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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Sep 03. 2022

리키 ‘주프’ 박에게 던지고픈 물음

<놉>(2022)


 

<놉(Nope)>(2022, 감독: 조던 필)

- 놉 리뷰… 라기보단 주프 리뷰 Nope review but only about Jupe (& Gordy)


* 위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던 필의 작품에 스티븐 연이 출연했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이 일었다. ‘경매 파티’ 시퀀스에 짧게 등장한 <겟 아웃>(2017) 속 유일한 아시안(표면적으로만 보면 아시안 혐오 이미지로 헷갈리기도 하는)에게서 살짝 불쾌하면서도 흥미로운 인상을 받았던 바 있어서였다. ‘인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러키스 스탠필드의 ‘바로 그’ 연기를 목격한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바람에 전후 몇 분의 장면들이 곧바로 어렴풋한 기억이 돼버린 탓이다.


조던 필이 그릴 아시안 아메리칸은 어디에 서서 무얼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했다. 아마 영화가 인종적 소수성을 삭제하지는 않았을 듯한데, 인물 본인이 인지하거나/ 외면하거나/ 백인의 것을 좇거나- 등의 ‘선택’을 하지 않을까 짐작했다. 주인공이기에 오히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다니엘 칼루야의 역할보다는, 선공개된 스틸컷 속에서 카우보이스러운 유니폼을 입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스티븐 연의 정체가 사실 더 알고 싶었다.



<놉>(2022). 왓챠피디아.


<놉>은 결이 풍성하고 영화적 재미가 상당한 작품이었다. 실제보다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졌는데, 지루했다는 뜻은 아니다. 전개의 흐름을 예상하는 순간, 영화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장르를 교차하기를 되풀이하며 매번 다른 종류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성공한다.


스튜디오, OJ 이름을 듣고 뜨악한 시선을 보내는 유명 배우를 비롯해- 무대에  럭키와 그를  덩어리의 에일리언처럼 응시하는 스텝들은 전부 백인. ‘ 흑인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아직도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한 할리우드  비백인-특히 흑인-들이 겪어온 비가시화와 착취를 작품에 어울리는 톤으로 건드린다. 국내 개봉 시기가 <엘비스> 유사하다는 점이 살짝 공교롭다,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의 전형을 닮은 클라이맥스와 결말에 좀 맥이 빠지기는 했으나, 그것 역시 의도된 설정이었으리라. 근육질의 백인 남성이 ‘라스트 히어로’가 되고, 가녀린 백인 여성이 ‘파이널 걸’로 남는 고전적 결말, <놉>은 그것에 역시 ‘놉’이라 답한다. 백인들의 판인 할리우드에서 제 유산을 지키려 애쓰는 브라더와 멋지게 바이크를 몰며 여자와 연애하는 시스터. 자신들의 소수자성을 인지하는 흑인 남매가 라스트 히어로와 파이널(&히어로) 걸로 남는 결말은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내 덕질 뇌는 이를 인식함과 동시에 자동으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9에서 브룩과 도나가 나눈 ‘파이널 걸’에 관한 대화와, <커뮤니티> 시즌2 일명 ‘좀비 할로윈’ 에피소드에서 아벳이 트로이를 향해 비장하게 던진 대사를 떠올리고 말았다.)


<놉>(2022). 왓챠피디아.


그러나 ‘잘 만들었다’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영화적 취향을 건드리는 건 별개의 영역이다. 자꾸 생각하다 집착하게 되는 무언가가 <놉>에 있을 거라 예상하진 않았는데…(그러니까 있었다는 뜻이다.)




영화를 보면 매번 글이 나오는 건 아니다. 쓰기 시작하게 ‘될’ 때는 주로 나도 모르게 곱씹으며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때로 물음표는 전체적 연출이나 서사가 아닌 주인공 외의 인물이나 특정한 장면을 맴돈다. 이 주제를 꺼낼 때 최근 몇 년 간 자주 드는 예는 <썸머85>(2020), 다비드의 뺨에 흘러내린 예상치 못한 눈물이 리뷰와 별개의 짧은 글 ‘다비드 구르망에 관한 짐작’을 남기게 했었다. <놉>에서 그것은 1998년 그날을 되새기는 주프의 묘한 얼굴이었다.


작품의 오프닝에 ‘골디스 홈’을 배치한 까닭은 ‘모든 일의 발단’- 주프가 “나쁜 기적”을 불러들이게 만든 트리거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이 에피소드는 영 (좋은 뜻으로) 이상했다. “배드 골디” 비디오와 패러디극에서 사람들이 찾는 자극은 ‘(루카 구아다니노가 싫어한다던) 호러를 위한 호러’가 주는 종류의 것이리라 짐작한다. <놉> 속 골디 에피소드의 자리는 오히려 거기서 멀리 있었다. 일단 작품은 골디의 ‘나쁜 행동’ 대부분을 소리로만 전달하기를 택했다. 그리고 감지된 그 ‘이상함’은- 일종의 주관적/감정적 지표라고 할 수 있겠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2018)를 보면서도 아주 같지는 않으나 비슷한 구석이 있는 정서를 느낀 바 있었다.


