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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Dec 08. 2022

하나됨의 여정

카니발의 러브이즘



<본즈 앤 올(Bones and All)>(2022, 루카 구아다니노)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악틱 몽키즈의 히트송 ‘Do I Wanna Know?’, 화자는 “거의 매일 밤 ‘너’의 꿈을 꾸고, ‘너’를 떠올리게 하는 튠을 반복해 연주하다 잠든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Do I wanna know? If the feeling flows both ways. 나는 알고 싶은가? 이 느낌이 양쪽으로 흐르고 있는지.” 그는 말한다, “반복해서 네게 키스하기 직전에 이르러. 내가 느끼는 걸 너도 느끼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우린 함께할 수 있어, 너도 원한다면.” <본즈 앤 올>, 매런은 자신을 일방적으로 따라온 설리에게 말한다, “But it (the feeling) gotta both ways. 그렇지만 감정이 양쪽 모두에게 있어야죠.” 그렇다, 함께하려면 “감정이 양쪽으로 흘러야” 한다, “내가 느끼는 걸 너도 느껴야” 한다. 관계로서의 사랑에 있는 기본적인 법칙, 드물고 아름다운 현상이다. 알렉스 터너는 그것을 알았고, 매런과 리 역시 알았다. 설리는 그에 무지했거나 알고도 무시했다. 사랑이 기준이 되는 세계에서 그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다.

 

영화가 말하는 사랑은 일방향으로 넘치는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다. 서로를 향해 흐르고 연결되며 하나를 이루는 순환의 물결이다. 상대의 방식에 대한 존중, 최선을 다해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노력,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깨달음의 과정… 등을 포함하는, 움직이는 관계다. 매런이 말했듯 ‘양쪽의 감정이 만나야만’ 가능하다. 살인을 하지 않는다는 설리는 그래서 안타고니스트다. 그를 꺼림칙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머리카락 타래를 모으거나 자신을 삼인칭으로 부르는 버릇이 아니다. 제 딸뻘인 매런을 향한 ‘그런 눈빛’도 핵심은 아니다. 설리가 “not nice”한 결정적인 까닭은, 왜곡된 해석으로 사랑을 욕보였다는 점이다. ‘내가 이만큼이나 줬으니 너도 줘야 한다’며, 제 감정에 집착해 일방적으로 마음을 들이밀었다. 작품은 매런이 그의 심장을 찌르고 결국 몸에서 분리하게 만듦으로써 완벽히 응징한다.


<본즈 앤 올>(2022)


유전, 억누르기 힘든 충동, 안고 살아가야 하는 굴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식욕은 <로우>(2016)의 그것과는 조금 달라서, 사랑하는 이를 필연적으로 해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러나 동급생의 손가락을 물어뜯는 매런의 동작은 왠지 섹슈얼한 텐션과 함께 시작됐다. 로맨틱한 키스를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엔 다른 종류의 긴장이 섞여든다. 사람의 살을 탐하는 입이 다음에 무엇을 원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의 감각, 작품에 맴도는 묘하고 특별한 공기의 구성 요소 중 하나다. 결국 한쪽이 다른 한쪽을 먹을 것이라는 ‘우려’는 실현되나, 행위가 품은 정서는 대부분 관객의 예상을 깨트리거나 넘어섰을 테다.

 

카니발리즘은 화두이기보단 픽션적 도구다. 작품은 동일한 ‘결함’ 혹은 ‘성향’을 지닌 이들이 각자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사랑하는 태도에 초점을 둔다. 자신을 먹으려 했던 아버지를 먹어치우고 괴로워하는 리, 딸을 먹는 것이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라 믿었던 바바라, 제 기나긴 외로움의 무게를 타인에게 강요했던 설리, 그리고 다시… 죽어가며 “나를 먹어 줘.”라고 애원했던 리와 그를 먹은 매런이 있다.


<본즈 앤 올>(2022)


영화는 관객이 단지 인물의 시선을 취하는 것을 넘어 인물이 느끼는 감각을 어느 정도 체화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매런의 눈이 될 때 카메라는, 흐른다. 한 점을 응시하다 휙 돌아 다른 점을 향한다. 리의 앙상한 손에서 팔로, 서서히 얼굴로 이동한다. 빠른 컷 전환으로 매런의 꿈을 보여 주기도 한다. 홀로 남은 리의 꿈을 담는 표현법도 유사한데- 화면과 소리는 일치하지 않는다. 함께한 순간들과 매런에게 보여졌을 제 이미지들이 지나가는 와중, 관객은 아마도 그가 아버지를 먹는 순간의 것일 소음과 괴성을 듣게 된다.

