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2008)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Brideshead Revisited)>(2008, 감독: 줄리언 재롤드)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랍스터>(2015), ‘근시 남자’는 짝을 찾기 위한 호텔에 입소하며 ‘성적 선호’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남자는 ‘여성’이라고 답했다가, ‘남성과 잔 적이 있다’며 양성애 옵션을 묻는다. 12년 동안 여성과의 결혼을 유지했다는 까닭으로 동성애를 ‘페이즈’로 넘길 수는 없는 것이다.(정말 ‘페이즈’였다면 본인이 알았을 거다.) 그러나 직원은 ‘운영상의 문제로 해당 옵션은 금지돼 있다’고 말하고, 언짢아하며 답을 않던 남자는 마지못해 ‘이성애’를 택한다. 디스토피아적 우화 속 괴상한 호텔에서만의 얘기가 아니다. 현실이나 현실적 픽션 속 양성애는 이처럼 ‘편의상의 이유’로 쉽게 지워지고, ‘지나가는 단계’나 ‘선택의 유예’로 치부되곤 한다.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2008)의 주인공 찰스 라이더를 평가하는 작품 안팎의 말들은 이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그를 바이섹슈얼 남성의 왜곡된 초상으로 봤다. 그려진 상을 비판하기 위해 ‘의도된 왜곡’이라면 창작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해석이겠고, 아니라면 작품의 시선 자체가 그를 왜곡하는 것일 테다.
세바스찬 플라이트의 선언
세바스찬은 ‘남색가’라는 수식과 함께 처음 등장한다. 한 손에 술잔을 든 채 고개를 한껏 젖히고 햇살을 음미한다. 다음에는, 대뜸 토하고 사라진다. 이후 그는 타인의 편견과 취기가 뒤튼 첫인상을 자신의 언어로 재정립한다. 꽃다발과 편지, 테디 베어, 행복에 대한 의심과 함께. 그는 종종 현재를 이미 과거로 추억하며 거기 머무르고 싶어한다. “행복했던 장소에 금을 가득 파묻고 나중에 늙고 비참해졌을 때 열어보고 싶어.” 그의 행복에는 늘 그렇게 우울이, 미래의 불행에 대한 확신이 있다. 자신을 예술가라고 수식하는 찰스의- 그림을 그리는 까닭에 대한 설명(‘완벽한 재현이 아닐지라도 단순히 카피가 아니라, 느낌에 대한,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은, 삶의 장면들을 대하는 세바스찬의 태도와 닮아 있다. 어쩌면 뱉은 본인보다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세바스찬은 마음을 쌓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키스했을 때- 찰스는 멍하게 달떴고, 세바스찬은 거절당하지 않았음에도 어쩐지 체념을 내비쳤다. ‘이 이상을 요구할 수 없음’에 대한 예감이다. 자신의 가족과 걷거나, 줄리아와 키스하는- 찰스를 바라보는 실루엣은 너무나 고독하다. 세바스찬은 끊임없이 외로워하고 고통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이기를 멈추지 않으며, 동정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가족들이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되길 바란다면, 아주 헤비한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주겠어.”, “당신들 다 싫어.” 엉망으로 떨리면서도- 저들의 ‘선의’에는 흔들리지 않기를 선언하며 스스로 망가지고 고립된다. 끝까지 연민 되기를, 누군가의 죄책감이 되기를, ‘구원’되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존재를 평생 부정해온 상대-어머니를, 죽어간다는 까닭으로 용서하지도 않는다. “이제 이게 내 삶이야.” 결국 모로코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그는, 몹시 연약해 보임에도 평온하다.
찰스 라이더에 대한 해명
세바스찬은 찰스를 사랑했다. 허면 찰스는, 그의 감정은 무엇이었는가. 작품에서 그의 이성애와 동성애는 확연히 다른 무게로 인식된다. 줄리아의 경우, 눈빛만 교환해도 가톨릭-무신론자 간의 ‘금지된 사랑’으로 여기며 갈라 놓는다. 그러나 세바스찬과의 관계는 아무리 친밀하고 ‘의심스러워’도, ‘영국식 로맨틱한 우정’(카라)으로 수식된다. 레이디 마치메인은 오히려 ‘당신 같은 믿음직한 청년이 아들 곁에 있어야 한다’며 권장하기까지 한다. 비교적 ‘자유로운 어른’인 카라조차, ‘네겐 페이즈phase, 불쌍한 세바스찬에겐 그 이상’이라고 말한다. ‘실질적 관계의 형태 유지’의 관점에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찰스는 행동으로 책임질 수 없기에 반박하지 못하지만, 그렇다 하여 감정 자체를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으로 단정 짓고 세바스찬을 동정하는 태도는, ‘선의’의 혐오다.
찰스 라이더는- 부당한 오해를 받는 바이섹슈얼 남성이다. 그에 대해 타 인물들이 던지는 비난 혹은 비난조의 질문은, 양성애자의 성적 지향을 왜곡해 온 일부 비양성애자들의 언어다. ‘그저 페이즈’라거나, ‘사랑 받고 싶어 안달이 났다’거나, ‘원하는 게 대체 뭐냐’거나,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거나 ‘편을 택하라’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찰스는 상대가 틀렸음을 확신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했던 걸까?”라고 자문한다. 그 평가들이 정당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정의할 말을 알지 못해서다. 어느 정도는 세바스찬에 대한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는데- 무책임하게 평가만 해대는 저들과 달리 그를 진심으로 위하기 때문이다.
