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소중한 사람>(2022)
<안녕, 소중한 사람(Plus que jamais)>(2022, 에밀리 아테프)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픽션 속 인물에 이입하게 된다. 어디까지가 보편의 경험인가,를 명확히 가르기는 어렵지만, 엘렌이 앓는 희귀질환은 대부분이 경험하지 않았을 일이다. 카메라가 숨쉬기 힘들어하는 엘렌의 모습을 담을 때, 관객은 감각의 표면만 목격할 뿐이다. 영화는 그 ‘리얼’한 고통을 전시하거나 주변의 슬픔을 조명하기보단, 죽음 앞에 선 이가 삶의 주도권을 쥐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또한.
작품은 거울 앞에서 외출복을 입어 보며 속상해하는 엘렌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는 모임에 나가기 싫어하고, 마티유는 그를 설득한다. 그러나 친구들을 만나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지나치게 조심스럽거나 어설픈 위로에 담긴 진심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 진심에는 ‘어쩔 줄 모름’도 포함돼 있다. 그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고, 엘렌의 탓 역시 아니다. 스스로 말했듯 그에게도 이 상황은 낯설다. 얼굴을 보기만 하면 눈물을 글썽이는 엄마, 기쁜 소식을 숨기는 친구들.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겪기에도 벅찬 자신이, 아프지 않은 그들의 눈치를 보고 배려해야 한다.
엘렌과 마티유는 몸이 아프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다. ‘죽음이 가까워지기 이전에’ 그들이 어떠했는지, 작품은 드러내지 않기를 택했다. 관객이 (무의식중에라도) 비교하지 않기를 바랐거나, 필요치 않다고 여겼으리라. 병에 걸린 엘렌도 여전히 엘렌이나, 그의 하루는 바뀌었다. 그는 연인을 향해 말한다, “당신의 삶이 나 때문에 변하는 게 싫어.” 마티유는 달라질 앞으로의 계획에 기꺼이 생활을 맞출 의지가 있으나, 그가 말하는 미래는 두 사람이 함께 떠올린 것이 아니다. 살아남으려고 (내 곁에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그러면 살 수 있으리라는 것도 혼자만의 생각이다. 그를 탓하려는 건 아니다. 두 사람은 변화를 각자 다른 리듬으로 받아들이고, 마티유는 엘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너무 큰 에너지를 써버린 나머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에 자꾸 실패한다.
“이기적인 게 정말 당신인가요? 어떻게 되든 목숨만 부지하라는 사람들이 아니고?” 벤트는 엘렌에게 그 질문을 던져 주는 이다. (마티유가 이기적이라는 비난이라기보단, 엘렌이 정말 원하는 것을 깨닫도록 도우려는 의도가 담긴 말일 것이다.) 죽음을 곁에 두고 살며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스스로 택한 이, 장소에 스며든 건축가이자 예술가, 강에 둑을 쌓았듯 아무것도 없는 곳에 첫돌을 놓고 마음이 맞는 타인과 공간을 나누는 이다.
작품은 ‘낯선 자연’을 낭만화하지 않았다. 엘렌은 노르웨이에 도착하자마자 벤트와 친구가 되거나 곧바로 오두막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착각했던 벤트의 겉모습처럼, 그곳도 기대와는 다르다. 잠자리는 불편하고, 해는 너무 밝고, 고요는 참기 힘들다. 엘렌은 후회하고 집으로 돌아오거나 억지로 좋아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고 몸과 마음에 솔직하게 움직인다. 몸을 감싸는 강물과 함께 호흡한다. 서서히 그곳의 리듬에 녹아들고, 자연스럽게 원하는 바를 알게 된다. 그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거짓일 테지만, 엘렌이 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는 방식’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작품은 엘렌이 마티유에게 그것을 전하는 과정까지를 다룬다. 그들은 서로에게 소중하므로. 엘렌은 “사랑할수록 곁에서 끝까지 함께 해야지”라는 마티유의 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고, 작품은 어떤 당위성 따위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엘렌과 벤트는 서로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와 여생을 보내는 방식을 이해한다. 엘렌은 노르웨이와 벤트에게서 집과 가족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평안과 유대를 찾는다. 마티유의 시선에 의심이 있었다면 그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질투의 까닭은 아마 거기 있을 게다. 그가 폭력을 행사한 후 사과하자 벤트는, 다가오지 말라며 선을 긋고는 담백한 얼굴로 차를 몰고 떠난다. 엘렌이 있는 집을 향해 보내는 희미한 미소는, ‘갈등 해결’이나 ‘작별 인사’의 장면이 그들에겐 불필요함을 말해 주었다.
