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리쉬 피자>(2021)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2021,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만남, 알라나와 개리는 아주 달라 보인다. 나이도, 상황도. 알라나의 말을 빌리면; 개리는 “열 여섯에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자기 집을 가지고 있을” 사람, 알라나는 “서른이 되어도 틴에이저들 졸업 사진이나 찍어 주고 있을” 사람이다. 그러나, 둘은 닮았다. 개리는 외모와 분위기에 반해 다가갔지만, 어쩌면 그건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작품을 보며 두 사람의 나이 차이, 개리가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물론 걸렸으나- 픽션 상으로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었던 건, 나이와 상관 없이 지나고 있는 삶의 시기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하여 무엇을 더 ‘이루어’ 놓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개리는 스스로는 이미 어른인데, 열 다섯이라는 나이가 자꾸 발목을 잡는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하고 인맥을 쌓고 사업을 꾸렸다. 늘 확신은 있지만, 안정 궤도에 들어선 건 아니다. 이것저것 해 보는 중이다. 알라나는 불안하다. 늘 이 상태일 것 같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자꾸 뭔가 해야 할 것 같다. 그 또한 이것 저것 해 보는 중이다. 개리와 함께 사업을 하고 오디션을 보고 선거 자원봉사도 한다. 이 남자 저 남자 만나 보기도 한다.
알라나와 개리는 배우 재질이다. 변화하고 시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연기를 망설이지 않는. 그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물건을 팔고 사람을 만나고 파티를 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듯 일하고 논다. 함께 있음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들고, 그 사이 분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그들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감정에 집중할 수 없도록, 혹은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아주 아주 아주 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개리는 처음부터 알라나에게 들이대며 ‘내 와이프가 될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함께 하는 시간 동안 그 마음의 모양과 깊이는 달라졌을 것이다. “I’m cooler than you.”라고 말하는 알라나는 개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똑같이 ‘안 쿨’ 하다. ‘애들’과 어울리는 게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결국 자신이 딱히 개리보다 ‘어른’이 아님을,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아주 아주 아주 많은 사건을 오로지 로맨스의 관점에서 보면, 알라나가 개리와 사랑에 빠지는, 개리와 알라나가 완전히 서로가 서로의 사람임을 느끼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는 개리의 나이가 아직도 걸리지만, 픽션이니까.)
알라나는 ‘파이터’다. 랜스가 무신론자임을 알게 된 후, 랜스와, 그가 그것을 말하게 만들고는 ‘받아들이지’ 않은 가족들 모두에게 소리를 지른다. 개리가 경찰에게 끌려가자 따박따박 항의하며 따라가고, 경찰차를 따라 달려 결국 찾아낸다. 그가 풀려나자 꼭 안아주고 나서는,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대뜸 따진다. 개리가 전화 응대를 ‘좀 더 섹시하게’ 하라고 하자 정말로, ‘섹시하게’ 해 버린다. “모두 다와 싸우는 것 좀 그만 해.”, 다니엘은 말한다. 그게 알라나다. 그렇게 모두와 싸우는 것이 알라나다. 권력과 지위가 있는 이들 앞에서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입꼬리를 올리는 알라나는, 어딘가 우습고 어색하다. 메리의 말대로, 아닌 척 해도 그는 ‘잉글리시 불독’이다.
개리도 어쨌거나, 파이터다. 첫 장면부터 알라나에게 끈질기고 솔직하게 들이댄다. 공연에서 쫓겨날 게 뻔해도 ‘알라나를 위한’ 농담을 포기하지 않는다. 존이 ‘네 동생의 목을 조르겠다’ 고 협박하자, 바로 대응하진 못하지만 후에 복수를 하고 도망친다. 그들은 가만히 참는 사람들이 아니다. 관계에서도 그렇다. 서로에게 제 3자와의 연애 기류가 흐를 때면,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옆에서 얼쩡거리거며, 사나운 눈빛을 보낸다.
