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우>에서 <티탄>으로, 줄리아 뒤크루노의 ‘뉴 몬스터’들
* 언급하는 작품들의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에 몸과 성적인 정체성(들)에 대한 논의의 층위는 하나일 수가 없다. ‘젠더와 섹스는 구성되었다’는 아이디어가 발전하며 미국의 경우 ‘경계를 흐리는’ 꾸밈이나 ‘they/them’ 프로나운스pronouns의 사용이 ‘보편화’되기도 했는데, 한편으론 가시화된 퀴어피플이 혐오범죄의 타겟이 되거나, 주로 트랜스 청소년을 겨냥한 퀴어혐오적 법안들이 각 주에서 발의/통과되고 있어 ‘정체성의 권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의 경우 공적인 자리에 있는 이가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괴상한 표현을 쓰거나 ‘전환치료’(…)를 긍정한다고 발언하는 현실. 이런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에 여전히 이성애규범에 충실한 픽션들이 범람하는 와중, ‘여성영화’와 ‘퀴어영화’를 다루는 글에서 몸에 대한 이야기를-억압된 여성의 몸/소수적 정체성/젠더와 섹스의 구분에 대해- 어디부터 어디까지 해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무겁다. 그러나 자꾸 고민하고 발화하지 않을 수도 없다. 각자의 방식을 통해 경계를 훌륭하게 넘나드는 작품 역시 어느 때보다 넘쳐나는 시기이고, 그만큼 다양한 결의 이야기가 오갈 수 있을 테다.
아리 에스터의 <유전>(2018)을 “소녀의 몸에 갇힌 남성, 찰리/파이몬의 FTM 트랜지션 서사”-“시스cis적 시선으로는 한 가족을 파괴하는 공포스럽고 트라우마적인 과정”-로 해석한 당해 기사(Sasha Geffen, 2018.08.21. [them.us])를 읽고, 어쩌면 ‘규준에 맞지 않는’ 몸들을 에일리언화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사용해 왔던 호러무비야말로 몸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줄리아 뒤크루노는 이를 잘 알고 있는 스토리텔러인 듯하다. 가랑스 마릴리에와 아가타 루셀의 실루엣은 ‘미디어 노말’한 편이나, 뒤크루노는 거기에 ‘괴물’의 성질을 부여한다.
글의 초기 아이디어는, <델마>(2017)와 <로우>(2016)를 중심 축에 두고 <티탄>(2021)과 <이노센트>(2021)를 참고해 에스킬 보그트의 ‘마녀들’과 줄리아 뒤크루노의 ‘괴물들’에 있는 유사성과 가능성을 분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들여다볼수록 표면적 설정만으로 두 작품을 같은 선상에 두기로 마음먹은 얕은 사고흐름에 대한 부끄러움만 커졌다. 영화적 장치나 서사, 설정에 대한 설명으로만 넘길 수는 없는 종류의 차이였다.
그리하여 이 글의 본문은 <델마>로 시작한다. 그 완결되는 성장 내러티브를 요약하고, 비교를 통해 <로우>의 특징을 설명한 뒤 감독의 다음 작품인 <티탄>으로 이으며, 줄리아 뒤크르노가 스크린에 데려온 평범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괴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들어가기 앞서, 비교의 수단으로 사용한 탓에 <델마>를 단독적으로 깊게 묘사하지 못한 데에 아쉬움을 표한다. 이는 글의 초점이 뒤크루노에 있었기 때문이며, <델마> 역시 비범한 매력과 개성을 지니는 작품이다. 어느 것이 ‘더 좋았다’는 순위 매기기의 목적은 없다.