찰스는 첫 만남부터 세바스찬에게 끌렸다. 다만 줄리아에게 더 끌렸을 따름이다. 남성 간 사랑을 금하는 사회의 ‘룰’에 익숙했기에 애초에 우정으로만 접근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결코 상대를 가벼이 여기지는 않았다. 그가 한 유일한 잘못은 세바스찬을 ‘배반’한 것이고, 그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 (꾸준히 존재를 부정당하던 세바스찬에게 줄리아와 찰스의 키스는 단순히 ‘배신감’ 이상의 상처를 남겼을 것이고, 찰스는 이를 감정적으로나마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남성이기에, 세바스찬이나 안소니보다 비교적 당시 사회에 ‘fit in’ 될 수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드므로, 안소니가 표하는 적의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이 그의 양성애를 ‘끝없는 욕심’으로 매도하거나, 세바스찬에 대한 애정을 삭제할 명분이 되진 않는다.
찰스는 ‘너무 많은 것을 원한 것’도,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몰랐던 것’도, ‘사랑에 굶주렸던 것’도 아니었다. 순간에 솔직하며, 협박이나 회유에 휘둘리지 않았다. 어느 한쪽에 속하려 애쓰지 않았다. 처음 예배당에 갔을 때, 자신을 따라 하며 “Just to fit in.그냥 너한테 맞추려고.”이라던 찰스에게, 세바스찬은 “Well than don’t!그럼 하지 마!”라고 단호히 말했다. 이후 찰스는 그 조언에 충실하게 행동했다. 식사 기도를 하지 않았고, 무신론자임을 떳떳이 밝혔고, 성 지향성에 대한 주변의 ‘의심’을 해명하지 않았고, 사랑을 위해 개종하지 않았고, 세바스찬의 감시자가 되기를 거부했고, 그에게 끊임없이 다가갔고, ’작은 자유‘를 도왔고, 끝까지 그를 지지했다.
기억의 ‘재방문’
세월이 흐르고, 찰스는 우연히 재회한 줄리아와 확신에 찬 사랑을 나눈다. 그 정서는 세바스찬이 파묻고 싶어 했던 ‘추억의 금무더기’나, 찰스가 그림으로 붙잡는 ‘순간의 느낌에 대한 표현’과 닮아 있다. 줄리아와 함께하기 위해 렉스의 ‘흥정’에 응하며, 그는 처음으로 ‘타협’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내와의 만남은 줄리아의 결혼 이후이며, 그 과정이 자세히 나오지 않으므로 ‘전략’으로 단정 짓기 힘들다.) 이 행위는 찰스가 -의식했든 그렇지 않든-타협(fit in)하지 않던 과거의 그가 아님을, 그 시절은 이제 가버렸음을 뜻하며, 행복에 대한 환상에 균열을 낸다.
결국 줄리아는 브라이즈헤드에 남고, 찰스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했어.”라며 포기한다. 앞서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다’고 찰스에게 말하던 세바스찬이 떠오른다. 전자가 찰스에 대한 줄리아의 사랑을 부정하는 문장이 아니듯, 후자 또한 세바스찬에 대한 찰스의 사랑을 부정하는 문장이 아니다. 감정 자체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실질적 관계의 형태 유지’에 관한 이야기다. 찰스가 세바스찬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듯, 세바스찬 또한(어쩌면 그만이) 자신에 대한 찰스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원하는 바는 달랐을지 몰라도, 서로를 진심으로 대하며 존중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찰스를 오히려 위로하며 세바스찬은, “(브라이즈헤드에서) 멀리 도망가서 절대 뒤돌아보지 마.”라고 조언한다.
로드 마치메인은 ‘내 자녀들을 아내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브라이즈헤드로 돌아가 성호를 긋고 죽는다. 브레들리와 코딜리아는 애초에 벗어날 생각이 없었고, 줄리아 역시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며 자발적으로 그곳에 묶인다. 세바스찬은 유일하게 돌아가기를 거부한 자다. ‘나는 죄인’이라고 자조했던 그가 지은 죄는 오로지 자기파괴였다. 타인에게 진 ‘빚’이 없으므로- 아마 끝까지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널브러진 곰인형은- 삶을 ‘포기’했음이 아니라, 비로소 브라이즈헤드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뜻한다.
구시대 가톨릭의 마지막 유물과도 같았던 브라이즈헤드. 애초에 그곳에 속하지 않은 관찰자,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적 연극의 목격자였던- 찰스는, 군복을 입은 채 그곳으로 돌아가, 세바스찬이 싫어했던 그림이 천으로 가려지는 것을 지켜본다.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라도 하려는 듯 손가락을 적신다. 사실 그것은 촛불을 끄기 위함이었고, 이내 세바스찬과 줄리아를 차례로 떠올리고(각 회상은 대칭적이다.) 그만둔다. 말도 안되는 ‘신’을 지워버리고 싶음에도, 일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과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는 제스처다. 세상이, 작품마저 -어쩌면 그 자신조차-, 세바스찬에 대한 감정을 오로지 ‘아름답고 로맨틱한 우정’으로 얼버무리더라도, 그의 마음 속에 ‘가득 담긴 금’은 절대 그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