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어>(1997)
<큐어(CURE)>(1997,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 위 작품의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리미널 마인드>(CBS)의 한 에피소드, 두 요원은 사형집행을 앞둔 연쇄살인범의 계획에 넘어가 그와 함께 면회실에 갇힌다. 수갑은 풀려 있고 간수도 부를 수 없는 상황, 요원들이 그를 제압한 방법은 완력이 아니라 ‘당신이 범죄를 저지른 까닭’에 대한 설명이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이 이러한 범죄수사물을 ‘즐길 수 있는’ 바탕에는 결국 어떤 식으로든 설명되거나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있다. 설정된 ‘악’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이 적당히 어렵고 복잡하다면 그것이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의 희열은 보다 커질 테다.
범죄수사물의 형태를 띤 작품 <큐어>, 일단 이 영화는 이미지나 사운드를 전시해 시청각에 일시적이고 강렬한 자극을 주는 일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물리적 폭력의 묘사는 효율적이다. 첫 살인 장면은 경쾌한 음악과 함께 짧게 끊겨 편집돼 있다. 피와 칼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건 분명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들이다.
참을성이 있는 <큐어>의 장면들은, 관객에게도 참을성을 요구한다. 지저분하게 낡아 있거나 창백하게 말라 있는 것들을 정갈하게 배치해 놓은 화면을 들여다보며 탈수기가 돌아가는 소리나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눈과 귀가 고요로 가득 차오르며 기이한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든다. 비워냄으로써 채우는 대상은 때로 인간이다. 정신질환을 앓는 아내를 향하는 타카베의 시선은 공허하고, 목을 멘 아내의 환영을 본 그의 고통은 울음이나 비명이 아닌 소리 없는 절규로 표현된다.
핸드헬드를 사용한 듯한 롱테이크가 여럿 있었다. 프레임을 옮기거나 불을 밝히며, 감추었던 것을 자연스레 드러내거나 반전을 시도한다, 한 테이크 안에서. 그럴 때마다- 이 테이크도 영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말이 치달을 곳이 몹시 궁금해 어서 닿기를 바라면서도 영화가 영영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이 드는.. 묘한 관람 경험이었다. 마지막 장면을 목격한 후 이 이야기는 모든 관객이 생을 마감하고 나서도 완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큐어>가 무서운 다른 까닭은, 알 수 없어서다. 무지의 대상은 미스터리하고 단일한 상대방에서 서서히 불특정 다수의 ‘나’들에게로 옮겨간다. ‘내가 무엇인지 모른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른다’, 스크린에 퍼지는 공포는 관객에게 전염되어 엔딩에서 극대화된다. 극장을 나와서도 관객은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들이 왜 그랬는지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안다. ‘최면술과 사교에 빠진 남자가 빛과 물을 매개로 최면을 걸어 평범한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르도록 교사한 사건’이라 요약하면 논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마미야가 저지른 일은 그런 말들로는 설명되지 않는다-아니 그 전에, 마미야가 무언가를 ‘저질렀다’고 말할 수는 있는가.
자신을 텅 비우고 다른 것을 담는 그릇이 된 마미야는 자신에 관한 것은 다 잊어버린다/혹은 잊기를 택한다. 그는 제 사진을 창에 비친 상과 비교하며 ‘닮았다’고 했다가 결국 ‘이 남자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잇는다. 그는 타카베에게 묻는다, ‘형사로서의 당신과 남편으로서의 당신 말고, 진짜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정말로 무엇인가?’ 이는 조종의 수단일 뿐인가, 유효한 물음인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반복되는 질문이 자극하는 것은 상대의 입이 아니라 마음, 이 최면은 속에 무언가를 주입하는 방향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마미야의 기억상실은 그 문답을 스스로 주고받은 결과 같기도 하다. 본인도 답을 내릴 수 없었기에 학습된 자아를 기억에서 추방했던 것일까. 그의 평온은 ‘내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앎’에서 오는가.
엔딩크레딧 아트를 보며 타카베가 창문에 서린 김을 닦은 후 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그를 비롯한 인간들이 제 시야가 닿는 만큼만의 세상을 보며 살고 있음을 비유하는 연출이었을까, 아니면 반대로 그가 마미야가 그린 프레임에 갇히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마미야를 죽인 행위는 정의되지 않는 범죄를 삭제하는 최후의 방법이었을까, 아니면 최면의 결과에 불과했을까, 그도 아니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내린 답이었을까.
마미야가 갇힌 방, 타카베는 물건을 부수고 제 이야기를 쏟아낸 후 라이터를 켰다. 마미야는 감탄했고, 물이 흘러내려 불을 껐다. 작품은 상황에 매듭을 짓지 않은 채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이후의 타카베를 연기하는 야쿠쇼 코지에게 뜬금없게도 <히든>(1987) 속 카일 맥라클란의 로이드가 겹쳤는데, 돌이키니 별로 닮은 것 같지는 않았다(그보다 로이드와 유사한, 아니 명백히 유사할 수밖에 없는 이는 <산책하는 침략자>(2017) 속 마츠다 류헤이의 신지일 테다). 사실 보다 가까운 느낌은 <리틀 조>(2019) 속 배우들의 모호한 위화감이었다. 리틀 조의 그것처럼 마미야가 퍼트리는 바이러스에는 실체가 없었다.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 밖 나 자신에 대한 물음들에 답을 내리기를 포기하고 아무것도 모름을 인정하니, 어쩌면 마미야의 평온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동시에 위험을 감지했다. 끊임없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아내려 노력하며 고뇌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마미야는 어째서 괴로워하지 않고 편안해하는가. 나는 <큐어>의 최면에 걸린 것인가 아니면 치료제의 효과를 본 것인가? 알약은 푸른색이었는가 붉은색이었는가? ‘행복’에 감염된 인간들이 가득했던 <리틀 조>의 세계와 닮아 있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이었나. ‘큐어/치료’가 지칭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억을 잃은 자에게 기억을 되찾게 하는 행위인가, 혹은 외려 꽉 찬 기억을 의심하고 비워내는 행위인가.
이 세계에 들어선 관객은 선악과 옳고 그름 등- 당연해 보였던 것들을 더이상 당연하게 볼 수 없게 된다. 작품은 끝내 해답을 내리지 않고 물음표의 방향을 관객에게 돌린다. 그것을 받아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던 마미야를 따라- 이 영화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는데, 결국 그 답은 답이 아니라 무수하게 연속되는 질문의 형태를 이루다 그만 흩어지고 말았다. <큐어>의 끝에 있는 것은 희열과 해결이 아닌 허무와 의심, 끝없고 답없는 질문이다. 극장을 나서는 관객의 손에 그것을 남길 용기와 자신이 있는 스토리텔러의 존재는 1997년에 그러했듯 지금도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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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조>를 <큐어>와 나란히 놓았던 부분을 읽으며 비교의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 관람 순서가 영화 제작 년도 순서와 일치하지 않아 생긴 문제, 나는 ‘<큐어>를 보던 도중 <리틀 조>가 가끔 떠올랐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예시카 하우스너가 플롯이나 분위기의 흐름을 구성하며 <큐어>를 참고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또 떠올랐던 것은 <MIU404>(TBS)의 쿠즈미, 그는 이야기 안에서 메피스토펠레스에 비유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이렇듯 떠오르는 작품이 여럿이라는 건… 이 영화가 어떤 처음이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