<델마>의 완결되는 (역)성장 내러티브
탈피와 함께 ‘뉴 페이즈’로 넘어가는 쥐스틴과 달리 델마가 겪는 것은 능력의 재발현, 통제의 공간에서 벗어나 사랑의 경험을 하며 이루어진다. 그 트리거가 되는 애정이 동성을 향한다는 설정은 의도적이다. 이성애였다면 능력이 부정denial의 방향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키스와 함께 아냐에 대한 욕구가 성적인 것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았을 때 델마는 눈물을 흘리고 구역질을 한다. 욕망/그에 대한 억제가 부딪혀 신체의 반응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몇 장면을 통해 그의 종교적인 바탕이 동성 간의 로맨스를 ‘잘못’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성장’을 위해서는 세뇌된 편견을 깨고 능력과 욕망 모두를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병원에서의 발작과 함께 델마는 ‘문제거리’인 아냐를 가둔다. ‘세계’와 충돌하는 욕망을 부정하기 위해 그 대상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일시적 ‘해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평온을 얻는데, 이는 거짓을 바탕에 둔 순응,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본성을 거슬러야 한다. 그 ‘부정’은 이제껏 부모가 그를 다루어 온 방식과 유사하다. 가부장에 의한 가스라이팅이 반복되는 와중, 무력한 어머니의 불안과 연약함은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다르고 뛰어난 여자들’을 두려워하고 억압해 온 남자들과 수동적으로 복종해 온 ‘마녀 아닌’ 여자들. 델마에겐 집으로 돌아가 그 근원을 해체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는 ‘비밀과 역사에 대한 인지’+‘follow your heart’가 만나 홀로 이루어내는 각성이다.
델마가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seizure’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시청한 영상은, ‘seizure’라는 단어에 ‘초자연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언급한다. 작품은 델마를 통해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거나 ‘히스테리성 발작’ 진단을 받고 침대에 묶여 괴로워하는 여성들의 그림, 그리고 그 산 증거인 할머니를 관객이 목격하도록 하며 ‘증상’에 어느 정도 역사성을 부여한다. 아버지의 몸엔 결국 불이 붙는다. ‘다르고 뛰어난 여자들을 억압해 온 남자들’ 전부를 화형시키며 복수하는 상징적 제스처로 보인다. 가부장의 죽음과 함께 델마는 평안을 찾고 집을 떠난다. 어머니를 걷게 만드는 행위에서는 ‘예수의 기적’이 연상되는데, 델마는 우월하고 초월적인 성인이자 제 욕망을 따르는 ‘마녀’다. (“예수사탄!”)
그 과정에서 아냐 또한 풀려난다. 이에 대응하는 환상이 이미지화된 공간은 델마가 ‘잘못된 방향’으로 헤엄쳐 갔던 수영장, 이번에는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 아냐와 키스하고 돌아온다. 앞서 ‘그 애가 너에게 끌리는 건 능력 때문’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델마는 괴로워했고, 관객도 이 말을 좀처럼 반박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가부장을 죽인 델마는 더 이상 상대의 ‘자발성’을 신경 쓰지 않는다. 아냐가 목덜미에 키스하는 상상을 하며 다음 순간 그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그저 취하고 누린다. 잠재된 욕망을 형상화한 존재로 보이기도 하는 아냐와의 모든 접촉에는 처음부터 델마의 무의식/의식적 욕망이 반영되었다. 아냐가 아냐라는 건 중요하지만, 델마가 원했던 ‘대상’이었기에 중요했다.
델마의 성장은, 이제껏 ‘성장’이라 여겼던 바를 거스르는 역reverse성장, ‘오래된 세계(아버지/종교)’에 의해 억압되어 온 본성을 깨닫고 그것을 전복하는 과정이며, 완전히 각성된 능력을 스스로 통제하기에 이르러 완결된다. 델마 혼자 겪는 이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은 주어진 역할을 수행했다. 작품은 이것이 ‘델마의 이야기’임을 제목부터 암시하고 있었다.
<로우>의 혼란과 비완결성
델마를 향한 줌 인으로 시작되었던 <델마>는 대칭적인 줌 아웃을 통해 이야기를 완전히 매듭지었다. 그러나 <로우>는 꼬인 매듭을 던져놓고 좀처럼 풀어주지 않는다. 서늘하고 우아했던 요아킴 트리에의 것과 달리 줄리아 뒤크르노가 그리는 욕망의 이미지는 뜨겁고, 의도적으로 불쾌하다. 그것들은 목적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모이지 않는다.