파워가 있는 남성들,에게 알라나는 보기 좋은 그림이다. 잭 홀든에게 알라나는, 옆에 앉아 예쁜 미소를 띄우고 제 이야기를 말없이 듣는 젊고 아름답고 재능 있는 ‘여’배우,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할 때 뒤에 딱 붙어 오토바이를 멋지게 모는 자신을 더욱 빛내 줄 요소다. 알라나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해도, 오토바이가 출발하자마자 뒤로 떨어져도,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왝스는 성 정체성을 감추기 위해 애인과의 자리에 알라나를 부른다. “아주 중요한 일이다”는 진심, 만약 알라나가 착각했듯 로맨스적 관심이 있었다면, 왝스는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지도, 실제로 그렇게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시대와 상황을 감안했을 때, 왝스의 케이스는 잭의 케이스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러나 알라나를 무엇으로 보는가는,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다. 알라나는 믿고 따른다고 여겼던 왝스보다 그날 처음 만난 매튜에게 더 공감한다. 잭과 왝스에게 사랑은 일순위가 아니다. 남자를 이용해 무언가 얻어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알라나에게 없는 건 아니나, 사실, 별로 그렇지도 않다. 잭 옆에 딱 붙어서도, 개리의 질투를 유발하는 데에 집중한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중요한 건 사랑이기 때문이다.
오토바이에서 넘어진 잭을 향해 달려가며 환호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 반대편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며 망가진 기타를 걱정하는 알라나. 그리고 그에게 달려간 유일한 사람인 개리. 너무도 분명한 장면이다. 경찰에 끌려가는 개리를 찾아 쉬지 않고 달리는 알라나가 겹친다. 마지막 씬을 통해, 작품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두 사람은 줄곧 서로를 향해 달렸다. 항상 서로만 바라본 건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서로를 구했다. 이 이야기는 어딘가를 향해 줄곧 열심히 달렸던 개리와 알라나가, 그 방향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개리와 알라나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지만, 알라나가 지나는 어떤 시기를 담은 영화이기도 하다. 트럭에 기름이 떨어졌을 때, 알라나는 트럭의 무게를 이용해 후진으로 차를 굴려 주유소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한다. 운전을 잘 한다고 하여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매일매일 맞서 싸우며 헤쳐 나갈 배짱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 하여, 마냥 괜찮은 것은 아니다. 일터에서 성추행을 당하고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듯. 개리는 그 상황이 지나가자 환호하며 알라나를 추켜세우지만, 알라나는 웃지 못한다. 파이터라고 하여 전부 단단한 심장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알라나는 열심히 달린다. 사랑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그 끝에 있는 것이 좀 실망스럽다 해도, 알라나는 또 달릴 것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2002)에서 배리는, 사랑의 힘으로 ‘세’졌다. 알라나와 개리도,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것들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게 <리코리쉬 피자>가 <펀치 드렁크 러브>보다 ‘재미있었던’ 까닭은, <펀치 드렁크 러브>가 오로지 배리의 입장에서 본 사랑 -누가 먼저 다가갔는지는 중요치 않다- 이었던 반면, <리코리쉬 피자>의 사랑은 개리와 알라나 모두의 입장에서 본, 양쪽의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이 포함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알라나의 삶과 마음을 중요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논란이 있지만)<팬텀 스레드>(2017)에 이어, ‘스스로의 입장과 감정’을 지닌 입체적 여성 캐릭터를 쓰려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노력을 보여 준다. 상당 부분은 배우 알라나 하임의 덕이다. 분명하게 말하고 열심히 싸우는 알라나의 강하지 않은 순간들을 포착해, 거칠고도 섬세하게 드러내는 그의 얼굴은, 색색의 거리와 달리기와 롱테이크와 올드팝 속에서- 심지어 석유 부족 이슈마저 로맨틱하게 만드는 추억과 사랑의 에너지를 두른 채, 70년대와 현재를 잇는 색으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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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팬텀 스레드>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언젠가는 영화관에서 볼 기회가 있을 것 같아 기약 없이 미루고 있다. 해당 작품에 대한 수식은 비키 크리앱스의 인터뷰[By Steven McIntosh, bbc.com]를 바탕으로 짐작한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