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않인 May 23. 2022

남은 자들의 내일

<매스>(2021)



<매스(Mass)>(2021, 감독: 프란 크랜즈)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 초반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고 대칭적인 프레임에 교회의 안팎 공간을 담는다. ‘주인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집사 주디는 초조하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관객은 그와 함께 긴장하며 앞으로의 전개를 추측하게 된다. 극영화 관객은 (대개 주인공인) 화자에 이입해 관람하는 경우가 많은데, <매스> 속 네 주인공/화자의 경험은 특수하면서 매우 현실적이기도 하다. 어쩌면 감독은 유사 경험을 하지 않았을 대다수의 관객이 감히 이들에게 이입해 작품을 ‘한 편의 이야기’로 섣불리 소비,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래서 먼저 이입할 만한 관찰자를 제시해 ‘주인공’들을 바라볼 포지션을 정해 주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매스>(2021). 왓챠피디아.


네 사람이 방에 들어와 테이블에 자리한 후의 컷은 주로 그중 한둘의 바스트숏 혹은 숄더숏이다. 한 부부에 초점을 두고 반대편 부부의 뒷모습 일부가 흐릿하게 프레임에 들어오도록 하거나, 이쪽의 등과 저쪽 대각선에 앉은 이의 얼굴이 들어오게 하는 등 화자에 따라 프레임은 정교하게 조절된다. 그들은 안부를 묻고 선물을 건네기도 하지만, 그 말과 행동엔 과거형 서술이나 순간적으로 굳어버리는 공기 등 내내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


대화에 사건의 정황이 언급되기 전부터 관객은 어떤 ‘사실들’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경우 짐작할 수 있었다는 건, 그러한 일들이 현실에서 꾸준히 있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mass shooting’은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이슈다. (미국에서는 올해 이미 200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15일자 버팔로 건 관련 NPR뉴스 기사에서 198건이었고, 이후 2건 더 보도되었으니. [참고: gunviolencearchive.org]) 레이시즘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도 여럿이며, 제이의 말처럼 총기와 떼어 놓고 볼 수 없는 사건이기도 하다.


작품 속 가해자 헤이든의 경우 소수자 혐오와 집단적 괴롭힘을 겪었음이 부모의 입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여기엔 하나로 단정하기 힘든 사회적 이슈들이 얽혀 있는 듯하다. 사건의 ‘원인’을 대체 어디서부터 파악해야 할까? 태어났을 때부터 가진 ‘남다른 예민함’?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청소년기의 따돌림? 건 슈팅 게임을 즐기던 또래 무리와의 어울림? 그것들이 그에게 어떻게 작용했는지는 살아있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어떤 ‘원인’도 폭력을 ‘이해’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제이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수단’을 치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매스>(2021). 왓챠피디아.


작품은 그러한 측면들이 대화에 포함되도록 하되 질문으로 남기고, 남은 자들의 개인적 ‘치유’에 초점을 맞춘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결과적으로 그 방법이 된다. 관련 기사나 린다 부부가 받은 메일, 아들들의 사진 같은 물리적 ‘증거’ 없이 오로지 네 사람의 대화를 통해 사건을 다룬다. <매스>는 가해자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혹은 피해자가 살았던 삶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산 자들이 남은 날들을 살기 위해 고통스럽게 마음을 꺼내놓는 과정이다. 분리되어 담기던 그들이 한꺼번에 대칭적으로 프레임에 들어오는 순간은 게일이 “당신 아들이 우리 아들을 죽였잖냐”는 대사를 한 직후다. ‘상담사가 취조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에 담긴 속뜻은 ’사실 취조하고 싶다‘는 것이었을 테다. 서서히 숨어 있던 감정이 화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균열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균열이 보이게 된 것, 그것은 부부와 부부 사이 뿐 아니라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도 종종 발생한다. 여전히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헤이든이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는가’를 집요하게 묻는 제이를 따라가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그 흔들림은 멎지 않는다.