둘 모두 가족에 의해 능력이 숨겨졌으나, 델마의 경우 ‘비능력자’인 가족이 그의 능력을 알게 된 후 이루어진 억제였다면(‘쟤는 우리와 다르다’), 쥐스틴의 경우 부모의 유사한 경험이 선행된 ‘관리’에 가까웠다(‘쟤네는 나와 같다’). 델마의 억압은 집에서 이루어졌고, 학교는 부모의 감시에서 벗어나 욕망을 경험하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쥐스틴에게 학교는 위계/전통에 기반한 폭력을 겪는 공간이다. 침구를 밖에 던져놓는 식의 단순한 괴롭힘도 있지만 대개는 이성애규범적인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선배들은 여성혐오적인 표현과 동물학대의 묘사가 있는 노래를 합창하고, 춤추며 밤을 새도록 강제하거나 남학생과 여학생을 한방에 가둔다. ‘오늘 여자애들은 핫하게 입어야 한다’며 거부하는 경우 기저귀를 채우기도 한다. 신입생들은 두려워하다가도 즐거워하며, 네 발로 기어 들어온 클럽에서 열심히 몸을 흔든다. 쥐스틴 역시 빨간 물감을 뒤집어쓰고도 웃으며 목청 높여 구호를 외쳤다. 언뜻 억제와 자유가 공존하는 듯 보이나 그것은 기만, 강제적 자유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낙오된다. 쥐스틴의 경우 육식을 강요당하고 몸이 반응하면서 ‘내 문제’로 체험하게 되는데, 그 ‘피해’로 인해 ‘가해’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폭력의 주체는 특정 남성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폭력적 ‘남성성’을 전시하는 세력이다. 쥐스틴을 1선에서 억압하는 언니 알렉시아가 여기 포함돼 있는데, 동시에 그는 털을 다듬고 화장을 하는 등 제 몸을 ‘여성적’인 것으로 만든다. 피해와 가해를 합리화하고 적극적으로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적응한 케이스다. 델마의 아버지와 반대로 알렉시아는 쥐스틴의 욕망이 깨어나는 것을 돕는데, 그가 병행하는- ‘허용되는, 인위적으로 전승되는 린치’와, ‘금지된, 본능적인 육식’을 집단은 달리 받아들인다. 쥐스틴과 서로 물어뜯고 싸우며 숨겨온 본성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집단에서 퇴출되어 타자/‘괴물’로 다루어진다. 쥐스틴이 상급생들에 의해 갇혀 키스 상대의 입술을 물어뜯었을 때 역시 그러했다. 이 행위는 ‘하등한/괴롭혀도 되는 먹잇감’이었던 그를 ‘건드리면 안 되는 애’로 인식하게 만들었지만, 그 동의어는 ‘집단 내 상위 포식자’가 아니라 ‘집단에 들여서는 안 되는 열등한 위험인자’다.
‘식단 관리’가 끝까지 성공적이었다면 ‘문제’ 역시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면 쥐스틴은 욕망 자체를 경험해보지 못하고 성인 이전의 시기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동물의 신장을 먹은 후 발진이 일어난 그의 피부는 벗겨졌다. 탈피를 하고 다음 단계로 변태하는 모습의 상징이다. <주니어>(2011)의 쥐스틴 역시 허물을 벗었고, 그 안엔 ‘규범적 여성성을 지닌 몸’이 있었다. 여기서 초점은 결과보다는 과정, 그 ‘여성성’이 타고나는 성질이 아니라 혐오스러운/‘괴물’스러운 행위를 거쳐 획득하는 것임을 드러내는 데에 있음으로 보였다. 이 쥐스틴이 보여지는 것에 대한 욕망을 느끼고 객체로서의 ‘성장’을 했다면, <로우>의 쥐스틴은 욕망의 주체로서 ‘성장’한다. 그러나 스스로 통제하기 힘든 이 ‘주체성’은 (의도적으로) ‘완전’하지 않다.
