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임브레이스>(2009)
<브로큰 임브레이스(Los abrazos rotos)>(2009,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아트나이너 리뷰로 쓴 글 입니다. 동일한 글이 ‘예술영화관 아트나인’ 카페에도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 여자’, 레나
작품의 현재는 2008년, 레나는 십사년 전에 죽은 인물이다. 그러나 포스터 전면에는 그의 얼굴이 있고, 엔딩 크레딧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 또한 ‘페넬로페 크루즈’다. 마테오의 회상 속에 존재하나, 레나는 자신의 표정과 언어를 지닌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고민하고, 욕망한다. 원하는 것과 원치 않는 것을 정확히 알고 표현한다. 얻는 것이 없었다면 에르네스토와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누군가는 평가의 말을 붙일 수도 있다. 허나 그는 에르네스토의 청혼을 거절했고, 커리어를 위해 그의 힘을 이용하지도, (에르네스토) 주니어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혹은 ‘어쩌다 보니’ 곁에 있었던 것 뿐, ‘뭘 어떻게 해 보려고’ 하지 않았다. 설령 ‘그런’ 의도가 있었다 해도, 애초에 가진 것이 없는 이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여자들’의 서사는 왜곡되어 왔다. 레나는 ‘외모로 남자를 홀려 위험에 빠트리는 여자’, ‘남자에게 붙어 의도적으로 이득을 얻어내는 여자’로 설명될 수 없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을 이어 나가며 꿈을 잃지 않았던, 에르네스토의 옆에서도 끊임없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성이다. 그는 오디션을 보고 영화를 찍는다. 마테오와 사랑을 나눈다. 생활의 안정을 위해 꿈이나 사랑을 참지 않는다. 두 남자 사이에서 잠깐 갈등하지만, 이내 분명히 선택한다. 주니어가 찍은 화면 속에서 ‘읽혀지던’ 레나가 마침내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목소리를 낼 때, 현실의 레나가 등장해 화면 속 레나와 겹친다. ‘연기’를 벗어던지고, 당신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화면 속 레나가 카메라로부터 멀어져 갈 때, 현실의 레나 역시 자리를 떠나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에서 밀려 떨어진 후 공포와 무력감을 느끼지만, 휘둘리지 않는다. 제안을 하고 계획을 세운다. 멀리 도망가자고 한 것도, 그곳에서 생활을 이어가려고 노력한 것도 그다.
에르네스토의 “사랑”
돈과 물리적 힘으로, 에르네스토는 레나의 몸부림을 ‘이기려’ 한다. 사랑은 승부가 아니다. 따라서 그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소유의 싸움이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정정당당하게 다가가거나,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뒤에서 수를 써 레나가 ‘일’을 할 때 자신에게 번호가 오도록 만들었고, 위기에 처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취했다’. 먼저 도움을 요청한 것이 레나이더라도, 에르네스토의 ‘호의’는 애초에 그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으므로 ‘선의’가 아니다. 사람과 관계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성공시키려고 기회를 노리는 것 같다. 레나가 오디션을 보았다고 했을 때 보인 반응에서도, 그것이 ‘사랑’이 아님이 읽힌다. 이후로도 영화의 제작을 자처하고, 아들을 시켜 감시하며, 입술을 읽는 사람까지 고용해 캐낸다. 자신감도, 사랑에 대한 믿음도 없다. 집착과 소유욕만 있다.
에르네스토는 주디트를 매수하며 아들의 요양 치료를 대가로 제시한다. 그는 늘 그런 식이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물적 대가를 지불한다. 가질 수 없게 되면, 파괴한다. 망가뜨린 후에도, 그 대가를 지불한다. 그가 차 사고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단은 그의 집착과 폭력이었다. 레나를 계단에서 밀었고, 때렸고, 그마저 통하지 않자 영화와 함께 두 사람의 커리어를 망쳤다. 장례식 비용을 댄 것은 뉘우침의 표현이거나 최소한의 예의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종의 ‘파괴의 대가’이거나, 레나의 죽음을 ‘소유’하려는 비뚤어진 제스처로 보이기도 한다.
레나와 마테오가 섹스할 때, 카메라는 적나라한 감정이 담긴 얼굴과 몸을 그대로 담는다. 반면 레나와 에르네스토가 섹스할 때, 그들은 흰 천을 전신에 덮고 있다. 아래에 깔린 레나는 숨이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끝나자 천을 내려 숨을 토하고, 몰래 구역질을 한다. ‘사랑을 나누는’ 이들은 아름답고, 그 방법을 모르는 자는 추하다. 연인 사이의 것만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에르네스토-주니어, 마테오-디에고의 관계는 또다른 형태의 사랑을 말한다. 에르네스토는 아들을 혐오하고 이용했고, 주니어는 아버지에 대한 결핍과 증오에 시달렸다. 마테오와 디에고는 서로 아버지와 아들임을 알지 못했으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서로를 돌보았다. 유대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부자’ 관계를 이루었다.