제이는 ‘악마의 소행’이었다는 교회 측 워딩에 분노했다. 그러나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것 아닌가’라는 그의 물음은 어떤 면에서 그 ‘악마론’과 닮아 있다. 리처드와 린다는 ‘헤이든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며, 내내 고통 받았다’고 반박한다. 헤이든이 고통 받았다 하여 그의 폭력을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하여 ‘납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범죄를 행하지 않은 인간을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았다는 까닭만으로 낙인찍어선 안 된다고 말하는 픽션들의 예를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 날선 대화를 작품은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끔찍한 의문과 짐작, 뒤엉켜 고여 있던 감정을 모두 꺼내 서로 부딪히는 것. “헤이든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은 더 평화로웠을지 모르지만 내 삶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와 같이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대사들도, 꺼내 놓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매스>(2021). 왓챠피디아.


십자가가 중앙을 가르도록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있던 네 사람은,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 물리적으로 멀어진 채로 속내를 보다 가까이 털어놓는다. 게일이 에번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 린다는 게일이 앉았던 의자에, 리처드는 제이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귀를 기울인다. 타인의 ‘의자에 앉는다’는 티나게 상징적인 연출임에도 그 의미는 퇴색되지 않는다. “당신들을 용서하면 아들을 영영 잃을까 두려웠다”던 게일은 ‘당신들을 그리고 헤이든을 용서한다’고 말한다. 그 용서는 사실 그들의 몫이 아님을(신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자신들도 알고 있을 테다. 그건 <프라미싱 영 우먼>(2020)에서 캐시가 변호사를 ‘용서’했던 것처럼, 그들 자신과 상대의 내일을 위한 제스처가 아니었을까. 십자가와 테이블이 없는 한구석에서 마침내 네 사람은 ‘마지막 모먼트’를 가진다. 이후 서로를 대하는 예의는 초반의 그것과 표면적으로는 닮아 있지만, 다르다.


린다 부부의 말처럼- 헤이든을 피해자들과 함께 애도할 수는 없지만, 린다와 리처드 역시 자녀를 잃은 부모다. 애도의 정서나 행위는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연히, 유사할 수 없기도 하다. “어떻게 부모인데 모를 수 있느냐”고 게일은 갑갑해했지만 현 시점에서 린다와 리처드가 ‘좋은 부모’ 였는지 판단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들이 털어놓는 말들에는, 범죄를 ‘잘못 키운 탓’으로 돌리지도 반대로 부모에게 면죄부를 주지도 않으면서 그 복잡한 회한과 고통을 담아내려는 작품의 노력이 비친다. “가장 외로울 사람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과 아들의 과거를 되새기고 기억을 재구성하며 후회하고 의문을 던져야 했으리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걸 다르게 했다면 달랐을까, 애도의 정서마저 온전히 느끼지 못했으리라. 마지막 순간 “그때 날 때리라고 했어야 했다”며 괴로워하던 린다, 그리고 리처드는, 남은 평생 거기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을 테다.


<매스>(2021). 왓챠피디아.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이 어느 정도 ‘같은 것’을 겪었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르기는 하나) 일본 드라마 <그래도, 살아간다>(Fuji TV)와 같은 작품들에서 이미 언급한 바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 딜리버리는 까다롭고 어렵다. 조금만 삐끗하면 ‘틀릴’ 수도 있는 그 메시지를 <매스>가 단 한 번의 대화로 풀어나가는 방법은 상당히 크리스천적이면서도 또 그렇지만은 않다. 결국 일방향으로 수렴하는 듯한데도 미세한 위화감이 비친다. 작품은 그 미묘함을 ‘마지막 모먼트’를 함께하며 끝내 눈을 감지 않는 리처드의 머뭇거림과 이후 그를 응시하는 린다의 눈빛에 담았다. 사실 ‘치유’ 된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 끔찍한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불가능할 것이며 애도는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어야 할 테지만, 그 대화를 나눈 그들은 내일을 ‘그래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예민한 로맨티스트에게 건네는 응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