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온 컴온>(2021)
<컴온 컴온(C’mon C’mon)>(2021, 감독: 마이클 밀스)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어엔 높임말이라는 게 있다. 영어 대사를 한국어로 옮길 때 번역자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와 대사의 맥락, 말투를 파악해 존대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영어권 작품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관계의 맥락에 그럴만한 근거가 없음에도) 아내만 남편에게 ‘요’를 붙이는 부부가 여럿 탄생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TV쇼의 경우 화마다 번역자가 다르다면 서로 반말을 했던 이들이 다음 화에서는 갑자기 상호 높임말을 쓰게 되기도 한다. <컴온 컴온>, 조니와 동료들이 어린이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에서 대화는 전부 높임말로 번역되었는데, 바람직한 선택으로 보였다(제시와 조니가 서로 반말을 썼다면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을 것 같지만-). 아니, ‘~으로 들렸다’고 적는 편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사운드가 가까이 와닿는 작품이었다.
제 1화자를 꼽자면 조니이겠으나, 작품은 그의 시각만을 취하지는 않는다. 사실 ‘시각’은, 누구의 것도 취하지 않음에 가깝다. 카메라는 대개 인물이나 공간을 관찰하듯 움직인다. 흑백은 솔직하고 담백한 느낌을 부여함과 동시에 관객이 화면과 거리를 두게 만든다. 시각정보의 주인은 주로 부재하고, 청각의 주체는 종종 섬세하고 분명하게 감지된다. 시/청이 모두 가능한 관객이라면 청각을 매개로 <컴온 컴온>에 이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마음을 전하는 소리는 언어의 형태를 띠지 않을 때도 있고, 음성 언어가 아무 의미 없는 공허한 소리가 되기도 한다. 어른이 어린이를 ‘타이를’ 때 사용하는 뻔한 말들을 제시와 조니는 ‘blah blah blah어쩌구저쩌구’라고 일컫는다. 인간의 말소리만이 아니라 자연과 공간에게도 귀 기울이는 제시. 해변에서 그는 제 눈높이의 혹은 그보다 낮은 곳의 소리를 수집하고, 관객은 때로 그의 청각이 헤드폰을 통해 인식하는 사운드를 듣게 된다. 이야기 안팎의 어른들이 자리잡아야 할 곳은 그쯤이다.
어른으로서 어린이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논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으레 그렇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착각임을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는 어른과 달리 불완전한 사람이다’와 ‘어른은 어린이를 통제하고 가르쳐야 한다’라는 문장이 틀렸음을. ‘보호자’라는 표현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어린이를 부당한 의무나 폭력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과, 보호를 명분으로 관계나 권리를 유예하는 것은 다르다. 사회의 룰이나 지루한 틀에 비교적 덜 얽매여 있는 그들을 어른들과 비슷한 인간이 되도록 이끄는 것이 바람직한가. 어쩌면 그건 ‘그런 식으로 어른이 돼버린’ 이들의 편의를 위한 행위는 아닌가.
이 “whole little person(비브)”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면, 기성의 틀에 들어맞도록 ‘훈련’되지 않은 이 존재들과 함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린이들의 관점을 취하는 척’하기보단-조니를 매개로 그 어려움을 고백하는 것,은 어른/부모인 작가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작품이 택한 방법은 어린이들의 소리를 직접 수집하는 것이다. 조니와 동료들은 인터뷰를 담는 매체를 비디오가 아니라 오디오로 택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 카메라가 끼어들지도 않고,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카메라를 인식할 필요도 없다. 인터뷰어가 직접 인터뷰이에게 마이크를 건네고 상대와 눈을 맞추며 경청하게 된다. 대상으로 관람하지 않고-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겠다’는 메시지가 깔려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인터뷰들은 <아이다호>(1991)의 그것처럼 논픽션이다. 이 파트가 작품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분명한데- 창작된 이야기를 보조하는 형태로 실제 인터뷰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뷰가 픽션에 영향을 미치게 하고, 픽션 장면들로 그 리얼리티가 밀려들어오게’(마이클 밀스, 2022.01.25. [IndieWire])한다. 과연 그 내용은 ‘리얼’하고 자유롭다. 인터뷰어는 답변의 범위가 넓은 질문들을 던지고, 답을 특정 결론으로 유도하거나 일방향으로 편집하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담아낸다.
픽션 캐릭터인 제시는 그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른들이 물어보는 대로 답하기를 거부하는 그는, ‘착한 아이’ 혹은 ‘아이다운 아이’의 전형을 연기하지 않는다. 작가가 창작한 인물이지만 그 핵은 배우 우디 노먼 본인에게 있는 듯했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가 아니라, 리얼리티와 섞인 픽션. 제시가 하던 ‘고아 상황극’ 또한 ‘음악을 맡은 애런 데스너의 딸이 하곤 했던 게임’(수입사 ‘찬란’ 언론 보도 자료 참고)이다.
그러므로 제시는 ‘완전히 해석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인물이었다. 속내를 스크린에 전시하지 않으며 저만의 리듬으로 움직이는 이를 만나면, 엿보고 파헤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든다. 그럴 때는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래도 될지’ 고민하려 노력한다. 그러고 나면- 이이의 대변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솟기도 하고, 반대로 감히 파악하려 하지 말 것을 제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 일종의 감- 항상 맞기를 바라며 주관적으로 적는다.)
