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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Mar 11. 2023

타르는 왜

<타르>(2022)



<타르(Tár)>(2022, 토드 필드)

Feat. <어디갔어, 버나뎃>(2019)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인물과 그를 바라보는 방식, 연기, 배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상징적이면서도 개인적인 복잡한 인물, 예술가이자 권력(을 가졌던)자 리디아 타르. 그를 케이트 블란쳇 이외의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의 연기에서 항상 놀라는 점 중 하나는 그다지 메소드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피아노 연주나 지휘 같은 테크닉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유독 그의 캐릭터들은, 그만을 위해 쓰인 것 같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예술가로서의 재능이나 위치를 제외하고는 배우 본인과 닮아 보이는 인물은 아니었는데, 리디아 타르에게선 스크린에서 만났던 케이트 블란쳇의 배역들이 어른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줄리아드 강의 장면에서는 기자 회견을 하던 주드 퀸(<아임 낫 데어>)의 냉소가 비쳤다가 지워졌고, 정신적으로 무너져 갈 때는 특히 재스민(<블루 재스민>)이 겹쳤다.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연기한다는 점에서는 릴리스(<나이트메어 앨리>)와 닮아 있었고, 올가와의 어떤 장면들에선 캐롤과 테레즈(<캐롤>)의 케미가 얼핏 보이는 듯 했으나 착각이었다. 그 독선적인 나르시시즘에서는 헬라(<토르: 라그나로크>)마저 떠올렸다. 그들 모두와 비슷한 데가 있었지만 결국 그들 모두가 아니었다. 누구도 리디아 타르보다는 솔직했다. 그보다 차가운 자는 없었고, 그보다 뜨거운 자 또한 없었다.  


가장 여러 번 떠올렸던 인물은 역시 버나뎃(<어디갔어, 버나뎃>)이었는데, 닮아 있는 만큼 완전히 달라서였다. 천재적 감각을 지녔기에 ‘작품을 만들어야’만 하는 이. 버나뎃은 그 재능을 세상에 펴기 위한 ‘부수적인 작업’을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싫어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솔직하고 따스하고 사랑이 넘치는 괴짜. 그는 자본으로부터 상처 받은 후 도피해 외톨이를 자처하다, 끝에 자신을 되찾고 작품을 만듦으로써 스스로를 치유한다. (<타르>는 영화의 성격부터가 다르다. <어디갔어, 버나뎃>의 휴먼드라마는 없다.) 리디아는 ‘역할극’ 한가운데로 들어가 정치를 하는 자다. 제 기사를 고이 모아 놓는 나르시시스트인 그는 샤론의 말대로 패트라를 제외한 모든 인간과 조건적인 관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타르>(2022)


그는 유머러스하고 부드러운 리더, 의도가 분명한 “작은 호의”를 연기하며 사람들을 이용하고,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거나 인식하지 못하며 따르거나 떠난다. 여성/게이인 그의 리더십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권력을 쥔 그를 보면 왠지 기시감이 든다. 그 소수성이 그의 현재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으리라 짐작되나, 자신을 바흐나 말러에 겹쳐 보며 세계 여성의 날도 기억하지 못하는 리디아는 그것을 권력자로서 발언할 때 이용할 뿐이다. 샤론과의 대화에서 ‘함께 커밍아웃 했을 때 힘들었다’는 내용이 언급되는 것으로 미루어, 인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선택이다. 패트라를 괴롭히는 동급생 요한나를 협박하며 리디아는 “내가 패트라의 아빠”라고 말한다. 상대가 ‘아빠가 없다’며 괴롭혔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리디아가 스스로를 ‘남성적’ 권력자(The Man)로 보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젠더 정체성 이야기가 당연히 아니고) 그가 해낸 것은 오픈리 퀴어 아티스트로서 성별 이분법을 흐리고 클래식 음악판을 전복하는 작업이 아니라, 가부장적 기득권의 획득이었기에.


그가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일 역시 가부장적 위계를 이용한 폭력의 전형이다. ‘아카데미의 젊은 여성들에게 성행위를 요구하고 거절하면 앞길을 막았다’는 주장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카메라는 누군가의 회상을 통해 ‘과거 있었던 일’을 보여 주지 않는다. 리디아의 현재를 담을 뿐이다. 악의적으로 편집된 줄리아드 강의 영상은 관객의 판단을 더욱 어렵게 하는데, 분명한 것은 리디아가 결백하더라도 결국 ‘결백’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타르>(2022)


작품은 테이크를 나누는 대신 공간 자체의 파티션을 활용하거나 카메라를 조절해 사각지대를 만들며 인물과 관객의 시야를 좁히거나 넓힌다. 집에 막 도착한 리디아가 약을 서랍에서 꺼낸 척 샤론에게 건네는 장면, 카메라는 적당히 먼 곳에서 롱테이크로 그 일련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약이나 얼굴을 따로 비추는 컷도 없다. 인물의 면면을 관찰하며 어느 하나를 클로즈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작품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일까.


뒤에 더 언급하겠지만- 작품은 관객에게 리디아의 감정이나 상태를 딱히 숨기지 않는데, 그것이 판단을 더욱 어렵게 한다. 바흐를 듣지 않는다는 학생을 집요하게 몰아세운 것은 무의식적 자기변호였나,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에 기반한 논박인가, 그도 아니면 그저 음악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고집인가. 잠결에 이웃이 병든 모친을 옮기는 것을 돕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어던지고 몸서리치며 팔다리를 씻어내는 리디아. 거절하지 않게 만든 것은 그의 내면에 남아있던 이타심이었나, 몸에 밴 가식이었나.


