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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20. 2022

예민한 로맨티스트에게 건네는 응원

<녹색 광선>(1986)



 

<녹색 광선(Le rayon vert)>(1986, 감독: 에릭 로메르)

 

*  작품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사건 없이 델핀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며 당사자도 완전히 다 알지 못하는 감정의 흐름을 표현하는 데에 집중하는 <녹색 광선>은, 누군가에겐 정말 ‘이상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말할 때 눈동자나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쉽게 긴장하거나 우울해하며 웃음이나 울음을 참지 못하는 델핀 역시 유별나고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외롭다면서 남자를 경계하고, 괜찮다면서 울고, 휴양지에 데려가 달래놓고 재미없어하고, 사람들이 하자는 건 싫다고 하고, 식성도 ‘까다롭고’, 무엇에도 금방 질려하는 듯하다. 우연히 주워 들은 말이나 행운의 색 따위를 믿기도 하는 그는, 닿을 수 없는 이상을 추구하며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에 늘상 좌절하며 사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런 델핀을 향해 가족, 친구, 친구의 친구, 처음 보는 사람 할 것 없이 끊임없는 말들을 건넨다. ‘남자를 만나라’는 조언, ‘고기를 안 먹으면 건강은 괜찮냐’는 물음, ‘슬프면 같이 춤을 추러 가자’는 제안들엔 악의가 없다. 오히려 선의가 가득하다. 그러나 거기엔 대개 델핀의 표현대로 그를 ‘비정상’이라고 여기는 평가가 내포돼 있다. 그래서 델핀은 뭔가를 숨기는 법을 아직 배우지 않은 어린이들과 더 ‘잘 맞아’ 보이기도 한다. 판단하거나 ‘도우려’ 하지 않고, 질문을 하더라도 솔직한 호기심을 내비치는 것뿐인.

 

<녹색 광선>(1986)


해변에서 만난 레나는 ‘상대를 알아가려면 일단 자신을 숨기고 다가가야 한다 말한다. 그는 스페인/독일/영국인이 되어 가며 처음 만난 이와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즐거운  하다 보면 진짜로 즐거워지는”(-후지타 유마, 2016, <분노>)- 델핀에겐 그것이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가 매번 모난 돌이 되고 마는 것은  진심이라서다. 사교적 가면을 쓰고 ‘필요한연기를 하며 어울리지 못한다.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표정에 드러난다. 육식이나 꽃을 꺾는 행위에 대해서도 대강 넘기지 못하고 솔직한 의견을  버린다. 마음이나 생각을 최대한 그대로 설명하려다 말이 장황하게 늘어지기도 하고, 차라리 아무  않기를 택하기도 한다. 항상 표현이 일관된 것은 아닌데, 쑥스러워하다 경계하거나 심각하게 이야기하다 미소를 짓곤 한다.  피에르와 헤어졌다고 했다가, 그를 연인이라고 일컬었다가, 며칠 후엔  연인이 없다고 말한다. 그중 거짓말은 없다. 진심이나 진짜 감정은 하나의 단어나  컷에 담긴 표정으로 요약될  있는 것이 아니어서다. 그것은 고여 있는 못보단 주변의 모든 것에 영향을 받으며 흐르는 강에 가깝다.

 

프레임엔 녹색 카드, 녹색 자동차, 녹색 , 녹색 타올 같은 녹색 소품들이 종종 들어온다. 델핀이 말한 행운의 색이라는  정말 있었던 걸까? 어쩌면  녹색들은 의식하고 있어서 눈에 들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델핀이 포기하지 않고 때로  견뎌하며 이곳 저곳을 오가며 찾아 헤매었기에 우연들이 이어져 비로소 녹색 광선을 맞이할  있었던  아니었을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 관계를 시작하기를 두려워하기에 언뜻 용기가 없어 보이지만, 달리 보면 델핀은 진심을 먼저 내보이고 상대의 진심을 바랄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녹색 광선>(1986)


델핀은 구체적 형태가 있는 연애가 아닌  모양이 모호하고 변하기 쉬운 로맨스를 추구한다, 서로의 진심을 공유하는. 마지막 순간 델핀은 녹색 광선을 ‘증거 확인한  관계를 시작하기를 원하고, 끝내 그것을 목격한다. 녹색 광선 역시 빛의 굴절로 인해 순간적으로 눈이 포착하는 것이지, 어떤 ‘실체 있는  아니다. 그러나 실체가 없다 하여 거기 없는  또한 아니다.  

 

델핀은 녹색 광선과 함께 시작된 관계에서  실망을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내 외로움과 공허를 느끼더라도 녹색 광선의 순간들을 기억하며, 그리고 기다리거나 찾아다니며 삶을 견딜  있을 것이다. 작품이 마지막 순간 델핀에게 녹색 광선을 ‘보여준것은, 누군가에겐 뜬구름잡기처럼 보이는 낭만과 진심을 찾는 행위에 대한, ‘내성적이고 예민하고 솔직한’, ‘로맨스를 믿는사람들을 향한 응원 같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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