 

“You seem nice.” / “I am nice.” / “Do I too nice?” 매런이 바로 답하지 않자 리의 얼굴에는 그늘이 진다. 매런은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리는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리의 마음 일부는 아버지를 먹어치운 그날에 머물러 있다. 무의식중에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남자들을 타겟으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길에서 만난 제이크는 리가 “중독자 같다”고 말한다. 무엇에 대한 중독인가. 사랑이나 관계 따위의 단어를 떠올렸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그보단 죽음이나 자기파괴에 가까우리라는 짐작에 닿았다.

 

제이크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상대가 필요한  쟤가 아니라 바로 라고. 주도권을 되찾으라는 충고였을까,  마음을 똑바로 보라는 조언은 아니었을까. 그와 브래드의 관계도 어쩌면 사랑이다. ‘네가 하는 것을 하고, 네가 느끼는 것을 느끼고픈,  내가 하는 것을 너도 하고, 내가 느끼는 것을 너도 느끼기를 바라는욕망의 극단적 표현. 위험한 해석이려나. 제이크의 말에 담긴 의도가 무엇이었든 관계로서의 사랑은- 상대에게 기꺼이 주도권을 넘기는,  하루에 네가 필요함을 인정하는 제스처를 포함한다. 서로가 없는 시간을 보낸 리와 매런은 깨닫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렇게 ‘사랑할  아는이들이었다.

 

“나는 어때, 좋은 사람이야?”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매런은, 시간이 흐른 후 완전한 진심과 이해를 담아 건넨다. 아버지를 먹었음을 털어놓으며 리는 묻는다,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매런은 눈을 맞추며 답한다, “널 사랑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 나라도 똑같이 했을 거야.”. 포스터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했다, 매런과 리의 마음이 하나되는. 이마를 맞댄 두 사람, 그림자와 빛 탓에 머리카락과 피부의 색이 섞인 듯 보인다. 얼굴과 몸이 연결되어 하트를 이룬다. 그 안에 적힌 제목 “Bones and All”, 거기서부터 이미 영화는 결말을 암시하고 있었다.


<본즈 앤 올>(2022)


매런은 살고 싶었다. 그는 “사람들people”이 하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갈 이유와 방법을 찾기 위해 떠났고, 그 길에서 사랑을 만났다. 그는 사랑 속에서 살기로 했다. 리는 죽고 싶었다. 그의 여정은 서서히 자신을 죽이는 과정처럼 보였다. 죽지 못하는 까닭 혹은 죽음을 미룰 핑계였던 카일라가 세상에 없어지자 리는 삶의 끈을 놓는다. 그는 사랑 속에서 죽기로 했다. 매런은 리를 사랑했고 이해했으므로,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가족을 상대에게 보이길 꺼리던 두 사람은 끝내, 집home을 잃은 서로에게 고향home이 되었다. 매런과 리가 찾은 길, 이 로드무비의 도착지는 사랑이었다.

 

“나를 먹어 줘, 뼈까지 전부. Eat me, bones and all.”, 그것은 마음의 일체화를 이룬 상대를 향한 가장 온전하고 최종적인 사랑의 고백이었다. ‘날 가져’, ‘난 네 거야’, ‘너의 일부가 되고 싶어’, 따위 로맨틱한 멘트들의 말그대로의 실현, 나를 먹어서 너와 하나로 만들어: 어쩌면 동족을 먹는 자만의 비극적 특권이다. 각자에게는 끔찍한 운명이었던 카니발리즘은 두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고, 이 사랑에 유일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매런이 리를 먹는 장면에는 ‘먹는다’의 뉘앙스가 제거돼 있다. 그가 설리 옆에서 죽은 사람을 뜯어먹던 순간처럼 이가 살을 찢고 씹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음악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어, 벌어진 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이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리의 입술에서 목으로, 다시 가슴으로 내려가는 매런의 움직임은 꼭 애무처럼 보인다-아니 실은 애무가 맞다. 진짜를 왜곡해 보여주는 트릭이라기보단 오히려, 보이는 것과는 다른- 행위의 본질을 영화적 마법을 통해 드러내는 연출에 가깝다. 다음이자 마지막 장면, 카메라는 두 사람을 멀리서 담는다. 사랑을 나눈 직후인 듯 윗옷을 입지 않은 채, 매런이 리를 품고 있다. 바로 전 묘사된 행위가 사랑을 나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둘은 하나가 되었다는 암시일 테다. 작품은 이 결말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지도 않고, 관객을 헷갈리게 하지도 않는다. 픽션적 허용으로- 이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카니발리즘을 소재로 한 <본즈 앤 올>은 매우 분명하고 아름다운, 온 힘을 다해 사랑을 긍정하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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