<델마>는 ‘마녀’들의 서사를 델마에게 입히며 어느 정도 설명을 시도했다. 그에겐 오래된 억압을 깨고 부정되었던 욕망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방향의 ‘성장 루트’가 있었다. 반면 <로우>는 ‘유전’ 외의 부가적 설명이 없다. 쥐스틴의 욕망은 대상을 필연적으로 해하게 되므로, ‘성장’은 본성을 받아들임으로 끝나지 않는다. 변화를 겪은 후 욕망을 실현하고(뜯어먹고) 부정하기를(토해내기를) 반복하며 깨달은 다음에는, 다시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억제해야 하고, 그 방법은 불분명하다. 면회 씬, 투명 파티션에 비친 알렉시아와 쥐스틴의 얼굴은 겹쳐 하나처럼 보인다. 쥐스틴이 억제하지 않을 경우 ‘될 수 있는 존재’를 보여 주는 가능성의 거울이 아닐까.
<로우>의 ‘어른 여자’들은 ‘우월한’ 능력을 지닌 ‘마녀’가 아니다. ‘열등한’ 욕망을 지닌 ‘괴물/바케모노’들이다. 헌데 이 욕망이 ‘열등한’ 것이 맞는가? 사회에서 특정한 욕망/공격성이 ‘정상’으로 수용되는 까닭은 단지 ‘으레 있어 왔기’ 때문은 아닐까? 작품에는 이러한 의문이 담겨 있다. <로우>는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며 완결을 내기보다는, 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질문을 발견하는 과정에 가깝다.
줄리아 뒤크루노의 ‘괴물’들
<델마>에서 ‘마녀’들이 인간 여자이며 그들을 억압했던 남자들을 뛰어넘는다는 점은 중요했다. <로우>에서 <티탄>으로 이어지는 줄리아 뒤크르노의 ‘괴물’들은 인간 여자이자 ‘여자가 아니’거나 ‘인간이 아닐’ 가능성을 지닌 존재다. 뒤크루노는 그 경계를 흐리는 장치를 곳곳에 배치한다. <로우>에서는 그것이 인간과 타 동물 사이에 있었다. 쥐스틴이 ‘날고기’를 접한 후 인간의 살을 먹게 된다는 설정부터가 인간과 ‘고기로 사용되는’ 동물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통제하에 ‘네 발’로 기었고, 동물 내장을 먹은 후 원숭이와 사람의 유사성을 논하기도 했다. (그날 밤 쥐스틴은 묶여 레일 위에서 강제로 달리는 말의 꿈을 꾸는데, 이는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것일 수 있다.) 술에 취한 쥐스틴이 알렉시아에 의해 ‘짐승’으로 다루어지는 장면도 있다.
<티탄>에서는 머리에 티타늄이 박혀있는, 이전부터 차와 금속에 친밀감을 느꼈던 알렉시아로 인해 인간과 기계가 만나고, 그가 ‘아드리안’이 됨으로써 젠더 표현의 경계가 깨진다. <로우>에 역시 전형적 젠더 표현을 뒤집는 요소들이 있었는데, 알렉시아가 서서 소변을 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를 그가 수행했던 폭력적 ‘남성성’의 연장선으로 봐야 할까? 제 몸은 오히려 전형적 ‘여성성’의 틀에 맞게 가꾸었던 그가 재미를 위해 하는 이 행위는 전복의 이미지에 가깝지 않을까. (특히 쥐스틴이 함께하며 즐거워하는 걸 보면.) 알렉시아가 반강제로 동생의 몸을 ‘여성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려고 왁싱을 시도하다 손가락이 잘리고, 쥐스틴이 그것을 뜯어먹는 전개도 의미심장하다. 다시 <티탄>, 원피스를 입고 의자로 남성의 입을 찍어 누르던 알렉시아는 ‘소년의 옷’을 입고 남성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him’ 젠더를 표하면서부터 보호와 감시를 받는 ‘약자’가 된 것이다. 그가 어린 아드리안이 입었던 드레스를 임부복처럼 입어보거나, 뱅상이 그의 코밑을 면도하는 등의 모습들 역시 언급해볼 만하다. 후에 수염의 흔적이 실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괴물’을 담은 신체가 ‘약하고 아름다운 대상’이 되기 쉬운 인간 여성의 것이라는 점 역시 의미를 지닌다. <로우>는 특정 씬에서 강렬한 음악을 삽입하는데, 쥐스틴이 알렉시아의 손가락을 뜯어먹을 때, 아드리안의 몸을 바라보며 코피를 흘릴 때, 그와 관계하다 끝내 제 팔뚝을 물어뜯을 때 등, 쥐스틴이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느낄 때다. 더불어, 거울 앞에서 “시체와 박는다”는 내용의 곡을 들으며 립스틱을 바르거나 클럽 한구석에서 다리를 벌리고 리듬을 타는 순간까지를 포함한 클로즈업들에서 그의 눈빛은, 절대 에로틱한 대상의 것이 아닌 맹수과 포식자의 그것이다. 알렉시아(<티탄>) 역시 앞서 ‘원피스를 입고 의자로 남성의 입을 찍어 눌렀다’고 적은 바 있다.