리디아의 남다른 관심과 호의를 차지하는 첼로이스트 올가는 크리스타의 죽음과 유사한 타이밍에 등장한다. 그에게 자주 빼앗기는 리디아의 시선엔 성적 호기심도 있지만, 그 끌림의 성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올가의 특별함은 오케스트라 단원 모두가 느끼고, 작품은 첼로 솔로이스트 오디션 시퀀스에서 이를 분명히 한다. 리디아는 그가 언젠가의 자신과 닮았음을, 동시에 아주 다름을 감지하지 않았을까. 올가는 타인의 평가나 명예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예술’을 하는 자, 리디아를 두려워하거나 동경하지 않으므로 그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는 자이기도 하다. 올가를 따라 들어간 건물에서 리디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그림자를 느끼고, 도망치다 넘어져 얼굴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의 평판이 급격히 하락할 무렵 일어난, 그가 속에 품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연출로 (일단은) 보인다. 올가는 리디아가 자신을 마주하고 드러내게 (따라서 몰락하게) 하는- 계기인가.


<타르>(2022)


그런데, 리디아는 언제부터 ‘의식’이 없었던 걸까.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에 보이는 것은 선글라스를 낀 채 비행기 좌석에 널브러져 있는 리디아, 정확히는 그 모습을 찍는 스마트폰 채팅창이다. 핸드폰의 주인은 아마도 프란체스카, 상대방은 알 수 없고, 그들의 정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저쪽은 리디아에게 ‘의식consciousness이 있냐’고 묻고, 이쪽은 ‘아마도Maybe’라고 답한다. 리디아의 ‘상태’에 관한 이중의 의미를 담은 대화의 뼈는 상대의 마지막 텍스트로 인해 표면에 드러난다. ‘그럼 넌 아직 그를 사랑하는 거로군.’. 이 암시는 작품의 후반부, 고향으로 돌아간 리디아를 본 토니 타르의 대사와 이어진다. “넌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건지 모르는 것처럼 보여.” 이들의 감상처럼 리디아는 때로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아’ 보였는데, 그 사이에서도 음악과 패트라에 대한 사랑만큼은 분명히 감지됐다. 좀처럼 풀리지 않던 5번 교향곡을 완성하고 ‘패트라’라 이름 붙이며 ‘의식’을 되찾은 듯도 했으나, 곧 악보를 잃어버린다. ‘5번’은 후에 악몽으로 돌아온다.


리디아가 있는 위치는 그의 “스폰서들”과 다르다. 그가 지닌 권력은 유지를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종류의 것이다. 과정이 명확히 서술되지는 않으나, 현재의 위치에 오르고 머무르기까지 그가 지난 하루하루가 결코 편안했을 리 없다. 그는 일상적으로 긴장해 있다. 권력을 손에 넣으며 발생한 현상인지 그를 그 자리에 있게 한 기질이 바로 그 예민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건 리디아는- 결벽증과 미소포니아misophonia에 시달린다. 손을 강박적으로 씻고, 반복해 악몽을 꾸고, 작은 소음에 깨어나고, 정체모를 노크나 비명을 듣는다.


디아는 높은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매일을 버티는 것도 같았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괴상한 노래를 부르거나 무대에서 동료를 폭행하는 - 그의 추락을 묘사하는 씬들은 자기파괴적이다. 거기 담긴 것은 정신적 불안정뿐인가? 남들에게 떠밀리느니 스스로 발을 떼겠다는- 일종의 주체성은 없나? ‘추락 그를  자신의 권력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라고  수는 없는가? ‘꼭대기에서 버티는 권력자보다 ‘벼랑에서 떨어진 예술가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가?


<타르>(2022)


엔딩, 리디아는 다시 무대에 선다. 동남아시아 어딘가 코스플레이를 하는 관객들 앞에서, 판타지 비디오 게임 주제가를 지휘한다. 이는 그저 추락의 상징이나 ‘스토리 쌓기’의 일환인가? 리디아는 또다시 ‘의식’을 잃을 준비를 하고 있는가? 혹은 어디서건 음악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는 뜻인가. 삭제되었다는 대사 “Tár never quits. Tár makes music across the globe, no matter the audience.”(Monika Willi, [variety.com])가 방향을 어느 정도 잡아 주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권력자로 보이는 타르와 예술가로서의 타르. 권력자가 아니게 된 타르. 리디아 타르는 왜 그 ‘자리’에 있고자 했는가? 우리는 리디아 타르를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가? <타르>의 질문은 인물 그 자체다. 까다로운 경계에서 균형을 잡으며 그 답을 영화 밖 세상의 몫으로 남긴다. 결코 내리기 쉽지 않은 그 답은 관객 수만큼 있을지도 모른다.


<타르>(2022)



+

프란체스카가 리디아의 곁에 남아 있던 까닭에는 아마 그를 사랑하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차 뒷좌석에서 이루어지는 말러와 알마에 대한 대화는 대놓고 그들의 관계를 빗대고 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이므로 알마가 떠난 건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리디아, 그는 말러에게 이입한다. 반대로 알마에게 이입해 그를 변호하는 프란체스카. 결국 프란체스카는 리디아를 떠난다. 리디아는 배신이라며 분노하지만, 프란체스카는 먼저 배신한 것은 리디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물음표를 남발하였다. 읽으면서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을 게다. 사실 나도 어쩌라는 건지 모른다. this is going nowhere 뭐 그런 글이다. 그냥 케이트 블란쳇 (사랑해) 열 번 쓰고 말 걸.

(Feat. Todd Field in first gender neutral Independent Spirit Awards)  



* 참고 기사

https://variety.com/2023/artisans/awards/tar-deleted-scene-ending-explained-1235540960/?fbclid=IwAR2aQGwVtNhKyVEEKKAen_y0g1j2uw5ELdH0VRjAs_6-t_zvScGbf8aSO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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