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라 비어 Paula Beer
<트랜짓(Transit)>(2018, 크리스티안 페촐트)
<운디네(Undine)>(2020, 크리스티안 페촐트)
<어파이어(Roter Himmel)>(2023, 크리스티안 페촐트)
Feat. <프란츠(Frantz)>(2016, 프랑수아 오종)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채로운 욕망을 드리운 여성 캐릭터를 작가의 분신으로 택하길 즐겨하는 이야기꾼 프랑수아 오종. <프란츠>는 언뜻 그와 멀어 보였으나, 결국 그다운 영화였다. 감독으로서 넥스트 스텝이라고 해도 좋을 <프란츠>에 있는 ‘오종스럽지 않음’은 어느 정도, 주연 배우에게서 나온다. 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고, 비교적 덜 유명하고, 독일어를 쓴다-는 점 외에도 파울라 비어에겐 어떤 ‘다름’이 있었다.
유독 특정한 표현법과 함께 기억에 남은 배우였다. 흐느끼다 별안간 뚝 그치고 진정하는 흐름, 초점을 잃은 눈으로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 표정. 그에겐 내향적인 신중함과 단호함이 있었다. 예측불가능성 또한 있었으나 정갈한 방향이었다. 비슷한 시기 오종의 페르소나였던 마린 백트, 미스터리한 모호성과 솔직함, 위태로움과 도발적 용기의 경계에서 줄을 타곤 했던 그와는 또다른 종류의 아우라였다. 마린 백트가 (화면을 공유하기도 했던) 샬롯 램플링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면, 파울라 비어에겐 다른 대배우의 흔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겹쳐보지 않았으나, 얼마 전 그의 장면들을 곱씹다 문득 이자벨 위페르를 떠올렸다. 건조하고 차가운, 때로 저돌적으로 타오르는, 비밀스러운. 프랑스 감독의 영화로 만났기에 무의식중에 끄집어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깊이 있는 연기가 그렇듯, 파울라 비어의 것에 역시 고유성이 있었으니. 분위기, 관찰하는 눈빛, 움직이는 방식 전부 유일하였다.
<프란츠>는 시공간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묘한 초현실성이 있는 작품이었다. 정교한 절제미로 가득하면서 실험적인 데가 있는 스크린, 피에르 니니와 파울라 비어는 시대와 어울리는 동시에 아웃사이더적인 아름다움을 입고 그 안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러고 보면, 파울라 비어의 마스크는 시대극에서는 현대성을, 현대극에서는 고전적이거나 세기를 넘나드는 매력을 발산하곤 했다. 모노톤 고전적 멜로드라마의 주체적 화자로서 사랑을 좇던 파울라 비어를 다음에 목격했을 때, 그는 좀체 잡히지 않는 여인이 되어 시대성이 모호한 항구도시를 배회하고 있었다.
형태가 있음에도 전지적인- 내레이터가 게오르그의 관점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트랜짓>. 인물들은 게오르그의 관점을 거친다. 마리의 등장은 단계적이다. 첫 번째는 바이델에게 보낸 편지를 게오르그가 읽었을 때다. 만나지 않았을 때부터, 혹은 않았기에 그의 관심을 끈다. 두 번째는 마르세유에 도착한 게오르그를 스쳐 지나가고, 이어 영사관과 거리를 탐색하는 모습이다. 자세는 꼿꼿하고 걸음은 가볍고 빠르다. 머리카락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린다. 여태껏 시선은, 게오르그에게서 마리를 향해 일방적으로 뻗는 듯했다. 마리가 달려와 게오르그의 어깨를 잡는 순간, 시선은 사고accident처럼 마주친다. 무언가를 묻거나 꿰뚫어보는 그 동그랗고 맑은 눈동자. 남편이 아님을 깨닫고 미소를 거둔 마리는, 말없이 어깨를 놓고 주춤 물러나 길을 건너 달려간다.
기약 없는 경유자-마르세유의 패신저들은, 바이델이 묘사한 지옥과 흡사한 이 도시를 맴돌며 유사한 행동을 되풀이하는 게임 NPC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어느 순간, 예측을 깨고 세계를 탈출한다.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가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 마리는 조금 다르다. 그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매번 남편과 엇갈리는 상황에 의심을 품을 법도 한데, 그저 계속해서 찾아다닐 뿐이다. 그역시 탐색이라는 일정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걸까 싶지만, 시야에 포착됐다가도 늘 금방 벗어난다. 고여 있는 장소에서 홀로 동적인 이상한 존재, 작가가 창조했으나 조종은 불가한 오류처럼.