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이들의 신체는 ‘바디호러’라는 장르 분류에 걸맞게 말초적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아마 <델마>를 보는 상당수의 관객에겐 규범적 젠더 표현을 딱히 거스르지 않는 아냐와 델마의 관계보다 델마 부모의 극단적인 신앙이 더 ‘이상한’, ‘익숙하지 않은’, ‘불쾌한’ 것으로 다가왔을 테다. 그러나 <로우>와 <티탄>에서 불쾌를 유발하는 것은 대개 주인공의 행위와 신체다. <로우>가 쥐스틴이 몸을 긁는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던 것처럼, <티탄>의 카메라는 알렉시아가 비녀로 임신중지를 시도하는/세면대에 코를 박는/부풀어 오른 몸을 싸매거나 긁어대는 모습과 소리를 일부러 담는다. 주로 인물이 몸에 대한 ‘낯섦’이나 두려움을 체험하는 순간들이고, 관객은 어느 정도 이 ‘불쾌한’ 화자들에 이입해 관람하게 된다.
<티탄>의 경우 알렉시아가 애초에 ‘비정상적 욕망’을 인지한 채로 등장하기 때문에 <로우>처럼 관객이 ‘증상’을 함께 겪어 나가기엔 무리가 있으나, 여전히 화자는 그다. 오프닝, 마치 인간의 몸을 대하듯 카메라는 차체의 부분들을 천천히 훑고, 이어 엔진의 소음이 어린 알렉시아의 입이 내는 소리와 겹친다. 작품의 시선이 ‘차와 교감하는’ 알렉시아의 것임을 드러내는 연출이 아닐까. 관객이 특정 행동과 욕구를 ‘타자의 것’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그 ‘타자’의 입장, 변화하는 감정과 상태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도록 돕는 것이다. 또 하나 이입을 방해하는 요소는 알렉시아가 ‘증상’과 상관없이 제 의지로 인간을 해한다는 점이다. 헌데 그는 살인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행위를 즐기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비녀가 없으면 극도로 불안해 하는 그의 살인은, 공포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수 있겠다. 벌어지는 상황에서 그는 항상 ‘강자’인 것만은 아니다. 쫓아와 들이대는 남자를 대하는 얼굴은 두려움으로 굳었고, 살인 후 몸에 묻은 분비물에 질겁했다. 쥐스틴을 찌른 것은 겁에 질려 임신중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나서다. ‘물리적 힘으로 강제되는 성적 행동’이나 ‘몸 속에 있는 다른 존재’에 대한 공포에는, 보편적 공감의 여지가 어느 정도는 있다.
알렉시아라는 인물이, 트랜스젠더/크로스드레서의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연쇄살인‘마’를 ‘비정상적 존재’로 규정했던 스크린의 역사,(참고: 2020, <디스클로저: 트랜스 리브스 온 스크린>)를 잇는 것은 아닌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면, 오히려 그가 살인을 멈추는 것은 생존을 위해 크로스드레싱을 시작하고부터라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애초에 그는 ‘이해할 필요 없는 대상’이 아닌 주 화자이므로, 서구권 미디어의 전형을 전복한다고 봐야 더 맞을 테다.
