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유령, 자유인>(2020)
<괴물, 유령, 자유인>(2020, 감독: 홍지영)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괴물, 유령, 자유인>은 ‘지금 바로 여기’라는 시간성과 장소성을 중요하게 가져가면서도 시대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이단, 이방인, 반역자! 복종하지 않는 너는 우리에게 두려운 존재다.” 앞선 기득권 세력의 언어는 21세기 한국의 퀴어와 17세기 네덜란드의 스피노자 모두를 향한다. 이곳의 ‘우리’는 환영의 목격, 연기acting, 그리고 구글 어스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당시의 그에 닿는다. 화면에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이미지들이 떠돌고, 대사 역시 자주 관념적이고 철학적이다. 인용되거나 창작된 시적 문구들이 자막으로 삽입되기도 한다. 저들이 주장하는 ‘본질’, ‘절대진리’라 여겨지는 것들을 건드리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형태인 듯하다. 바비인형들로 상징되는 이성애규범적 인간형과 관계는 ‘원래 거기 있었던 것’/‘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환상, 사실 우리 모두는 이상하고 독특하므로 자연스럽다고 작품은 말한다. “자연은 이상한 것을 좋아한다.”
[괴물], [유령], [자유인]: 각 파트는 질문과 함께 시작된다. “괴물은 무엇을 믿어야 할까?”, “유령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을까?”, “괴물들과 유령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작품은 물음표를 남겨두기보단 그에 대한 답을 스스로 풀어가며 관객에게 공모를, 함께 기꺼이 ‘이단’이 되기를 제안한다.
[괴물], 성심은 여자와 키스하는 여자, 괴물의 성질을 지닌 자다. 초반 택시 시퀀스에는 그가 겪는 억압이 함축돼 있다. 라디오에서는 ‘이단들’에 대한 설교가 흘러나오고, 택시 운전사는 ‘그것들을 죄다 잡아 넣어야 한다’고 투덜대며 거친 투로 동의를 구한다. 성심은 ‘논문 좀 써달라’는 교수의 말을 떠올리던 중이었다. 단적이고 ‘너무나 현실적이라’ 금방 이해되는 묘사들이다. 그동안 성심은 자신을 ‘인간’의 테두리에서 밀어내거나 존재를 지우려 하는 세력에 눌려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를 향해 은수는 물었다, “넌 뭘 믿어? 뭘 욕망하고 뭘 사랑해? 괴물이 되는 게 그렇게 두려워?”
성심은 은수가 남기고 간 카드를 열어보고 ‘제 3의 눈’을 뜬다. 금빛 낯을 한 혁명가의 환영을 만나 ‘난 너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은수가 떠나며 했던 대사와 비슷하다. 결국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건 그 자신 뿐이다. ‘괴물이 지닐 수 있는 믿음’에 대한 답은 거기에 있다. 내 존재, 내 감정, 너에 대한 사랑. [괴물]의 시작, 성심은 어두운 산 속에서 쭈그리고 있었다. 언뜻 변을 보는 행위인 듯 했지만 그의 신음에는 뭔가를 고통스럽게 낳는 듯한 뉘앙스가 있었다. 그 장면은 끝으로 이어진다. 성심이 힘들여 내보낸 것은 마지막에 등장한, 빛나는 눈을 지닌 괴물적 자아였을까? 그는 그렇게 제 존재와 사랑을 믿기로 했다. 삭제되길 거부하며 논문에 이름을 적어냈고, 괴물이 되는 긴긴 잠에 빠진다.
[유령], 성철은 유령이 되었다. 배우인 그는 마지막으로 찍은 작품 ‘유령’에서 스피노자를 연기했다. ‘고통이라도 좋으니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던 흰 옷의 인물이 스피노자의 영혼인지, 스피노자와 하나된 성철의 영혼인지, 아니면 스피노자를 연기하고 있는 성철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이미 구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스피노자에게 이입하며 제 속에서 그의 영혼을 감지한다. 추방된 현자와 하나된 성철은 죽어 세상을 배회한다. 과거 성철은 동료들에게, ‘종이에 쓰인 인물이 살아나게 하는 작업은 수조에 있던 물고기가 펄떡거리는 것을 보는 기분이 들게 한다’고 말했었다. 연기라는 행위에서 영원의 삶을 느꼈던 걸까. 눈을 뜬 채 쓰러진 성철의 얼굴은 수조의 물고기와 닮아 있다, 곧 펄떡대며 튀어오를. 미처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이 끊어진 모습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마침내 “눈을 뜨고 영원을 목격한” 상태일 수도 있다. 그는 죽었지만 “삶은 계속된다.”는, 사라지지 않고 유령으로 살아가리란 의미일 테다. 물에 잠긴 그가 ‘생명’을 얻으며 흑백 화면에 색이 번진다.