세 번째는 의사의 집이다. 게오르그가 노크하자, 마리가 문을 연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들린다. 낮고 힘빠진 음성. 짧은 말만 던지고, 침대에 몸을 던진다.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무기력하게 정지해 있는 그의 실루엣은 전과 사뭇 다르다. 그것이 마리의 상태다. 예의를 차릴 힘이 없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게오르그가 다시 찾아간 날, 마리는 체념을 풍긴다. 무반응하거나 경계할 에너지조차 증발되어, 그저 다 털어놓는 것도 같다. 확장된 눈을 굴리며 눈물을 참다 그조차 포기하고 숨죽여 운다.
‘비자를 얻기 위해 남편을 찾는다’고 해도, 마리는 기회주의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머리를 굴리는 대신 몸을 움직이는 그는 찾고 싶으면 찾고, 붙잡고 싶으면 붙잡고,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남고 싶으면 남는다. 오히려 그는 낭만주의자다. 잠깐 머물다 가려는 이들로 가득한 이곳에 발이 묶여 있지만, 생존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 게오르그처럼- 기약 없는 로맨스를 붙잡는다. 떠날 수 있게 되자 마리는, 꿈꾸듯 남편my man을 기다리겠다고 속삭인다.
마리가 자꾸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것은 게오르그가 바이델을 사칭하고 있어서인데, 이를 고백하려는 시도는 마리의 눈동자에 부딪혀 튕겨나간다. 그가 게오르그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이 순수해서다. 의사와의 관계도 게오르그와의 관계도- 잡고 있는 건 마리가 아니었다. 마리는 호의를 주면 받고, 감정을 보이면 응한다. 항상 기다리고 애타는 것은 저쪽이다. 거짓으로 사랑을 말하는 일은 없다. 미소는 늘 진심, 그는 바이델을 떠올릴 때 가장 환하게 웃는다. 게오르그를 꼭 끌어안고 눈을 맞춘 후- “my man”을 그리며 행복해하는 마리의 마음은 사실, 내내 일관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게오르그는 마리의 낭만에 감염되었다. 마리는 남편의 유령을 좇고, 게오르그는 마리의 유령을 좇게 되었다. 마리가 좀체 주변 인물과 관객의 손에 잡히지 않았던 까닭은, 늘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작가가 겹겹이 쳐놓은 장막을 하나씩 걷어내고 마침내 온전히 드러난 그의 얼굴은, 어이없을 정도로 투명하였다. 파울라 비어는 의뭉스러움이나 위화감 없는 순수함을 담백하고 영리하게 이끌어냈다. 그 ‘순수’는 innocent도 naïve도 아닌 pure, 로고브스키 글에는 ‘숨기는 바 없이 있는 그대로’라고 썼다. 유사한 이야기지만, 워딩을 조금 달리해 적어본다. ‘다른 잡다한 것이 섞여들지 않고 온전히 간직된 정서나 아우라’. 배우 자신에게 있던 드문 에너지가 바탕이 되었을 테다.
마리의 옷을 입으며 파울라 비어는 모조리 비워냈을까, 오히려 하나로 꽉 채웠을까, 둘 다 였을까. 같은 물음이 운디네를 보면서도 떠올랐다. <트랜짓>이 게오르그의 얼굴로 시작했다면, <운디네>는 운디네의 얼굴로 시작한다. 화면은 일상적으로 창백하게 밝다. 이별을 통보받은 상황. 곧 무너질 듯 울먹이나 금방 깔끔하게 삼킨다. “널 죽여야 해.” 그 톤은 당연하고 건조하다. 연인을 붙잡으려고 부리는 억지가 아니다. 파울라 비어의 눈빛에서 심상찮은 기운이 읽힌다. 저 말은 진심, 아니 진실이다. 인과이며 법칙이다.
카페로 돌아온 운디네는 요하네스가 약속을 어겼음을 알게 되고, 이어 제 이름을 부르는 물의 소리를 듣고 굳는다. 그때 크리스토프가 등장한다. 운디네는 눈알만 굴려 낯선 남자를 응시한다. 경계한다기보단, 그 상태를 풀 수 없는 듯하다. 어설프게 뒷걸음질치던 크리스토프가 선반을 건드려 어항이 흔들리자 마법이 풀린다. 물과 유리로 범벅이 된 채 바닥에 누워, 그들은 다른 마법-사랑에 걸려 서로에게 얽힌다. 고향은 다르나 그들은 동족이다. 낭만과 환상, 사랑을 믿는. 제 설명을 지식으로 흡수하기보단 온몸으로 ‘겪어 줄’ 사람이어서 였을까, 크리스토프를 위해 강의하는 운디네는, 달라 보인다. 자료를 찾고 발표를 연습하는 씬이 선행되었음에도- 역사를 공부해 아는 게 아닌, 진정 그 세월을 전부 목격한 이의 아우라가 감지된다.