알렉시아의 생부가 의사라는 점도 흥미롭다. 초반 교통사고 시퀀스에서 강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는, 이후의 장면들에서는 딸을 데면데면하게 대한다. 아마 딸이 ‘연쇄살인범’임을 ‘진단’하고도 침묵한 것으로 보이고, 임신은 진단해내지 못했(거나 그런 척 했)다. 이는 상대를 자유로운 인격체로 존중하며 간섭하지 않으려는 자세라기보단, 이미 완료된 평가가 내포된 방치/회피에 가깝다. 알렉시아는 결국 집에 불을 질러 그를 해한다. 여기서 다시 불에 탄 <델마> 속 아버지를 불러온다. 창조론을 믿는 지인을 비웃는 델마를 꾸짖던 그는 독실한 신자이면서 의사이기도 했다. 그의 종교적 신념과 과학/의학적 권력은 유사한 의도와 뉘앙스로 사용되었다. 델마를 ‘진단’하고 ‘치료’로 무력하게 만드는 행위는 사료로 등장한 바 있던 중세 ‘마녀사냥’과 동일선상에 놓이고, 그 일환으로 비이성애적 사랑과 욕망을 부정하는 기도를 강요하는 모습은 ‘전환치료’(…)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가 처방하는 약은 역시 델마의 ‘증상’을 ‘진단’한 바 있던 다른 의사에게조차 ‘과하다’며 ‘비정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미 ‘기성’조차 아닌, 낡고 구시대적인 존재인 그에겐, 애초에 멸망의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델마>의 가부장 화형식, 역사적 복수, 낡은 세계의 파괴는, ‘델마’의 시작이자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에스킬 보그트와 요아킴 트리에는 수렴하는 깔끔한 서사로 ‘충분히 완전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줄리아 뒤크루노는 오히려 ‘불완전’해지려 한다. <티탄>의 화형식은 또 하나의 출발점이다. 근현대인의 몸과 마음의 ‘정상성’을 판단할 권력을 지닌 ‘의사’이자 ‘가부장’을 ‘비정상적’ 존재의 의지로 삭제하며 서사를 전환하는 행위는, 알렉시아, 그가 배에 품은 존재, 뱅상(그 역시 ‘유전자 검사’라는 의학적 진단을 거부한 바 있다.)과의 관계를 ‘보편의 규범’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는 암시가 아닐까?
<티탄>, ‘괴물’들의 유대
이어, <로우>가 던졌던 질문의 실타래를 <티탄>은 어느 정도 풀어낸다. 그 실이 관객을 이끄는 곳이 어디인지를 설명하기 앞서, 감독의 전작은 ‘페이즈’가 아니라 그저 다른 작품임을 명시하고 싶다. ‘발전’보다는 ‘확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먼저, <티탄>의 ‘젠더 경계 흐리기’는 결론-절대적 경계가 없다는-을 내포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칭되는 댄스 시퀀스를 그 상징으로 해석했다. 알렉시아가 ‘her’로 보여질 때와 ‘him’으로 보여질 때 추는 춤에 대한 남성 집단의 반응은 다르다. 알렉시아의 춤을 본 남자들은 그를 만지고 싶어하고, 끝나면 다가가 팬이라며 사인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아드리안’의 춤을 본 남자들은,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 인상을 쓰거나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들에게 ‘아드리안’은 남자고, ‘그런 춤’은 ‘여자의 것’에 속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핵심은 그들의 불쾌가 아닌 알렉시아의 위화감dysphoria 없는 태도다. 그가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여자로 여겨 그와 ‘일치’하는 표현을 과시하는 중이라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차와 함께하는 춤은 알렉시아를 ‘알렉시아’로 정의하는 행위, 그에게 더이상 여성의 성별이나 ‘소년의 옷’ 따위는 중요치 않다. 머리 길이나 옷차림이 달라졌을 뿐 같은 사람이고, 이 존재는 스스로 그것을 알기에 거침없이 몸을 놀린다. 춤을 통해 ‘him-아드리안’은 ‘her-알렉시아’와 연결되고, 경계는 흐려진다.
