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제모름 Aug 04. 2022

레다가 레다들에게

<로스트 도터>(2021)



<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2021, 감독: 매기 질렌할)

 

* 위 작품의 장면과 핵심 전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레다의 손에는 오렌지가 들려 있었다. 그리스에서의 일들이 전부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과 함께, 프랑스의 별장에서 글을 쓰던 사라 모튼이 떠올랐다. 여름에 일거리를 들고 이국의 휴양지를 찾은 중년 여성 주인공, 줄리와 니나의 존재… 인물과 전개의 표면적 설정에도 <스위밍 풀>(2003)과 닮은 데가 있었지만, 아주 다른 이미지를 지닌 샬롯 램플링의 얼굴이 올리비아 콜먼의 것에 겹쳤던 결정적인 까닭은 인물의 성격과 표현법에 있는 유사성이었다. 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그들은 혼자만의 순간을 방해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주변을 경계하다가도 별안간 다가가며, 미묘하거나 철없고 때로 위험한 욕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스위밍 풀>과 <로스트 도터>가 아주 다른 작품이듯 사라와 레다의 내면 풍경도 전혀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프랑스의 수영장에서 사라가 원했던 것은 결론적으로 항상 분명했고, 순간의 모호성들도 다 특정한 욕망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 정중앙에 자리했던 것은 상상 속에서도 밖에서도 오로지 ‘이야기’, 그것을 위해 스스로마저 기꺼이 대상화했다. 그의 작가적 시선과 일치했던 카메라는 내내 전지적이며 관음적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의 해변에서 레다의 마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이슈는 무엇이었는가, 그를 불안하게 하거나 분노케 하고 또 슬프거나 벅차게 한 것은.


<로스트 도터>(2021). 왓챠피디아.



자리 이동을 둘러싼 언쟁부터 인형에 현상금이 걸리는 웃지 못할 사건까지, 작품은 레다의 근처에 ‘위험한 가족’을 배치해 스릴러의 공식을 따르는 한편 레다의 마음과 감정을 추적하는데, 전자는 후자를 위한 수단이다. 탐스러운 과일을 들추자 곰팡이와 벌레가 드러나고, 인형의 입을 벌리자 갯지렁이가 기어나온다. 편안해 보이지만 실은 곤두서 있는 레다의 상태, 어쩌면 육아의 이면을 빗댄 모양이었을지도. 베개에 떨어진 매미나 등에 떨어진 솔방울 역시 심리를 반영하는 소품으로 보인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주변 인물들: 대가족, 접근하는 라일이나 윌, 극장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년들까지도 레다의 마음을 흔들기 위한 장치다. <로스트 도터>의 시선과 전개는 철저히 레다중심적이다.


레다가 집요하게 관찰하는 니나는 아마도 젊은 그의 재현, 우연히 만난 그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문득 떠올린 것인지 과거 자신과의 대면이 필요했기에 그가 등장한 것인지는 불분명하고, 중요치도 않다. (어쩌면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 대부분이 내면의 여정일지도 모른다) 니나는 손이 많이 가는 딸과 함께 다니고, 윌과 도피성 만남을 지속하며, 레다가 그랬듯 지쳐 떠나고 싶어한다. 레다에게 호감을 보이며, 미래에 그가 ‘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레다는, 현재의 레다가 되고 싶었나.


<로스트 도터>(2021). 왓챠피디아.


작품은 레다의 과거사를 기승전결에 맞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레다가 말을 건네는 첫 번째 대상은 자기 자신이어서다. 회상의 카메라는 레다의 신체와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클로즈업하며 움직인다. <패싱>(2021)에서 아이린의 주변을 맴돌던 카메라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인물과의 물리적 거리를 최소화한 채로 흐르며 몸에 묻어나는 심리와 감정을 담아낸다. 다만 <로스트 도터>의 카메라는 레다의 감각적 기억에 의존한다. 잡고 놓아주지 않던 비앙카의 손, 두피를 거칠게 쓸던 빗날, 자신을 만지던 남편과 하디, 혹은 자기 자신의 손. 성적인 긴장은 남편이나 하디와의 직접적인 터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낭여행을 하던 이탈리안-자신에게 감탄했던-과 교환했던 노래, 시선과 키스에도 미묘하게 존재했다.


어쩌면 레다의 욕망은 늘 그 자신에게로 수렴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디가 연단에서 레다의 작업에 감탄하던 순간의 기억, 그 사이사이에는 그와 레다가 서로의 몸을 탐하는 컷이 삽입돼 있다. 레다가 느끼는 욕망의 근원과 목적지를 암시하는 표현이 아니었을까, 또한 그것이 그의 머릿속에 저장된 편집본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이렇듯 작품은 레다의 입장에서 그가 회상하는 만큼의 과거를 서술하는데, 본인도 자신을 그다지 ‘변호’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는 삼 년 동안 딸들을 떠나 있었을 때 ‘어메이징’함을 느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내내 품고 있다. 주목할 것은 죄책감의 포인트가 행위가 아닌 감정에 있다는 점이다. 딸들이 곁에 없을 때 결핍(보고싶다는 감정과는 다르다)을 느끼지 않았으며 오히려 만족했다는 것에 대한, ‘당연히 지녀야 할 모성’의 부재에 대한. ‘모성’, 그것은 부모 모두가 아닌 어머니에게만 요구되는 이상한 가치다.