사랑과 함께 육지에서의 영혼을 얻는 운디네는 재거나 따지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상대를 바라본다. 행복에 겨워 짓는 미소는 군더더기 없어, 보는 이도 따라 취해 웃게 한다. 홀로 있는 크리스토프의 눈동자에 운디네가 어른거렸듯, 운디네의 눈동자에도 크리스토프가 어른거린다. 오늘 그와 누릴 즐거움으로 꽉 차 있어, 그가 빌린 단기 아파트처럼 미래의 자리 또한 없다. 어쩌면 그래서 운디네는 통화로 거짓을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미 없는 사람,과 같았던 요하네스-무의미한 존재가 지금을 1초라도 방해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행위. 단호한 말투와 달리 살짝 기울어진 고개와 눈에는 확신이 없었다. 운디네는 ‘다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당신 말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그에겐 중요했다. 운디네의 기준으로 보면, 요하네스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을 테다. 사랑을 거짓으로 말하거나 빌미로 이용하려 드는 제스처. 운디네는 입을 꾹 다물고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 하거나, 말없이 상대를 응시한다. 거기엔 ‘그의 재등장이 이 세계의 법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문 역시 있다. 요하네스가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매니저가 “저 사람은 카푸치노 못 먹어요. 저 사람 출입금지예요. 본인도 알아요.”라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알고 있는’ 운디네는 조용히 웃는다. 그 사건은 크리스토프와 그의 첫 만남, 그들의 비밀, 로맨스의 시작- 현재 운디네의 모든 것을 담은 추억, 매니저의 화는 그 증거다. 웃음기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요하네스는 마주 웃지만 애초에 그 미소는 저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내내 크리스토프가 어려 있던 그 낯에 의문은 들어섰으나, 혼란이나 불안으로 번질 여유는 없다. 가슴이 금방 크리스토프로 가득 차올랐므로, 운디네는 상쾌하게 떠난다.
운디네는 전지적으로 모든 것을 즉각 꿰뚫어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요하네스가 떠났을 때도, 크리스토프가 뇌사에 빠졌을 때도, 그는 인간의 눈으로 파악했다가, 다음 순간 자신을 부르는 물의 소리를 듣는다. 통화했(다고 여겼)을 때는 이미 뇌사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항이 깨진 날 들은 음성을 떠올린다. 강의 중 요하네스를 ‘바라보며’ 그랬듯, 멍하게 정지해 고개를 살짝 내린 채 입을 다문다. 초점이 희미한 눈은 한 점에 머무른다. 곰곰이 생각해 도출해내기보단 ‘알고 있는’ 시선이다.
운디네가 크리스토프 곁에서 엉엉 울 때, 관객은 따라 울지 못한다. ‘비극’의 대단원은 아직 멀었다. 눈물이 멎자 그는 차가워진다. 이제 요하네스를 죽이고 물로 돌아가야 한다, 꼬여버린 크리스토프의 운명을 풀고 그를 살리기 위해. 요하네스를 죽이는 운디네는, 감정의 스위치를 끄고 ‘할 일을 하는’ 듯하다. 정확한 동작으로 그의 머리를 물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그리고 터벅터벅 쓸쓸히 산길을 걸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수에 잠긴다. 그 뒷모습이 담기는 순간에야 슬픈 음악이 흘러나오고, 이내 운디네는 영화의 시야에서도 벗어난다.
이후 영화는 운디네를 찾아 헤매는 크리스토프를 따라간다. [작가의 카메라조차 포착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이] 크리스토프, 운디네는 그에게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두 사람이 재회하는 순간, 카메라는 운디네의 시선을 취해 멀어져가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본다. 운디네-파울라 비어의 눈빛이 어떠했을지 궁금해졌으나-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파울라 비어가 여태껏 쌓아온 정서와 잡아놓은 중심. 그것은 판타지적 존재- 운디네가 그린 사랑의 모양을 짐작하도록 도와주었다.
