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다운>(2021)
<썬다운(Sundown)>(2021, 감독: 미셸 프랑코)
* 위 장면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에게 원작 크레딧이라도 남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은 사실이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부적절한’ 애도, 감옥에 가고 ‘장례식에 왜 참석하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는 등의 표면적 설정에서부터 기시감이 드는 것을 보니, 평에 거의 공식적으로 <이방인>이 언급되리라는 건 미셸 프랑코도 예상했을 것 같다. 이방인만 떠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샤를로뜨 갱스부르가 묘하게 닮은 자리에 위치했던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2011), 그리고 J.D. 샐린저의 연작 소설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와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속 시모어 글래스의 행동 역시 떠올랐다. 슬퍼해야 할 때 평온해 보이는 자, 가장 행복해야 할 때 사라지는 자,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거나 지구 전체가 터지기를 기다리는… ‘이상한’ 사람들. 그러나 닐 베넷의 표정에 담긴 것은 남다른 감수성이나 우울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역시 이방인과 닮았다는 결론에 닿았으나 닐의 정서는 뫼르소의 것과도 같지 않았다. 결국 엔딩크레딧의 정적 속에 남은 것은 무엇과도 다른- 썬다운적 정서였다.
보편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기에 관객은 자꾸 닐의 얼굴을, 거기 담긴 감정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것은 기본적 슬픔과 무기력, 무욕 따위의 한 단어로 깔끔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뭍으로 끌려나와 숨이 끊어지는 중인/ 구워져 살이 파먹힌- 어류. 제가 살 수 없는 바다로 들어가는/ 교도소 샤워장을 뒹구는/ 내장이 쏟아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돼지. 닐은 꼭 실재하는지 허상인지 알 수 없는(영화에서 ‘실재’한다는 건 무엇인가) 동물들의 형체에 자신을 투영해 거울처럼 응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포스터 속 이미지처럼 모래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듯도 했다.
작품의 분위기는 닐에게 감도는 그것과 일치한다. 웃음이나 울음소리, 사람으로 가득한 해변의 소리, 두 사람이 침대에서 몸을 섞는 소리, 총성이나 비명마저도 고요하게 다가온다, 종종 끼어드는 햇빛의 이미지처럼. 늘 그 자리에 있음에도 뜨거나 진다고 여겨지는 해 역시 그의 거울이었을까.
닐이 하루를 대하는 방식은 시간과 인과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일련의 사건들이 꼬이고 맞물리며 전개되는데도 그에겐 그저 새롭고 같은 날이 반복되는 듯하다. 어제가 오늘이었다면 어떤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 순서가 바뀌어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장소 역시 닐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앨리스 가족과 머무르던 최고급 호텔과 이후 몸을 뉘인-5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하는-호텔, 북적이는 교도소에서도 닐은 그저 머무른다. 순간의 충격이나 고통을 표출할 뿐, 그 동떨어진 모습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죽었다’, ‘앨리스가 죽었다’, ‘체포되었다’, ‘암에 걸렸다’는 등의 사건들은 닐의 행동에 변화를 불러옴으로써가 아니라 ‘아무런 변화를 불러오지 않는 듯 보임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어제는 세상에 남아 있던 어머니가 오늘은 ‘세상을 떠난’, 방금 연을 끊은 동생이 살해당해 내가 체포되는, 그런데 풀려난 나는 범인이 소개한 호텔로 다시 돌아가는. 주변과 관객은 ‘비일상’의 직후를 지나는 그의 ‘일상적’ 태도에서 이상과 불편을 느낀다. 장례식에 가지 않고, 방을 잡은 후 해변에서 술을 마시고, 우연히 만난 이와 밤을 보내고, 낮도 보낸다. 그동안 앨리스에게 핑계를 대며 회피한다. 들통나자 자기변호를 하기는커녕 ‘성의’나 ‘예의’로 여겨지는 최소한의 설명마저 덧붙이지 않는다. 동생, 이어 조카들이 저를 이해하지 못하며 연을 끊어도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며 일말의 억울함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그런데, 눈빛에 어린 애정과 슬픔은 진심이다. 어쩌면 닐의 ‘불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닌 뚜렷한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짐작하기 전에, ‘아닌 것’을 골라내려 한다.
불로소득이 보장되는 인간이라 그러한 매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냐,는 삐딱한 시선을 던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돈에는 관심이 없다’고 여러 번 말하기도 하는 닐에게 있어 생계 유지나 신변의 안위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아마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면 그날그날 잡히는 일을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영양실조로 쓰러질 때까지 해변에 앉아 해를 올려다보고 있지 않았을까. 특수하게 부유하다는 설정이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필요조건-픽션적 허용-보다는 그러한 삶을 택하게 만든(제 계급을 인식한 후 버리는) 요인으로 작용함에 가까워 보인다.