아버지는 늘 그래왔듯 ‘부재’한다. 이기적인 아버지들은 너무나 ‘흔하고 당연하므로’ 작품은 이를 도마에 올리지조차 않는다. 레다 자신이 그들에게 별 가치를 두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이들의 양손은 의도치 않게 가볍다. 그 묘사에 작품은 많은 에너지를 할애하지 않지만 짐작은 어렵지 않다. 니나의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 집으로 돌아와 아내를 껴안고 딸을 예뻐하기만 한다. 레다의 남편은 딸을 키우는 일에 대한 불안을 토로하는 레다에게 “당신은 잘 할거야.”라고 답했었다. 이것은 진심어린 위로, 육아의 주체에서 자신을 쏙 빼놓는 이 남자의 대사에는 놀랍게도 책임 회피의 의도가 없다. 레다가 떠나던 날 “쟤들을 내가 어떻게 하라는 거냐”, “당신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기겠다”고 말하던 그는 과연 삼 년 후 레다가 말했던 불안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을까?


<로스트 도터>(2021). 왓챠피디아.


‘엄마’라는 경험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켈리에게 레다는 ‘당신은 아이를 키워 보았냐’고 뼈있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부담과 책임을 주로 떠안는 건 어머니, 존재하든 부재하든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방향도 이쪽이다. (역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하디는 “결혼한 당신이 시작해야 해”라고 유혹했고, 레다는 기꺼이 나쁜 여자가 되어주었다. 그가 “딸들과 통화하는 거 싫어.”라고 했을 때, 하디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며 불편해했다. 행동으로 남편을 배신하는 여자는 괜찮지만 ‘감정적으로 딸을 배신’하는 여자는 너무한가, 프로페서 하디? 딸들과 통화하는 게 싫다고 말하는 엄마, 방문을 세게 닫아 유리를 깨뜨린 엄마, 인형을 창밖으로 던져 망가뜨린 엄마, 딸들과 남편을 떠난 엄마…. 레다가 누구이고 당시 무엇을 겪었는지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하는 이 단편적 묘사들은, 수많은 픽션과 논픽션이 ‘부덕한 엄마’를 표현해 온 방식이다.


<로스트 도터>는 ‘위대한 모성’에 두루뭉술한 찬사를 보내지 않는다. 대신 ‘부덕’하고 개인적인 엄마, 딸을 사랑하면서도 피곤해했던-그들을 사랑했던 만큼 자신을 사랑했기에 이기적인 엄마가 되고 말았던 여자를 화면의 중심에 불러냈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레다’를, 세상이 의도적으로 외면하던 이면의 이야기를.


<로스트 도터>(2021). 왓챠피디아.


레다는 인형을 통해 스스로를 심리적 궁지에 몰아넣는다. 니나는 레다와 공모할 것을 거부하고, 그에게 선물 받은 핀으로 그를 찌른다. 스스로에게 준 벌, 그 자학과 함께 레다는 고여 있던 감정들을 터트렸고, 비로소 과거의 자신을 용서한다.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듯 햇살을 받으며 깨어나 비앙카에게 전화를 건다. 딸들과의 추억을 상징하는 오렌지가 손에 들려 있다. 딸들을 사랑하는 것도 맞고, 그들과 떨어져 있어 행복했던 것도 맞다. <로스트 도터>는 레다가, 열렬히 사랑하는 레다 자신과 화해하는 내면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짚어 볼 것은, 니나가 상상의 산물이든 실재하는 인물이든 레다가 그에게 자신을 겹쳐보면서도 완전히 동일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다르지 않으며 같지도 않은 여자들이다. 레다가 첫 번째로 말을 건네는 대상은 자신이지만, 그가 지나는 내면의 여정이 아이를 키우는 모든 여성의 이야기로 확장될 가능성을 지닌다는 점이, <로스트 도터>가 위대한 까닭 중 하나다.


<로스트 도터>(2021). 왓챠피디아.



+

얼마 전 이정재가 첫 연출작으로 호평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왠지 그럴 것 같았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볼 일은 없을 작품이었다. 그의 영화에는 아마 그 자신이 출연했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맞았다. 매기 질렌할이 감독으로서 영화를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왠지 그럴 것 같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도 모르게 예상했던 넥스트 스텝이었다고 할까. 그 자신이 배우로 출연하지 않았다는 것도 당연하게 다가왔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찬사도 딱히 놀랍지 않았다. 킨더가든 티처 속 그의 연기에서 어렴풋이 감독의 시선을 목격했던 듯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래와 해준으로부터 비롯된 파편 여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