운디네는 우화 속 물의 정령처럼 열심히 사랑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페촐트와 파울라 비어의 운디네는, 운명이 정한 대로 배신당하고 복수하기를 거부했다. 새롭고 진정한 사랑을 찾아 뭍에 남았다가, 그를 살리기 위해 운명을 기꺼이 따랐다. 파울라 비어는 현대적 운디네의 얼굴이 되기에 적합한 배우였다. 고전 멜로의 비극을 주체적으로 유영했던 안나가 그여야 했듯.
파울라 비어의 운디네에 있는 특별함은 그 일관된 투명함에 있었다. 있는 그대로 다 비쳐서 아름다웠고, 배우가 없는 엔딩에서조차 놀라운 설득력을 지니며 초월적으로 빛났다. 오로지 상대만을 위하는 the very basic romantic love, 쉬워 보이나 실은 드물고 귀한 정서다. 파울라 비어는 깊이를 가둔 채, 간결하고 순수하게 표현함으로써 위대해진다. 프란츠 로고브스키처럼, 그러나 그와는 다른 분위기의- 순수를 간직하고 활용하는, 복잡하고 복합적이어야 한다면 또 그것이 가능한 배우다.
<트랜짓>에서 두 배우의 인물은 서로를 찾았을 때조차 외로웠고, <운디네>에서는 물리적으로 이별했지만 끝까지 서로에게 얽혀 있었다. 두 작품은 크리스티안 페촐트, 프란츠 로고브스키, 파울라 비어. 세 이름을 함께 기억하게 만들었다. <어파이어> 캐스팅 정보를 접하고, 로고브스키 없는 페촐트의 세계에서 파울라 비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트랜짓>에서 로맨스…의 대상이었다가, <운디네>에서는 1화자가 되었던 파울라 비어는, <어파이어>에서 다시 상대방의 자리로 이동한다. 빨랫감과 라자냐, 어질러진 방과 널려 있는 속옷으로 첫인상을 남긴 나디아, 그의 두 번째 등장은 소리다. 대사도 아닌 신음. 약간 고약하다. 그러나 페촐트 영화의 파울라 비어다. <트랜짓> 속 마리의 셔츠가 얼핏 겹치기도 하는 붉은 원피스를 입고 레온의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나디아는 그저 나디아가 된다. 마르세유의 거리를 활보하던 마리가 그랬듯- 자전거로 산길을 다니는 그 역시, 단계적으로/별안간 나타나 필연적으로 주인공 남성을 매혹한다. 마리가 게오르그의 순수를 끌어냈다면 나디아는 레온에게 ‘주위를 둘러 보고 느낄 것’을 가르친다.
창밖을 내다보는 레온에게 관찰당했던 나디아는, 다음번에는 집 안을 들여다보는 레온에게 관찰당한다. 그러나 레온이 말을 걸고 펠릭스가 나디아 옆에 서자, 레온은 반대로 관찰당하는 입장에 처한다. “네, 형편없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예쁘게 웃는 것이 자신의 일인 양 열심히 입꼬리를 올리고 눈을 가늘게 뜨던 나디아, 그의 입이 다물리고 분명한 눈빛이 이쪽을 향하면, 레온이 그렇듯 관객도 간파당하는 기분이 든다.
레온이 거절할 때마다 나디아가 덧붙이는, “안타깝네요.” 그 단순한 대사에는 의미심장한 기운이 있다. 후에도 종종 드리워지는 기운이다. 벽 너머 신음소리에 기시감을 느끼며 깨어난 레온. 그는 옆 침대에 있는 것이 펠릭스가 아닌 나디아임을 알고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나디아는,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깐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군요.’ 경멸보다는 약간의 안타까움이다.
이번에 파울라 비어는 자신보다는 타인의 아픔에 눈물을 흘렸다. 펠릭스와 데비트의 시신을 보고 곧바로 슬퍼하지 못했던 레온. 나디아는 헬무트의 병에도 친구들의 죽음에도, 이상하리만치 즉각적이고 진정성 있게 아파하며 레온에게 나무라는 눈길을 보낸다. 나디아는 펠릭스처럼 주위를 감각하며 진실을 바로 보는 자, 주변의 기쁨과 슬픔을 제 것으로 투영해 공감하는 자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나디아와 문학 박사 논문을 쓰는 나디아, 지붕을 고치는 펠릭스와 사진을 찍는 펠릭스가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헬무트가 나쁜 소식을 숨긴다는 걸 아는 자다. 따라서 게오르그와 마리, 운디네와 크리스토프: 비밀을 사이에 두고도 결과적으로 같은 종이 되었거나 처음부터 동족이었던 그들의 로맨스와, 레온-나디아의 다이내믹은 다르다. 그 차이는 나디아가 언짢아진 것이 ‘청소하는 사람과 같은 취급을 해서’라고 여기는 레온의 캐릭터에 있다. 파울라 비어의 상대역이 프란츠 로고브스키여서는 안 되었음을 납득했다. (물론 그가 출연하지 못한 이유가 따로 있었겠으나, 로고브스키가 레온이었다면 영 이상했을 것이다.)
