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에 탄 소녀>(2021)
<불도저에 탄 소녀>(2021, 감독: 박이웅)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혜영은 별로 ‘한없이 선한 주인공’은 아니다. 늘 화가 나 있는 그의 일상적인 무례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 정도다. 하지만, 그 끝없이 끓어오르는 분노의 힘과 깡이 그나마 이 ‘비극’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혜영이 유독 눈을 부릅뜨는 대상들은 주로 상대적 강자, 집단폭력을 행사하던 고등학생 무리나, 비웃으며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형사 같은 이들이다. 어린 여성인 그가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식일 수 있겠다. 팔에 용 문신을 한 채 중장비를 몰고 주먹질을 하는 등- ‘강한 남성성’의 표식들을 깡마른 몸에 두르고, ‘누구 하나 건드려 봐’라는 태도로 ‘깡패’를 자처한다. ‘여자는 이 업계에서 일하기 힘들다’고 ‘자상하게’ 조언하던 강사 앞에서 보란 듯이 능숙하게 기계를 운전하고 박수를 받는 모습은 꽤나 통쾌하다.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공적인 가부장’이 되지 못한 본진에 대한 반발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그는 ‘무능’하고 ‘무른’, 제 도박 중독의 결과로 아내를 잃은 데다 동서에게 보증을 부탁한 전적마저 있는 남자다. 처음의 혜영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부 아빠 탓으로 여기며, 그로부터 비롯된 분노를 굳이 억누르지 않으며 지내고, 그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사고 이후 본진이 겪은 것들을 서서히 파악하게 되면서, 사실 ‘무능’은 그의 탓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중장비 회사에서 일하던 본진이 중국집을 운영하게 되기까지의 서사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최 회장이 선심 쓰듯 던져 준 ‘놀던 땅’은, 어떤 ‘무난한’ 해고의 방법이었을 수 있다. 선거 출마와 함께 권리금을 챙기기 위해 약속을 어기고 조카에게 건물 운영을 넘긴 행동은 ‘영리했다’. 가진 자는 그렇게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갈수록 지독하게 치밀해지고, 없는 자들은 궁지에 내몰려 점점 이성적인 판단을 포기하고 헛된 희망만 좇게 된다. 그가 경마에 중독된 계기나 과정은 알 수 없으나, (물론 그것은 자신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 고통을 안겼고, ‘정상참작’엔 한계가 있다.) 어쩌면 가난한 이들이 ‘자수성가’로 부자가 될 가능성은 도박으로 목돈을 벌 가능성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을까. 지갑에 잔뜩 있던 복권 종이들은 빚에 허덕이던 그에게 있어 가장 손에 넣기 쉬운 일시적 위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그 정도로 몰렸으니 앞날을 계획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을테고, 본진은 마침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지도 모르는 죽음을 고려하게 되었을 것이다.
본진이 휘두른 칼은 그 사무실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는 리셉션 직원을 해한다. 자주, 저항하는 약자와 최전선에서 부딪히는 건, 반대편에 선 약자가 된다. 강자들은 가장 안쪽의 방에서 지시를 내리거나 깨끗한 얼굴에 미소를 띄울 뿐이다. 적어도 혜영은, (이 작품 속에서)권력의 정점에 있는 최 회장에게 돌진하기를 반복하며 그가 ‘우아함’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선거 캠페인 중이던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거나, 집으로 쳐들어가 휘발유를 뿌린다.