<로우>는 화자로서 쥐스틴 개인의 욕망과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다. 아드리안과의 섹스신은 쥐스틴의 식욕이 성욕과 연결됨을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여기서 그는 욕망에 사로잡혀 감정을 느낄 겨를이 없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티탄>의 섹스신은 알렉시아와, 함께 춤을 춘 차 사이의 것이며, 알렉시아의 신체에 변화를 가져온다. 알렉시아의 모습으로 춤을 춘 후의 섹스는 방금 죽인 남자의 분비물을 씻어낸 다음 시작되고, 그를 임신하게 만든다. ‘아드리안’의 모습으로 춤을 춘 후의 섹스는 뱅상이 말없이 자리를 뜬 후 만삭의 몸으로 하게 되고, 출산으로 이어진다. 전자에서 알렉시아의 얼굴에 관계로 인한 쾌감만이 떠올랐다면, 후자에서 괴로움 섞인 신음을 내지르다 결국 우는 얼굴엔 복합적인 고통/슬픔이 묻어난다. 이렇듯 <티탄>은 행위의 결과들이 엮이며 발생하는 감정과 관계를 중요하게 포착한다. ‘성장’과 변화의 실마리는 타자와의 연결에 있다.
알렉시아는 뱅상의 집에서 갈수록 안전과 안정, 사랑을 느낀다. 연쇄살인을 저지르던 그가 사람을 살리며 성취감을 맛보고, 결국 긁어내려 했던 뱃속의 아이에게 ‘미안해’라고 속삭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관계의 변화는 오로지 알렉시아가 마음을 열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과정인가? 뱅상이 처음부터 친밀감을 표시한 쪽인 것은 맞지만, 그 성질과 내포된 심리는 달라졌다. 첫날 그가 뱉은 말 “널 건드리는 놈은 죽어, 그게 나일지라도.”에서 ‘너’는 꼭 ‘내 판타지’의 동의어처럼 들린다. 그 통제를 위해 본인이 원하는 대로 ‘아드리안’을 가꾸려 했으나 점차 상대 자체에 대한 복합적 애정과 신뢰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뱅상은 단지 알렉시아의 상대가 아니다. 그 역시 ‘괴물의 몸’을, 알렉시아와는 다른 방향의 ‘비정상적’ 욕망/‘결핍’을 지닌 화자다. 강한 ‘남성성’으로 부하들을 통제하는 그는 ‘남성적인 신체’를 잃어가는 현실을 두려워하고 부정하며 과거에 집착해 왔다. 알렉시아가 임신이라는 낯설고 갑작스러운 몸의 변화로 공포를 느낀다면, 뱅상은 노화라는 예정된 변화로 좌절한다. <로우>에서도 친밀한 남성과 경험의 유사성이 발생한 바 있었다. 이십 년 동안 채식주의자로 살았던 쥐스틴은 인육을 갈망하게 되었고 -물론 아주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아드리안은, “이십 년 동안 게이로 살다 갑자기 여자랑 자면서” 어느 정도 성 지향성의 ‘혼란’을 겪었다.(이러한 설정에서는 아드리안의 게이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것보다는 ‘정체성’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읽힌다.) 그러나 그는 ‘괴물 화자’가 아니었다. 대개 쥐스틴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대상으로 존재했고, 이들의 관계는 심화된 유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죽음으로 끝났다. <티탄>에서 두 타자는 서로에게 몸과 마음을 점점 열며 유대한다. 뱅상은 알렉시아에게 주사를 놓아달라며 약한 몸을 내보였고, 알렉시아는 춤을 추거나 출산하는 순간 뱅상에게 몸을 맡긴다.
