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교육>(2004)
<나쁜 교육(La Mala Educacion)>(2004,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었거든, 그리고 나는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지.” ‘왜 나를 뽑았냐’는 후안의 물음에 대한 엔리케의 답이다. 자신이 쓴 인물들을 향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호기심으로도 들린다. 그는 끝까지 밀고 나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야기꾼이다. 그의 작품은 때로 지나치게 역동적이고 엉망으로 얼룩져, 현실적인 동시에 연극적이다. 선명한 붉은색으로 유명한 화면은 욕망을 색으로 옮긴 연극 무대의 장치로 느껴진다. 인간의 욕망은 단순하지 않다. 개인마다 다르게 복잡하며, 때로 모호하거나 꼬여 있다. 알모도바르는 그것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실행하는 인물들을 그려 왔다. 욕망에 솔직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원하는 것이 명확하지 않을 때 그저 충동을 따르기도 한다. <나쁜 교육>은 그의 초기작들에 비해 정리된 흐름을 통해, 정리되지 않은 욕망들을 그린다.
이그나시오는 잘못된 욕망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그 역시 타인을 대상으로 삼아 때로 뒤틀린 욕망을 드러내기도 하는 주체다. 엔리케가 이그나시오의 글을 읽을 때, 작품은 후에 그가 감독한 영화의 장면을 편집해 넣으며 내용을 옮긴다. 이그나시오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인 자하라는, 잠든 ‘엔리케’와 섹스한다. (강간이다.) 그 행위가 허용되는 까닭은, 자신이 쓴 이야기 속이며, 대상이 ‘엔리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의 엔리케에게 읽히는 순간 ‘네가 달라진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나는 여전히 나이며 너를 욕망한다’는 고백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인물들의 대사나 행동은 그 자체로 작품의 시선이나 감수성을 대변하지 않는다. 맥락과 방향을 타고 숨은 의도와 함께 전달된다. 그렇다면 <나쁜 교육>이 관객에게 닿을 때, 그 욕망과 행위들은 무슨 의미를 입는가,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는가.
인물들의 욕망은 일방적이거나, 어긋난 채 만난다. 기억 속 이그나시오를 욕망하는 베렝게와 엔리케는 모두 후안/앙켈과 관계하나, 그들은 다르다. <욕망의 법칙>(1987) 속 파블로는 그토록 사랑했던 후안을 살해한 안토니오를 결국 욕망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안토니오를 후안의 대체로 본다는 뜻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앙켈이 후안임을 알게 된 후 엔리케는 이그나시오를 사칭한 그를 욕망하나, 대체로 여기지는 않는다. 엔리케는 아는 것을 말하지 않고, 후안은 그가 알고 있음을 알고도 털어놓지 않는다. 그들이 관계하는 것은 그 이후, 그러므로, 엔리케는 이그나시오가 아닌 후안을 원한 것이고, 후안은 이그나시오가 아닌 앙켈로서 그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 섹스에는 시험/실험의 뉘앙스가 있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암묵적 약속 같은 두 사람의 거짓말과 비밀은 모든 것을 시작한 베렝게의 방문으로 깨진다.
엔리케는 ‘앙켈’이 이그나시오와 다름을 처음부터 느꼈다. 베렝게는 아니다. 후안에게서 과거의 이그나시오를,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욕망한 이미지를 본다. 그에게 있어 상대나 상대의 욕망은 중요치 않다. 엔리케를 방문한 목적조차 후안을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과거의 이그나시오와 현재의 후안 모두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권력이나 돈으로 구속한다. 오래 전 이용했던 이그나시오를, 후안을 만나기 위해 다른 형태로 이용한다. 후안은 베렝게와 자발적으로 만나며 이득을 얻어내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이용은 쌍방향이지만, 이그나시오가 당한 일이 아니었다면 만날 일이 없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애초부터 어긋나 있다. “그 녀석이 내 인생을 망쳤어.”, “그런 형이 있다는 게, 작은 마을에서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 너는 몰라.” 후안과 이그나시오 사이엔 타인이 다 이해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이 있을 것이나, 베렝게와의 관계는 후안이 이그나시오에게 짓는 죄다. 그러나 이그나시오는 목격하고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미 과거의 상처를 ‘팔아’ 얻은 돈으로 몸에 약을 주입하며 스스로와 가족에게 죄를 짓고 있어서다. 그 자기파괴는 그가 현실을 버티는 일종의 방법이다.