히어로가 무찌를 대상인 ‘그것’은 맹수적 존재다.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작품과 프로타고니스트가 긍정하는 가치에 반anti하는 행위를 하는- ‘인간의 습성을 지닌’ (딱히 악당은 못 되는) 안타고니스트는 말하자면 주프다. 아마도 <놉>에서 가장 콤플렉스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주인공 OJ나 에메랄드는 화자의 위치에 있기도 하거니와 인물 묘사가 ‘정방향’이다. 관객은 전개를 따라가며 이들의 캐릭터성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 외부의 영향을 받아 하는 선택과 행동은 (대개는) 즉시 이해가능하다. 엔젤은 대놓고 별 깊이 없는 ‘감초’이고, 홀스트는 별나지만 결국 가장 단순하고 일관된 기준을 지닌 자였다(충격적이었으나 깔끔하게 납득되는 퇴장이었다).


그러나 주프의 묘사 방식은 다르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려면 신경을 좀 곤두세워야 한다. 오프닝에서 관객은 카메라가 취하는 시선의 주인을 모르는 상태다. 헤이우드에게 말을 구입하는 단골 거래처이자 그들의 농장을 손에 넣으려 하는 지역 자본가처럼 등장한 주프, ‘배드 골디 시츄에이션’이 바로 그가 겪은 일이었음이 밝혀지자 오히려 인물파악은 더 어려워진다. 트라우마가 됐을 법한 경험을 늘어놓을 때 비친 흥분의 정체도 좀처럼 알 수가 없다. 이후 어떤 시점에 이르러서야 오프닝의 시선이 그의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주프는, 등장할 때마다 한 겹씩 벗겨지는 인물이다.


<놉>(2022). 왓챠피디아.


시트콤을 만든 자들과 관람한 자들에게 골디는 무엇이었을까, 아니- 골디의 입장에서 인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인간은 그를 가두고, 조종하고, 조롱한 가해자가 아닌가. 그는 숨어서 벌벌 떠는 주프를 발견하곤 해치려 드는 대신 친근감/공모의 표시를 하듯 주먹을 내밀지만, 마주 내민 상대의 주먹이 맞닿기 전 죽는다. 골디는, 제가 공격한 자들과 주프를 같이 분류하지 않았다. 혼자 좀 다르게 생긴 이 조그만 생명체가 자신과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고 친구로 택했는지도. 아시안/어린이라는 소수자성을 지닌 주프가 차지했던 역할이 명시되진 않지만, 98년도 미국의 가족 시트콤이라면… ‘아시안 키드’ 그 자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골디를 기억하는 주프의 정서에는 공포와 흥분이 동시에 있는데, 무의식중에 어떤 ‘해방감을 느꼈’던 건 아니었을까.


그러나 주프가 간직한 것은 ‘맹수에게 선택 받았다’는 인상이다. 아직 경험이 적고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았을 시기에 겪은 일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그것’을 불러들이는 무대에 당시 함께 출연했던 배우(첫사랑)를 앉혀 놓기도 하는- 주프는, 남은 평생을 그 장면 속에서 산다. 기억을 다시 마주해 재해석하기를 거부한다. 제 소수자성을 인식하는 대신 엘리트주의에 묶이기를 택한다. 와이프가 금발의 백인인 것 역시 의도된 연출일 가능성이 높다. 무의식중에 자신을 시트콤 속 백인 가부장의 위치에 투영이라도 했던 건지, 그럼에도 부족함을 느꼈던 건지. 그는 왜 ‘그것’을 마주하려 했을까, 공포의 대상이 느슨한 주먹을 천천히 들이민, 그 안도와 흥분의 순간을 재현하고 싶었을까?


연출을 통해 럭키나 골디에 비유되는 ‘그것’은 어쩌면 자본인가, 인간으로부터 나왔으나 길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맹수의 습성을 지닌, 동시에 블랙홀 역시 닮아 있어 끝없는 식욕으로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혹은 ‘골디스 홈’을 파괴한 골디처럼 주프의 쇼를 휩쓴 걸로 미루어- 오히려 쇼비즈니스에 멸망을 고하려 강림한 초월적 존재인가? 그도 아니면 시네마 자체인가? 만약 그렇다면 헤이우드 남매가 그것을 이기는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정제되지 않은 질문의 형태로 던져 봤다. 깊이 고민하고 내놓은 문장들은 아니다. 성의 없대도 어쩌겠나, 나는 제멋대로인 관객이므로 이 훌륭한 호러 SF(+웨스턴) 풍자극 속 상징들을 찾아내 영화 밖으로 끌고 나오기보단, 영화 안으로 들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주프의 팔을 붙들고 묻고 싶었다, 당신이 하늘에서 발견한 건 무엇이었냐고, 거기서 대체 뭘 찾고 싶었냐고.


<놉>(2022). 왓챠피디아.



이토록 복잡하고 ‘안 착한’ 욕망을 지닌 아시안 아메리칸 안타고니스트라니, 이건 ‘내 삶에 필요한지도 몰랐던 필수요소’였다. (인물이 스티븐 연의 섬세한 전달법 덕을 보기도 했다.) 조던 필이 <놉>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암시했다고 하는데, 만약 씨퀄 을 관람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이 어리석고 매력적인 인간을 좀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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