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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Jan 15. 2023

가가린, 우주에 잠들다

<가가린>(2020)



<가가린(Gagarine)>(2020, 파니 리에타르/ 제레미 트로윌)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 근교 도시 Ivry-sur-Seine의 ‘Cité Gagarine’은 프랑스 공산당의 거대 공공 하우징 프로젝트로, 1961년 건축되었다. 1963년 유리 가가린의 방문 이후 그의 이름을 따 불리게 됐다. 한때는 공산당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떠난 가가린의 아파트들은 해외 이주민들이 채웠다.(…….) 점점 거주민 실업률과 빈 집이 늘었고, 낡은 시설이 오랫동안 방치되곤 했다. 마약 거래 거점이 되어 경찰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도시 역사가 Emmanuel Belleanger는 가가린을 “프랑스 공산당 경험의 쇼케이스”라고 평가한다.(……)"

-New York Times 기사의 일부를 요약해 옮김

(2019.09.11. article by. Constant Méheut and Norimitsu Onish)


<가가린>(2020)


<가가린>의 오프닝은 주택단지에 유리 가가린이 방문하는 영상이다. 엔딩에는 주택단지가 철거 되는 모습에 구 거주민들의 음성이 겹친다. 그 사이에, 유리의 이야기가 있다. ‘가가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실제로 등장하는’ 가족이 없는 그는, 장소의 의인화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유리는 장소로부터 구체화된 상징적 캐릭터보다는 고유성을 지닌 인격체다. 가가린 주택단지는 처음부터 그 고유성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정체성의 기반에 가가린을 두는 것은 유리 자신의 선택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더 이상 못 살겠다’며 항의하는 것은 어른들, 설비를 고치고 공동체를 재건하는 쪽은 주로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었다. 그러나 철거를 안타까워하는 어른들도 있고, 가가린에 별 미련을 두지 않는 젊은이들도 있다. 남기를 원하든 떠나기를 원하든, 모든 주민들에게 가가린은 소유물로서의 집도 단지 거주지로만 기능하는 집도 아니다. 거기엔 다른 나라에서 온 자, 가난한 자, 버려지거나 홀로 남기로 한 자들의 삶이 있다. 떠나간 자리에 남겨진 사진들처럼- 가가린은 그들의 역사가 녹아든 공간이다. 흔적과 기억은 낡은 잔해 사이에 묻히지 않고 공기에 스며들었다. 가가린이 ‘무엇이었는지’ 묘사하는 방법은 머물렀던 사람 수만큼 있을지도 모른다.


유리의 집에 불청객처럼 들어오더니 이내 음악과 춤을 선물하며 자연스레 ‘승선’한 달리, 그 역시 가가린을 말할 언어를 가진 이들 중 하나다. 셋은 별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나름의 언어를 공유한다. 달리가 터키 무용을 보여주겠다며 빙빙 도는 모습 사이사이에는- 유리와 다이아나가 따라 회전하거나 ‘우주선’ 곳곳에서 그들만의 순간을 즐기는 컷들이 편집돼 있다. 달리는 회전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온다”며 스스로 장면을 닫는다.


<가가린>(2020)


남으려는 달리와 철거 작업자들이 부딪혔던 것은, 그들이 같은 언어를 말하는 듯 보이나 사실 다른 언어를 말하고 있어서다. 밤을 틈타 사람이 사는 집을 부수는 작업자들과 다이아나의 가족 역시 그렇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결국 싸움으로 번진다”고 다이아나는 말했다. 이주민으로서 그는 외계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을까, 그래서 모스부호를 익히고 철지난 아메리칸 드림을 품은 채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자’를 자처했던 걸까. 가가린에는 그처럼 ‘외계인’이 되어 버린 이들이 있다. 인간이 외계의 우주와 구분한 이 행성은, 정착지를 잃은 이들에게는 외계와 유사한 곳일지도 모른다. 어디든 갈 수 있지만 갈 데가 없다, 허공에 발이 묶여 언제 호흡이 멎거나 몸이 얼어붙을지 알 수 없는 곳에 던져진 듯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지구의 중력을 잃어가며 우주선을 만들었던 유리, 그가 마지막 순간 모스부호로 던진 단어는 “SOS”가 아니었던가.


주택단지에 홀로 남은 유리는 벽을 뚫어 우주선을 만들었다. 생존만을 위한 행위일 리는 없다. 장소에 대한 해석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담긴 리메이크 건축 예술이다. 공간과 집은 그곳에 머무르는 개인들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인식된다. 가가린은 유리에게 있어, 꿈의 기반이자 실현, 별들의 바다를 유영할 잠수함이다. 화면은 점점 그의 우주를 담고, 유리는 눈밭에 ‘첫’걸음을 내딛는다.


<가가린>(2020)


철거가 결정된 후, 창가에 서 있는 유리와 함께 가가린은 천천히 회전했다 -그렇게 보이도록 카메라가 회전했다. 카메라는 자주 흔들리기도 했는데, 유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공간 전체가 진동하거나 그 기울기를 달리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차 안에서 대화하는 파리와 유리의 얼굴에는 창문에 비스듬히 비친 주택단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가가린이 중력을 ‘잃고’ 쓰러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연출이라 여겼다. 그러나 ‘우주선’이 되어 끝내 ‘우주’로 날아가는 가가린을 보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가가린은 주택단지 이상의 무언가가-머무른 이들의 기억과 흔적이 스며든 아우라 덩어리 같은 게 된 것이 아닐까. 건축물은 해체되어 중력의 영향을 받아 땅으로 무너져도, ‘가가린’ 자체는 -중력을 거슬러/그로부터 자유를 얻어- 우주를 부유하리라는 뜻을 내포한 연출은 아니었을까.


다이아나는 고립된 유리의 구조신호를 들었고, 가가린의 주민들은 힘을 모아 답했다. 중력을 되찾은 유리는 제 꿈이 담긴 가가린이 우주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미소 짓는다. 머무른 이들에 의해 영혼을 얻은 장소에 보내는 판타지적 작별인사, 라고만 적으면 대강 편리하고 예쁘장한 말로 들린다. 그러나 <가가린>이 가가린에 보내는 굿바이는 그럴듯한 희망으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방식도, 고발을 명목으로 타인의 절망을 전시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실제의 것 위에 허구의 서사를 조심스레 얹어 섬세한 균형을 잡았고,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야 했던 까닭마저 설득하며, 각자의 흔적이 모여 이루어진 ‘가가린이라는 존재’를 긍정했다.


<가가린>(2020)



* 인용한 기사

https://www.nytimes.com/2019/09/11/world/europe/france-communists-cite-gagarine-pari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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