그리하여 [자유인]에서는, 성철과 성심-은수가 만난다, 유령-스피노자와 괴물-퀴어가. 긴 잠에서 깨어난 후 ‘더 이상 숨지 않기로’ 한 성심과 뒤늦게 그를 찾아온 은수, 그들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고정돼 있던 카메라가 움직여 옆 공간을 비추자, 프레임에 영화를 촬영하는 현장이 들어온다. 스피노자 분장을 한 성철이 보인다. 감독은 성심과 은수에게 다가와 보기 좋다며 대뜸 출연을 부탁한다. 한국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퀴어들을 영화에 담고 싶었음을 암시하는 전개일 수도 있겠다. (영화 속) 감독이 담기로 한 것은 두 ‘자유인’이 손을 맞잡은 채 ‘자유로운 세계’를 만들리라 다짐하는 장면이다.
주로 시적인 방법으로 메시지를 풀어내던 작품은, 엔딩에는 실제 서울퀴어문화축제의 푸티지를 (아마 신변 보호를 위한)애니메이션 효과를 입혀 삽입했다. 영화적 관점으로만 봤을 때는 의아한 선택일 수 있겠다(실제 자료 영상을 삽입한 다른 픽션들, 특히 동일한 형식으로 마무리를 택한 <블랙클랜스맨> 같은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그러나 홍지영 감독의 우선순위는 영화의 형식적/미적 일관성이 아니었던 듯하다. 현실과 만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짜처럼 보이는 이야기’만을 부드럽게 잇는 대신 대놓고 인위적으로 연출한 컷들을 잘라 넣었고, 마지막엔 ‘진짜 이야기’를 불러온 것일지도. 현실의 퀴어들이 힘과 용기를 받고 함께 거리를 당당히 걸었으면 하고 바랐기에, 과감히 픽션을 깨뜨린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소수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정상성’을 파괴할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홍지영 감독, 2020.09.19, 서울퀴어문화축제 공식 유튜브.
“우리 괴물들은 아주 무시무시한 존재로 낙인찍히고, 우리 안의 괴물을 숨기고 살아가는 유령이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들의 손에 화염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사회가 정한 바운더리 밖으로 추방당한 괴물들은 유령이 된다(비가시화되거나 실제로 죽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으로 정의할 수 있다-아니, 괴물이고 유령이어야만 자유인일 수 있다. ‘괴물’과 ‘유령’은 주인공들이/퀴어가 그것이 아님을 부정하기 위해 선행된 개념이 아니다. 그 자체로 긍정되는 ‘혁명의 종’이다.
“괴물들의 사랑, 그 역동적인 힘은 질서정연한 이 거짓된 세계를 무너뜨린다.” <괴물, 유령, 자유인>은 선언한다: ‘우리’는 당신들이 만든 거짓된 신화/환상/규범 따위에 지배당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연스러운-타고나 억압당한 괴물성을 긍정하기로 했다고. 무지개 너머 먼 곳에서 혹은 밤의 어둠에 숨어 그것을 수행하는 대신, 바로 여기에서, 낮에, 거리로 나와 외치기로 했다고. 더 이상 ‘자유’를 바라며 독사과를 베어 물고 죽지 않을 것이며, 서로에게 건넨 사과를 씹으며 함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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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멸망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성철의 동료 배우는 말했다. 개인적으로 절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힘내 살아가고 있는 주변까지 함께 끌어내리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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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모든 퀴어들이 이러한 자유인 선언에 함께할 수는 없을 테고, 함께하더라도 보이는 곳에 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괴물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행위는 실질적 위험을 수반한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거짓된 사회의 잘못이다) 그러한 복잡함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작품은 괴물만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개념도 함께 가져와 긍정했던 것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