이그나시오의 서사는 <욕망의 법칙> 속 티나의 것을 확장시킨 듯 보이기도 한다. 트랜스 여성 티나는 여성 배우 카르멘 마우라가 연기했다. 단편적 사실 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트랜스 여성 역할을 ‘당연히’ 시스젠더 남성 배우에게 맡기며 위협이나 농담으로 취급하던 당시 다른 픽션들과 달리, 티나를 ‘여성’으로 보고 있음은 확실했다. 이그나시오는 남성 배우가 연기하나, 작품은 ‘다른 인물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가’와 상관 없이 그를 여성으로 대한다. 그가 여전히 엔리케를 사랑한다고 하여 그가 여성이 아닌 것은 아니며, 그가 여성이라 하여 사랑의 기억이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엔리케는 그것을 이해한다. 편지를 읽으며 그리워한다. 이미 세상에 없는 이그나시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제스처다.
티나는 아버지와 신부에게 당했던 일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살아갔지만, 이그나시오는 돈을 훔치고 약을 할지언정 정확히 판단하고 기억하며 글로 표출했다. 폭력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각기 다르고, 잘못되었다 해도 원인은 티나에게 있지 않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그나시오가 그 차이를 분명히 느꼈던 까닭 중 하나는, 당시 한 진짜 사랑의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결국 무너지지 않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 “사랑하는 엔리케, 나 성공한 것 같은데..” 이그나시오가 마지막으로 적은, 아니 다 적지 못한 편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후안은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엔리케에게 전한다. 자신이 죄를 지은 두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다. 그는 이그나시오가 죽고 3년 동안 만족스럽지 못한 일을 하다, 엔리케를 찾아가 그를 사칭했다. 커리어를 위해 누나와 그의 첫사랑을 이용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후안은 자신이 엔리케가 아닌 자하라를 꼭 연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해하려는 뒤늦은 시도, 애도하고 뉘우치는 나름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앙켈이 자하라를 연기한 방식은 그가 결국 이그나시오를 받아들인 방식이다. 해묵은 상처가 담긴 복잡한 분노, 죽기 직전의 두려움과 슬픔을 표현하는 그의 연기에는 혐오나 과장이 없다. 역할에 이입하고, 후안이 아닌 이그나시오의 입장에서 ‘이그나시오’를 보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런 형’을 ‘누나’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리라. 자하라가 죽는 씬의 촬영 장면으로 영화와 현실이 이어진다. 이그나시오-자하라는 앙켈이 되고, 이어 후안으로 돌아온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그나시오, 후안, 엔리케마저 어느 정도- ‘나쁜’ 것을 욕망하고, 실행한다. 베렝게가 자조하듯 뱉었던 ‘악당’은 없다. 그러나 시작은 있다. 베렝게, 마놀로 신부. 그는 ‘나쁜 교육’을 한 장본인이다. ‘나는’ 사랑했어,라니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감각하고 폭력적인 말인가. 애초에 상대의 감정과 의사를 삭제하고 시작한,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쁜 교육’의 결과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작품은 보여주려고 했던 걸까. 그것은 ‘교육자’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는 몫의 ‘나쁨’ 이상으로 불어나, 이그나시오의 평생을 괴롭혔고, 후안을 얽었고, 엔리케까지 끌어들이며 굴러갔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던 순간 이그나시오는 타의에 의해 죽었고, 후안은 결국 베렝게에게 협박 당하다 그를 죽이며 ‘나쁨’을 잇는다. 빠져나온 것은 사랑을 간직한 엔리케 뿐이다.
유일하게 숨은 목적이나 폭력성 없이 순수한 형태로 서로를 향했던 욕망은 엔리케와 이그나시오 사이의 것이었다. 그들은 마놀로에 의해 헤어지고,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하지만, 사랑 만은 살아남는다. 이그나시오는 ‘이야기’를 통해 폭력을 고발하며 사랑을 전했고, 엔리케는 그것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떨어진 시공간에서 함께 영화를 완성했다. 이그나시오의 죽음을 안 후 엔리케는 결말을 바꾼다. 포장된 희망으로 결론짓기를 거부하며 픽션과 현실을 연결한다. 그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다. 그리하여 작품이 온갖 욕망을 쏟아 부어 긍정하는 것은 사랑이고, ‘이야기’다. 이그나시오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던 엔리케만이, “같은 열정으로 여전히 영화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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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는 종종 마놀로의 시선으로 소년들을 담는데, 이어 강조하는 것은 그들을 향해 잘못된 떨림을 드러내는 마놀로의 얼굴, 그것을 마주한 이그나시오의 공포다. 때문에 관객은 부러 ‘아름다운’ 그 화면에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 씬들은 실제 기억이 아니라 이그나시오의 글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의 일부, 그와 엔리케의 어린 시절은 오로지 두 사람의 기억 속에 자리하며 관객의 시선을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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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를 몰라서 자막에서 ‘게이’, ‘동성애자’, ‘성전환자’ 등으로 번역된 단어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알았다면 대사의 뉘앙스나 인물의 시선을 보다 명확히 판단할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