그렇게 혜영은 주로 눈앞의 것에 달려드는 식으로 헤쳐나간다. 대뜸 찾아가 공격적으로 묻고, 소리를 지르거나 주먹을 쥐고, 가위나 칼을 들이대기도 한다. 계속해서 법을 어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가만히 있더라도 ‘법’이 딱히 자신을 보호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서다. 약자들은 늘 이모부처럼 ‘말을 잘 들으며 떡고물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현실을, 아빠로부터 벗어나더라도 뿌리깊은 시스템적 불평등과 합법적 갑질들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약자가 부당한 현실에 순응하지 않기 위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대개 ‘불도저’에 대응되는 것들이며, 그렇게 고래고래 내질러야만 목소리가 겨우 세상에 닿는다는 것을, 작품은 극단적으로 드러낸 것일 테다. 혜영이 본진의 사망보험금 이나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범죄로’ 인해 그가 주목되고 겪은 일이 알려졌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혜영이 ‘다 해결’하는 결말을 기대했다면, 애초에 그건 불가능했다고 말해야겠다. 그는 강하고, 깡이 있고, 끝없이 몸을 부딪히지만, 벽은 단단하다. 자살/사고 여부를 판단하는 지표 중 하나는 ‘사망보험금 가입’. 익숙한 정보다. 새삼 자본주의 사회다. 법의 안전망은 허술하다. 아빠가 의식을 잃자 겨우 스물이 된 혜영에겐 끊임없이 전화가 걸려 온다. 보험사 직원, 형사, 가게 인수자, 사고 ‘피해자’, 가게 직원 등 수많은 사람과 절차들을 상대해야 하고, 그 모든 것을 ‘개인의 힘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에겐 ‘본인 과실로 차에 치이고도 보험사를 통해 합의금을 요구해 줄’ 보호자가 없었다. 스스로 자신과 가족의 보호자가 되어야만 했다.
본진의 죽음 후 혜영이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것은 다름 아닌 ‘내 것이 아닌 내 집’, 이미 없어진 삶의 터전이다. 그가 잃어버린 것들이 실물의 형태로 폭로된다. 직후 그는 최 회장의 집을 똑같이 밀어버리려는 시도를 한다. 가족과 집을 앗아간 그에게 표면적으로나마 유사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행위다. <킬링 디어>(2017), 마틴은 스티븐의 팔을 물어뜯은 후 ‘둘 다 괜찮아지려면 방법은 하나 뿐’이라면서 자신의 팔을 물어뜯었다. ‘이것이 그나마 정의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물론 이는 란티모스식 디스토피아의 극단적 법칙이었으나- 혜영이 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몸부림 역시 그런 식으로 ‘한 번이라도 물어뜯는’ 것뿐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잠깐이나마 ‘당신도 안전하지 않은 기분을 느껴 보라’는 발악이다.
아마 본진으로부터 모는 법을 배웠을- 불도저에 혜영이 오르는 것은, 뒤늦게 ‘아빠의 유산’을 잇는 상징적 제스처로 볼 여지가 있지만, 별로 내키는 해석은 아니다. ‘네 아빠가 고생할 때 너는 무얼 했느냐’는 식의- 최 회장과 이모부의- 말에 혜영은 흔들렸다. 죄책감을 자극하고 아빠에 대한 ‘애틋함’을 키우려는 장치로 보이지만, 부당한 질문이다. 아빠가 경마에 빠진 후 엄마를 잃은 십 대가 가족을 위해 더 뭘 했어야 한다는 걸까? 물론 작품이 ‘혜영의 탓’을 한 것은 결코 아니나, 돈을 따로 모으기도 하며 그토록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혜영이 결국 스스로 ‘구본진씨 보호자’라는 말을 뱉게 만드는 전개는 씁쓸한 물음표를 남겼다.
물음표를 던질 여지 없이 훌륭했던 것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퍼올리다 필요한 순간 섬세하게 무너지며 홀로 극을 이끈 김혜윤 배우(+못나고 비참해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박혁권)다. 혜영의 순간들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몰아대며 클로즈업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몇 씬에서 들기는 했으나- 김혜윤의 표정을 되도록 다양하게 담기 위한 욕심이었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의 구혜영에게서는- 역시 용 문신을 새긴 채 무표정으로 오토바이를 몰거나 강간범의 가슴에 복수의 낙인을 새기던 루니 마라의 리즈베트 살란데르가 얼핏 겹치기도 했다.(<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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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최영환의 ‘악마성’과 구혜영의 ‘깡’ 이라는 캐릭터의 특수성에 의지해 사회적 문제를 훑어낸다. 이 과정에서 구본진이 착취자 최영환에 가려져 단지 ‘피해자’로 다루어진 것이 불편했지만, 그의 ‘사정’을 짐작하고 서술하려는 시도를 하게 만든 것은 위에도 언급했던 박혁권 배우의 연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