레이 엑스와 카메라
주니어, ‘레이 엑스’. 그는 레나가 계단에서 구른 후 찍게 된 엑스레이처럼, 상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속을 찍어 기록한다. 그것을 엮어 ‘다큐멘터리’라고 부른다. 감독이 아니라 파파라치의 패턴이다. ‘현재’에도 동의를 구하지 않고 마테오를 찍고, 전처를 향해 “당신이 내 아버지의 돈을 노리지 않았다면 (내가 게이임을) 진작 알아챘겠지.”라고 말한다. 이기적이다. 후자의 경우 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부분이 있지만, 어쨌든 주니어는 끝까지 자신만 연민하고 변호할 뿐이다. 사랑했던 마테오와 함께 만들고 싶어하는 첫 픽션 또한, 오로지 제 이야기다. 다만 아버지처럼 ‘갖지 못하는 것을 망가뜨리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주니어의 영상이 감시가 아닌 진실의 가치를 발휘하는 순간은, 그 자신이 의도치 않게 카메라에 찍혔을 때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며 구급차를 부르는 모습, 그것 뿐이다.
여성들과 레나
주니어가 짝사랑하고 질투하는 방법은 관음과 기록이었다. 역시 마테오를 사랑하는 주디트의 방식은 다르다. 거리를 두고 헌신한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관계가 변할까봐” 디에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질투로 인해 에르네스토의 음모에 가담했지만, 책임을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딱 한 번 감정에 충실했던 대가로 십사년 동안 죄책감을 짊어졌다. 결국 그가 지켜낸 필름으로 마테오는 기억을 ‘고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고칠’ 수 없는 것은, 레나의 죽음이다.
1992년, 레나의 엄마는 병원에 데려가 준 에르네스토와 함께 멀어지는 레나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짐작하면서도, ‘호의’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후에 “장례식 비용을 대 준 에르네스토에게 감사한다”는 말로 재등장한다. 역시 페넬로페 크루즈가 연기한 <귀향>(2006)의 라이문다처럼, 레나 또한 생활에 치이나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라이문다가 엄마, 동생, 이모, 이웃 여성들의 도움을 받은 반면, 레나를 도운 여성은 없었다. 주디트는 질투해 음모를 방치했고, 그의 엄마는 상황에 굴복했다. 그들은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무엇도 하지 않았’다. 탓하기는 힘들다. 그들 또한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레나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 “내가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사고도 없었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는 주디트의 말은, 그에 대한 후회다.
마테오가 기억하는 법
제목은 ‘los abrazos rotos/ broken embraces/ 부서진 포옹’: 레나를 향한 에르네스토의, 애초에 부서진 종류의 포옹, 그리고 타의에 의해 부서진 레나와 마테오의 포옹이다. 마테오는 사랑과 사건에 휩쓸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마음 속은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처럼 쑥대밭이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죽이고 ‘해리 케인’ 속으로 피했다. 겉은 고요해 보여도 속은 소용돌이쳤다. 에르네스토가 죽고, 주디트의 고백을 듣고, 주니어가 사실 자신을 도왔다는 것마저 알게 되자, 그에겐 원망할 사람이 남지 않는다. 그제야, 주디트와 디에고의 도움으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디에고가 조각난broken 사진들을 붙이는 것과 마테오가 망가진broken 영화를 다시 편집하는 것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행위다. 마테오는 마지막 키스를 나누던 그때를 천천히 음미한다. 깨진broken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한다.
디에고는 “레나가 마지막으로 느낀 건 아저씨의 입술이에요.”라고 말한다. 레나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다는 뜻이나- 마테오, 남겨진 자만을 위한 위로다. 작품은 시간을 들여 ‘여인과 가방’의 장면을 담는다. 시작 또한 카메라에 담긴 배우들의, 레나의 모습이었다. 결국 레나는 영화 속에만 남는다. ‘보여지고’, ‘추억된다’. 그러나, 영화를 재상영해야 한다는 디에고의 말에 마테오는, “중요한 건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고, 나는 앞을 못 보더라도 영화는 끝을 봐야 한다.”라고 답한다. 이것이 ‘아티스트로서 작품을 완성하거나 명예를 회복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레나에 대한 존중’에 기반한 작업,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작업이라는 의미다. <나쁜 교육>(2004)에서 이그나시오가 남긴 글을 엔리케가 영화로 만들었듯, 마테오는 레나가 남긴 영화를 ‘올바르게’ 다시 편집한다. 산 자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하여도, 마테오가 레나를 기억하는, 기억 속에 살아 있게 하는 방법이다. 엔리케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경험한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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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도입부, 해리 케인이 쓰던 각본의 제목은 ‘페러렐 마더스Madres paralelas’. ‘여인과 가방’ 속 주인공이 이별 통보를 받은 후 보이는 행동은 <휴먼 보이스>(2020) 속 여자의 것과 유사하다. 수면제를 갈아 넣은 가스파초는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에 먼저 나왔다. <욕망의 법칙>(1987)에도 ‘휴먼 보이스’ 대본이 등장한 바 있다. 이렇듯 몇 년, 혹은 몇 십 년의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알모도바르의 -딱히 정교하진 않은- 세계관, 회수되는 ‘복선’들을 보는, 은근한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