아버지의 ‘부재’를 겪은 알렉시아와 아들을 잃은 뱅상. 아들이 아닌 자와 그의 아버지가 아닌 자가 만든 ‘비정상’ 가족. 연극으로 시작했던 관계에 진심이 쌓였다. 알렉시아는 ‘들켰으나 받아들여진’ 것으로 끝내지 않고 춤을 통해 일종의 ‘커밍아웃’을 한다. ‘네가 뭐든’ 지켜주겠다던 이에게 -여성이자 남성이자 둘 다 아닌, 차와 교감하는, 이제 당신과 교감하고 싶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보인다. 그의 사랑은 일단 거부당한다. 뱅상의 애정이 판타지에 대한 것에서 상대에 대한 것으로 나아가기는 했으나, ‘부성애’를 벗어났음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그가 몸에 불을 질러 제 가부장적 환상을 태운 후 찾아온 알렉시아는 마음을 고백하고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받으며 뱅상은 알렉시아를 ‘알렉시아’로 부른다. 정신을 잃은 그에게 밀어냈던 입맞춤을 돌려 준 후, 티타늄 척추를 지닌 존재를 감싸안는다. ‘네가 무엇이든’ 사랑할 것임을 표현하는 제스처다.
카오스, 가능성의 에너지
<로우>와 <티탄>은 ‘괴물’들의 ‘인간적인’ 혼란과 ‘성장’, 고통과 사랑을 스크린에 옮겼고, <티탄>에서 그들은 서로 유대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관람되기만 하는 객체가 아니었지만 ‘전통적’ 의미의 인간 주체 역시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 있는 타자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뉴 몬스터’로서의 화자들이었다.
‘티탄’이라는 네이밍에선 그리스 신화의 티탄Titan족이 필연적으로 연상되는데, 부모의 포지션인 뱅상을 가이아, 알렉시아를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인 우라노스에 대입하는 아이디어가 있고, 본인을 하늘이라고 칭했던 뱅상을 우라노스, ‘티탄’을 낳는 알렉시아를 가이아에 대입하는 아이디어가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관계해 낳은 아이도 아니고, 어느 쪽이건 딱 들어맞지 않는 대입이다. “난 하나님, 내 아들인 얘는 예수.”: 뱅상을 ‘남성성’을 잃어 가는 하나님, 알렉시아를 그의 아들이 아니고 남성도 아닌-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수이자 ‘인간의 정의를 깨는 존재’를 낳은 마리아로 보는 아이디어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알렉시아가 인간의 ‘씨’ 없이 아이를 낳은 창조자, 뱅상은 그 아이를 양육할 ‘모성’의 수행자다. 모순되는 대입과 상상을 통해 전통적 젠더 역할과 경계들을 함께 뒤섞어 버리는 행위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결국 <티탄>은 기존의 틀에 맞게 해석되기를 거부한다. 이 이야기는 서구적 기원 신화의 ‘여성중심적’ 답습이 아니며, 알렉시아는 ‘태곳적 어머니archaic mother’(바바라 크리드, 1993)보다는 ‘기원이 없는 사이보그’(도나 해러웨이, 1985)다.
뒤크루노는 기득권에 의해 쓰이고 고민 없이 받아들여져 온 룰에 카오스를 부어 가능성의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이 ‘카오스’는 ‘태초’의 그것이 아니라 ‘새롭고 기원 없는 것들’의 혼합물이다. <로우>에서는 ‘남성적’이고 집단적인 폭력이 허용되는 세계에 ‘순수한 먹잇감prey’이 되기를 거부하는 ‘괴물’ 여성을 던져 넣어 ‘물을 흐렸다’. <티탄>에서는 임신한 여성의 몸을 ‘열등한’ 것, 퀴어는 ‘죄악’으로 다루어 온 종교적 서사,를 포함한 저 ‘신화’들을 신성모독과 함께 ‘사이보그 탄생’ 서사로 다시 쓰며 젠더/이성애/정상가족의 규범, 인간성의 정의마저 해체한다.
앞선 해석들은 유일한 결론이 아니며, 뻗어나갈 수 있는 가지의 일부일 따름이다. 뒤크루노가 제시하는 설정과 이미지는 어느 정도 완결되는 메시지가 있는 <티탄>에서마저, 목적을 향해 모여 집을 짓는다기보단 울타리를 무너뜨려 새로운 것들에 대한 문을 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때로 관객을 혼란과 공포에 빠뜨리지만, 동시에 상상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픽션과 영화의 힘을 굴릴 줄 아는 그의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는 말은, 으레 하는 상투적 칭찬이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