데드 맨>(1995). IMDB 이미지.



2. <슬로우 웨스트(Slow West)>(2015, 존 맥클린)


단편 <피치 블랙 헤이스트>(2011)에서 함께 작업했던 존 맥클린과 마이클 패스벤더가 다시 만났다. 오로지 사랑을 찾아 먼 길을 떠난, 순수한 청년 제이. 허무에 찌든 무법자 사일러스. 언뜻 상극인 듯 보이는 둘은 닮아 있다. 서부, ‘아메리카’의 실체, 인간을 꿰뚫는 눈을 지녔다. 총이 발사되는 순간조차- 천천히 시를 읊듯 이어지는 화면과 대사들. 작품은 그 사이로 덧없는 죽음들을 서늘하게 담는다. 제이는 죽음을 맞이하며 사일러스에게 삶을 건네주었다. 좋아하는 장면은 많지만, 하나 꼽자면 두 사람이 각자 탄 말을 밧줄로 연결해 젖은 옷을 널어놓고 가는 뒷모습이다.


<슬로우 웨스트>(2015). IMDB 이미지.



3. <퍼스트 카우(First Cow)>(2019, 켈리 라이카트)


고유한 리얼리즘으로 그린 ‘wild west’. 원작 <The Half-Life>의 저자 조나단 레이몬드가 켈리 라이카트와 함께 스크린용 각본을 썼다. 기회의 땅이라지만 기회의 전제 조건은 자본과 권력인 곳, 가진 게 없는 두 약한 남자가 만나 서로를 구하고 우정을 쌓는다. 권력자의 소에서 우유를 훔쳐 반죽한 빵을 팔며 내일을 꿈꾼다. 거친 땅에서 도둑질과 장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이리도 무해하다. 서부극에서 죽음은 필수이나, 이토록 현실적이면서도 따스하게 죽음을 담는 작품은 드물 것이다.


<퍼스트 카우>(2019). IMDB 이미지.



4. <파워 오브 도그(The Power of the Dog)>(2021, 제인 캠피온)  


2021년에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파워 오브 도그를 봤다고 답하겠다. 2022년에 무엇을 했냐고 묻는다면, 파워 오브 도그를 읽었다고 답하겠다. 토마스 새비지의 소설을 제인 캠피온이 날카롭고 풍부하게 재해석해 스크린에 옮겼다. 원작의 맥을 이어 작품이 서부극으로서 새로이 던진 화두는 남성성.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폭력과 혐오를 바탕으로 해 결국 무력해지는 남성성을 입고, 이제까지의 작업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로 깊은 감정을 드러냈다. <슬로우 웨스트>에서 깨끗한 영혼을 눈에 담았던 코디 스밋 맥피는, 또 하나의 대안적 남성성을 완성했다. 한정된 분량으로 원작에 세세히 묘사된 로즈의 심리를 표현해낸 커스틴 던스트, 타 배우들과 안정적으로 호흡하며 독특한 매력을 드러낸 제시 플레몬스 또한 언급해야 마땅하지만- 역시, 필 버뱅크과 피터 고든이 함께한 씬들은 필름 역사에 길이 남으리라.


<파워 오브 도그>(2021). IMDB 이미지.



+ 넷플릭스 리미티드 시리즈, <그 땅에는 신이 없다(Godless)>(2017)


다양한 캐릭터의 서사를 풍부하게 쌓아 기존 서부극이 짓밟은 가치를 소중히 화면에 옮긴 작품. 꼽자면 로이 구드와 프랭크 그리핀의 복잡한 ‘부자’ 서사가 중심이지만, 앨리스 플래쳐, 그의 가족이자 네이티브인 아이요비와 트러키, 라벨의 여성들- 특히 죽은 남편의 옷을 입는 메리 아그니스와 연인 캘리, 인근 ‘버팔로 솔져’ 마을의 이야기가 각자의 몫을 지닌다. ‘악당’ 프랭크 그리핀의 여정을 통해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 또한 던지며, 클래식한 긴장감도 빼놓지 않았다. 프랭크 역 제프 브리지스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도 상당하다. 마지막 화 전투 씬은 그 요소들이 한데 모여 숨을 죽인 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 나란히 장총을 들고 선 미셸 도커리와 메릿 위버의 투샷은 아, 나도 몰랐던 내 삶의 필수 요소였다.


<Godless>(2017). IMDB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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