낭독하는 헬무트가 재등장하기 전까지, <어파이어>는 아마도 레온의 소설 속이다. 거기서 영혼이 있는 인간은 레온 하나다. 타 인물들은 그에게 영향을 미쳐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변수다. 그렇다면 나디아는 무엇인가, 그 변수들에 ‘인간적인’ 반응을 보이며 레온을 이끄는 ‘매닉 픽시 드림 걸 manic pixie dream girl’이다. 매력적이되 너무 뻔해서는 안 되고, 주인공과 대조되는- 높은 정서 지능을 갖되 그 표현법에 작위적인 뉘앙스가 있어서는 안 된다. 파울라 비어는 모든 요소를 영화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적당히=완벽하게 소화하는 와중, 그 역할을 알고 있음에도 나디아를 더 알고 싶게 만들었다.
파울라 비어는 전형적인 캐릭터에 저만의 단호하고 로맨틱한 톤을 드리웠다. 매력적인 대상으로 존재했다가, 묘하고 바른 눈동자로 카메라를 응시하며 일인칭 화자 남성과 관객을 동요하게 했다. 진동하며 타오르는 영혼-레온을 제외한 모두가 그의 경험과 성장을 위해 움직였던 이 ‘이야기’에서, 파울라 비어는 나디아에게 그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을 훌륭하게 속아넘겼다.
데뷔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Poll>(2010)의 주인공 오다 폰 시어링, 의학과 생명에 진중한 관심을 보이는 그는 지적이고 당돌하고 신비롭고 사려깊다. 사회를 풍자하는 공개적 일인극부터 극히 사적인 일대일의 교감까지, 파울라 비어는 성숙한 통찰력으로 차분하게 중심을 잡고 극을 이끌었다. 종종 열셋 다운 낯을 드러낼 때마다 배우가 오다와 비슷한 나이였음을 새삼 기억했다. 그의 퍼포먼스에 대한 감탄에는 ‘아역 배우 치고’라는 수식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이후 파울라 비어는 예술영화 주조연과 묵직한 TV시리즈까지, 타고난 마스크와 재능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범위를 넓히며, 저만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했다.
“Love’s gonna make us blind” (현대 기준으로는 에이블리즘적 워딩이긴 하지만,)
<어파이어> 사운드트랙 ‘In My Mind’(Wallners)의 가사를 옮겼다. 파울라 비어의 인물들은 언뜻, “사랑에 시야가 가려진” 이들로 보이기도 했다. 허나 그들은 혼란의 질주가 아닌, 선택을 했다. 파울라 비어는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상대방이거나 주인공이었지만, ‘비련의 여주인공’은 아니었다. 매달리다 버림받느니 스스로 떠났고, 악몽만 남은 곳에서 꿈을 꾸었고, 운명에 휘둘리는 대신 주체적으로 대면했다. 기꺼이 누군가의 로맨스가 되었고, 사랑과 낭만, 혹은 타인의 아픔이 마음을 앗아가도록 허락했다. 곧은 중심을 두고 작가에 따라 그 담백함과 풍성함을 조절하는, 일관되고 지혜로운 연기. 외부를 의식해 다이너마이트적 폭발을 보여주려 애쓰기보단, 내면의 불꽃을 자연스레 발산하는 연기. 신중하면서 주저 없었고, 간결하면서 단순하지 않았고, 순수하였으나 순진하지는 않았다. 비밀스러우면서도 투명했다. 아마도 그 말이 어울릴 것이다, 현명한 외유내강. 맑은 호수와 쉽게 꺼지지 않는 불씨를 동시에 품은 배우, 파울라 비어의 순수pure는 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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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개수로만 따지면, 파울라 비어는 프란츠 로고브스키보다 엔노 트랩스와 더 많은 작품을 함께했다. 데뷔작 <Poll>에서는 가부장의 폭력을 나눠 겪는 법적 남매였고, <어파이어>에서는 침대는 공유했으나 연인은 아닌 이들이었다. <운디네>에서 엔노 트랩스는 카페 매니저 역할을 맡았다. 코미디 담당, 만남의 증거. 사족이다. 내 웃음버튼이라서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