이처럼 작품은 말그대로의 언어, 설명과 설득의 언어가 때로는 최선의 소통 방법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말로 하는 대화는 마티유와 엘렌의 마음이 서로 닿지 못한 상태로 끝나곤 했다. ‘이곳에 와서 몸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됐다’고 하기 앞서 엘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었다. 마티유가 마침내 엘렌의 결정을 존중하게 된 과정 역시 그렇다. 그 한가운데에는 -이제껏 영화에서 목격한 것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다운- 베드씬이 있었다.
작품 전반부 두 사람의 집, 엘렌이 대마를 피운 직후 시작된 섹스는 엘렌의 숨이 차오르며 멎는다. 이것을 ‘포기’나 ‘실패’ 라고 일컫는다면, 소위 ‘끝’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엘렌이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면에 어린 긴장은 성적인 끌림이 아닌 그들 사이의 어긋난 공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상대를 별로 원하지 않지만 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티유, 상대를 정말 원해서 라기보단 오기로 달려드는 듯한 엘렌. 마티유는 괜찮다며 달래고, 엘렌은 울음을 터트린다. 둘 중 누구도 그 순간을 이으려 하지 않는다.
노르웨이, 엘렌이 ‘자신의 몸을 이해하게 된’ 낯선 장소에서 두 번째 섹스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계획했던 미래는 이제 없고, 그게 나 때문이라는 게 나도 속상해.” 말로 진심을 쏟아낸 후, 엘렌은 자신처럼 마티유도 몸으로 겪게 한다. 산소발생기를 가져오지 않은 채로 숨이 차오를 때까지 걷고, 무너진다. 마티유는 의아해하다, 불안해하다, 패닉에 빠졌다가, 엘렌을 안고 진정을 돕는다. 오두막으로 돌아온 엘렌은 잠들고, 그를 바라보던 마티유도 잠든다. 먼저 깨어난 엘렌이 마티유의 몸 곳곳을 만지기 시작한다. 마티유도 깨어나 받아들인다. 엘렌의 호흡이 가빠져도 마티유는 전처럼 ‘내가 할 테니 누우라’고 하지 않는다. 누구도 서두르거나,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기다렸다가 다시 몸을 맞댄다. 입은 키스나 숨을 나누기 위해 열 뿐, 말은 거의 않는다. 카메라는 그들의 속도에 맞춰 흐르며 모든 움직임을 가까이 담는다. 산에 오르기부터 불편한 침상에서 사랑을 나누기까지, 곁에서 상대방의 호흡을 느끼며 마티유는 비로소 엘렌의 결정을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완전한 ‘납득’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온전한 이별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엘렌이 마티유를’ 떠나보내는 장면으로 끝난다. 엘렌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 함께 세상을 떠나는 순간을 맞이하기를 원했으므로, 카메라는 이후를 그 혼자만의 시간으로 남겨 둔다. 엘렌이 노르웨이로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기도 전, 강물에 떠 있는 그의 이미지가 화면을 채우는 부분이 있었다. 숨소리가 온 몸에 가득하고, 낮은 하늘을 맴돌던 새들이 하나 둘 수면으로 내려왔다. 얼굴은 물 속에 둔 채였다. 엘렌이 원하는 죽음을 그린 장면이었을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앞서 ‘많은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픽션 속 인물에 이입하게 된다’고 적었다. 이어 적으면- 반대로, 인간은 픽션을 통해 현실의 세상과 타인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녕, 소중한 사람>은, 곧 죽음을 맞이할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 소중한 관계의 끝을 바라보는 이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이들, 혹은 또다른 사연을 품은 누군가들이- 타인의 여생과 이별, 사랑의 방식을 존중할 수 있도록 도울 가능성을 지닌 이야기다.
+
내가 울어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여서 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오른쪽 아래 뜬 문구, “pour Gaspard”를 목격하자마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러니까 상투적 표현으로, 거짓말처럼. 동시에 영화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다. 영화 속 마티유는 죽어가는 연인을 두고 혼란스러워하고 슬퍼했다. 현실의 가스파르 울리엘은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프로세싱할 겨를 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감히 속상할 수밖에. 사실은 영화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에밀리 아테프의 연출, 비키 크립스와 가스파르 울리엘의 연기는 완전히 훌륭했지만, 엘렌의 얼굴에 몰입해야 할 때 자꾸 마티유를 뜯어보게 됐다. 한 순간이라도 화면 속 그를 눈에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라도 생긴 것처럼. 죽음을 앞두기 ‘이전의’ 엘렌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고, 마티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더욱 적었다. 투명하게 다 보이는 인물처럼 다가오다가도, 그 그윽한 눈동자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섰다. 그럴 때마다 영화 밖으로 튕겨져 나와 관객이 아닌 가스파르 울리엘의 팬이 된 채 그와, 존재하지 않을 그의 차기작을 애도했다. 영화와 연기에 대한 예의가 아닐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