<썸머 85>(2020)를 보고 오로지 대상으로 놓일 수밖에 없었던 다비드의 마음을 추측해야겠다는 자발적 의무감이 솟아났던 것과는 반대로- 주체와 객체를 오가며 자유롭게 존재했던 제시의 마음을 정리하려니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시는 누구일까? 유별나고 영리한 아이? 아픈 아빠와 남다른 엄마를 둔 아이?(폴과 비브도 이 따위로 수식해선 안 된다) ‘아이 같으’면서도 ‘아이 같지 않은’ 아이?(제시가 이 말을 듣는다면 ‘아이 같은’ 것이 무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어른 중심의 언어로 그를 설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제시는 다만 제시, ‘하나뿐인 부족’(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p.201)이고, 어쩌면 모든 어린이가 그럴 테다.
자신의 놀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조니에게 제시는 ‘노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마이클 밀스의 장편 데뷔작 <썸써커>(2005)의 결말에서 저스틴은 끝내 엄지를 빠는 버릇을 ‘고치’지 않고 ‘썸써커’인 채로 남았었다. 우리가 노말(normal: 평범한/정상의)이라고 여겼던 것들의 기준은 누가 만들었으며 그것이 언제부터 ‘노말’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귀한 감각은 ‘노말’에 익숙하지 않거나 들어맞지 않는 자일수록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제시는 어느 정도 둘 다에 해당한다. “내 진심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건데 조니가 어떻게 아냐”던,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눈동자에 비치던- 제시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세상의 틀에 맞게 저를 바꾸는 법이 아닌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방법일 테다. 그리고 당연히, 상대방도 제시를 이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진심을 나누는 깊은 관계를 맺고 싶다면 타인을 공부해야 하는 법이니까.
작품이 제시하는, ‘어린이와 관계하는 어른의 태도’를 상징하는 표현은 초반 비브의 대사 속에 이미 등장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whole little person작은, 완전한 사람”. ‘미래의 주인공’도 ‘불완전한 사람’도 아닌 현재를 사는 온전한 존재. 조니와 통화하며 농담조로 종종 제 아들을 ‘little shit’이라 일컫기도 하는 비브의 양육 방식은 감동적으로 이상적이다. 그는 제시와 자신 모두 ‘완전한 인간이나 완벽하지는 않음’을 알고 솔직하게 드러낸다. 거리를 두고 타인으로 존중함으로써 친밀감을 형성한다. ‘으레 그래왔던’ 것들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용기, 들여다보고 귀 기울이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 과연 비브가 지닌 감각은 상당히 뛰어나지만, 그것을 ‘타고난 모성’이라 얼버무리면 곤란하다.
인간은 영원히 타인을 다 알 수 없고, 어린이 역시 타인이다. 상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전제로, 그럼에도 마음을 헤아리려 끊임없이 애쓰며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 너무나 당연한 말인가. 어린이들의 인터뷰를 레코딩하는 작업을 하는 조니가 그것을 몰랐을까. 듣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고, 아는 것과 하는 것은 다르다. 제시와 관계를 맺으며 조니는 (아마 비브 역시 제시를 만난 후 거쳤을) 그 배움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단적으로는- “너네 세대는”으로 시작되는 문장을 중얼거렸던 그가 “네가 나를 받아들여 줬어.”라고 고백하게 된다. 제시가 새로운 도시와 사람을 경험하며 성장했듯, 조니는 제시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육아 경험이 없는 어른이 느닷없이 어린이를 ‘돌보게’ 되며 좌충우돌 우정을 쌓는 스토리는 결코 드물지 않으나, <컴온 컴온>의 태도는 귀하고 유일하다. 수많은 픽션들을 돌이켜보게 됐다. 몹시 ‘감동적인’ 어떤 서사 속 어린이는 어른 관객을 만족시킬 만한 성격과 행동패턴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가. 그의 목소리는 대체 누구의 것이었던가. 특정한 흐름을 예상하고 극장을 찾은 어른 관객이라면, 제시와 관계 맺는 방법을 조니와 함께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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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 <컴온 컴온>은 조니와 제시와 비브, 그리고 폴까지, 디트로이트-오클랜드-엘에이-뉴욕-뉴올리언스를 오가는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조니와 비브가 말다툼하는 모습, 그들의 모친과 함께 있는 모습, 비브와 폴의 모습, 제시와 폴/제시와 비브/제시와 조니가 몸을 움직이며 노는 모습들은 제시와 조니의 여정 사이사이 주로 슬로모션으로 삽입돼 있다. 음성 언어가 삭제된 화면에서는 구체적인 상황 대신 순간의 정서가 읽힌다. 작품은 폴이 아프게 된 ‘과정’이나 비브와 조니와 그들의 모친 사이의 역사를 자세히 서술하지 않고 그들만의 것으로 둔다. 중심으로 둘 인물을 정해 놓되 주변에까지 숨을 불어넣으며 이야기를 ‘진짜’로 만드는-모든 인물을 존중하는, 작품만의 독특한 방법이다.
* 참고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