‘보편적 원인’을 부여해 해석하려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그 ‘이상 행동’들은 어쩌면 삶을 포기했거나 정리하는 인간의 것, 죽음을 앞두고 천천히 제 존재를 모래알로 흩뜨리는 과정이었을까. 그러나 영화는 종양이 발견되는 사건에 소위 ‘반전’이나 ‘클라이맥스’의 뉘앙스를 입히지 않는다. 장례식 불참이나 베레니스와의 만남이 그러했듯 그저 그날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다룰 뿐이다. 만성적인 자기파괴욕은 그의 병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삶 자체에 드리워져 있었으므로.
그건 ‘주체적 삶’에 대한 유예/도피도, 인생의 막을 내릴 준비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이미 끝낸 자의 행동이었을 테다. 가치관을 주장하고 사고과정을 설명해 봤자 보편의 세계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 차라리 설득하는 대신 최대한 회피하기로. 그러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지면, 사랑하는 이들의 의문과 원망 가득한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그들의 차가운 손을 맞잡으려 노력하기로 -목소리가 전하지 못하는 말을 눈빛과 온기가 전해 줄지도 모르니. 그렇게, ‘무책임하고 도리를 모르는 한량’을 자처하며 하루하루 죽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여기 존재하지만, 내일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저물기를 기다리는 나날들. 끝에 닐은 예의 리듬으로 유유히 병원을 나와 다시 어딘가의 호텔로 향한다. 첫 장면에서 그의 시선을 취했던 카메라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의 빈자리를 가만히 비춘다. 그는 그렇게 -해가 누군가의 하늘에서 사라지듯-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며 존재하기를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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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다운적 정서에 취할 수 있었던 데엔 -보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지 않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화자에 이입해 극을 이끌었던 팀 로스의 역할이 컸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한데 중심이 곧고, 멍한 듯 한데 그 깊이가 너무 아득해 감히 가늠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다른 성격의 캐릭터임에도 그 연기의 생소한 무게 탓에, 얼핏 <트루 디텍티브>(HBO) 속 매튜 매커너히를 떠올리기도 했다.
-별로 중요치 않은 곁가지-
썬다운을 본 날 내면에서 일어난 일.
한 달 째 The Cactus Blossoms의 레코드만 듣고 있다. 접하는 모든 콘텐츠에 이들의 곡을 겹쳐 보는 별로 건강하지 못한 버릇이 들었다. 닐 베넷을 관찰하는 와중에도 몇 곡을 떠올렸다. 정적으로 가득 찬 엔딩크레딧을 관람하는 동안 머릿속에서 그 곡들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주로 글에서 ‘딥 다크 블루’로 분류해 놓았던 잭 토리의 곡들이었다. 극장을 나오니 날이 저물어 있었다. 비가 적당히 내렸고 거리는 한적했다. 썬다운적 정서에 취해 천천히 걷기 딱 좋았다. 눈에 초점을 풀고 귀에는 칵투스 블라썸즈를 꽂아 놓은 채였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겹쳤던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완벽히 들어맞는 곡은 찾지 못했고, 몇 트랙에서 각각 몇 구절 정도가 닮아 있었다.
엮고 발전시켜서 글로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나치게 개인적인 포인트였다. 다만 아무 접점이 없는 다른 분야의 예술이 취향적으로 맞물리는 이 드물고 황홀한 순간을 우울하게 음미하고자 했다. 그 모먼트의 브레이크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걸렸다. ‘Downtown’의 가사가 귀에 들어왔을 때였다. “Guess you never had to do anything you don’t wanna do. It must be nice to live like you. 넌 아마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했던 적이 없었겠지. 너처럼 살면 참 좋을 거야.” 마치 닐 베넷을 염두에 두고 쓰기라도 한 것처럼 들어맞는 구절이 아닌가. 불로소득이 보장되어 있기에 여행으로 방문한 아카풀코에 머물러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앞 문장들은 별로 진지한 뉘앙스로 쓴 것들은 아니니 농담조를 입혀 읽기를 바란다. 글에도 적었지만 ‘억만장자 2세’ 설정을 별 고민 없는 픽션적 허용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당연히). 작품에서 받은 느낌이 휘발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현재 내 뇌의 풍경이 선인장 꽃밭이 돼버린 나머지- 소비하는 모든 것을 죄다 칵투스 블라썸즈와 엮어버리고 있다는 자각을 새삼 하며 피식 웃은 정도였달까. 뭐, 디톡스 의사는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