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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May 01. 2024

테니스적 순간

<챌린저스>(2024)



<챌린저스(Challengers)>(2024, 루카 구아다니노)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착각할 뻔 했다, 영화가 끝내 타시를 따돌려 버린다고. 작품 내내 흐르는 ‘마지막 경기’. 그 결말이, 패트릭과 아트가 타시를 만나기 전 “불과 얼음”으로서 함께했던 경기의 그것과 닮아 있어서였다. 패트릭이 아트와 자신만 아는 “틱tick”을 사인으로 보내고, 흔들리던 아트가 같은 방식으로 답하며 둘 사이 순수한 즐거움의 미소가 공유될 때, 그것을 지켜보는 타시의 얼굴에 불안이 떠오를 때. 영화가 두 남자의 (그다지 안) 모호한 로맨스를 완성키 위해 타시를 (그 자신이 말했듯) “가정파괴자homewrecker”로 만드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그러나 나는 이 ‘테니스 경기’가 세 사람의 다이내믹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트가 공을 받기 위해 높이 뛰어올랐다가 균형을 잃고 네트 위로 떨어지고, 패트릭이 그를 껴안듯 받아내는 과정의 슬로모션, “컴온!”을 외친 후 미소짓는 타시의 클로즈업- 게임과 작품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나온 결과는 승패가 아닌 관계, 쓰리썸 ‘테니스’의 모양이다. 타시는 그 순간 고유한 아름다움을, ‘퍼펙트 매치(게임)’를 느꼈다. 그리하여 안나 뮬러에게 이겼을 때, 아니 안나 뮬러와 ‘관계를 맺었을’ 때처럼 “컴온!”을 내지르며, 감격과 만족을 드러낸다. 타시가 원했던 건 ‘상황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 즉 ‘이기는 것’보다는- 테니스 게임 그 자체였다.


<챌린저스>(2024)


시작된 베드씬들은 중단되거나 흐지부지 사그라든다. 첫 번째 키스의 긴장감이 끊기지 않고 코트로 옮겨간 듯한 느낌, 아마도 의도적이다. ‘완결났다’고 보이는 섹스는 챌린저스 결승 전날 밤 폭풍 한가운데서 이루어진 타시와 패트릭의 것뿐인데, 그 차이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들이 옷을 입지 않고 서로의 몸에 기대 누워 있는 모습이 화면에 잡혀도,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는다.(불륜이라서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처음부터 ‘테니스’였고, 플레이어는 셋이었으니. 타시와 패트릭이 서로 사랑한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맞다고 해야겠지만, 그 ‘진짜 사랑’이랄 것은 시작부터 테니스 안에 버무려져 있어, 분리해 낼 수 없다.


‘퍼펙트 매치(짝)’를 이루는 두 연인을 골라낸다면 남겨진 자는 “홈렉커”가 된다. 전통적 ‘정상가족’ 중심의 관점에서 홈렉커는 패트릭이고, 헤테로 모노가미 ‘트루 로맨스’ 판타지의 관점에서 홈렉커는 아트이며, 게이 로맨스 서사(우정이나 브로맨스라고 하고 싶다면 뭐… 그러던지.  이 ‘친구’들의 에로틱한 투샷들을 외면하겠다면.) 로 가져간다면 홈렉커는 타시다. 그들 모두,라면 결국 누구도 아니,다. 애초에 영화가 그럴 생각도 들지 않게 만들지만- 관객은 셋 중 둘을 골라낼 수 없다. 그러려고 시도한다면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챌린저스>(2024)


처음에 타시는 “너희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는지”를 궁금해하며 “나는 홈렉커가 아니”라는 반농담을 던졌다. 너희 둘은 연인일 ‘수도’ 있느냐,는 질문이면서, ‘너희 둘의 테니스 경기를 보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이다. 그는 자신에게 키스하던 두 사람이 서로 키스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본다. 타시는 테니스를 ‘관계’라고 해석하는데, 역으로 그에게 ‘테니스’는 삶을 살아가고 관계를 맺는 방식이기도 하다. 테니스는 ‘관계’이고, 관계는 ‘테니스적’이다, 일치한다기보단 밀접하게 엮여 하나를 다른 하나에서 떼어낼 수 없음에 가깝다. 앞서 적었듯 <챌린저스>에서 사랑과 우정, 로맨스와 섹스, 그리고 테니스는 뒤얽혀 있다. 그것들을 풀어낼 수는 없다. 다만 인물 각자의 우선순위를 따져 볼 수는 있겠는데, 그마저도 엔딩에 이르면 다 무너져내린다.


타시에겐 승부보다 테니스 곁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겨야 테니스 곁에 남을 수 있으므로, 그는 이긴다. ‘뛰어나게 잘 하는’ 차원을 넘어 테니스에 통달한 그는 코트에서 뛰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선수, 테니스를 통해, 테니스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자다. 타시는 테니스와 패트릭을 사랑했고, 둘 다 잃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둘 모두와 이어져 있었다. 아트는 타시를 사랑했다. 아마 패트릭도 사랑했는데, 자각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둘 사이를 ‘공평하게’ 질투한다.) 타시 곁에 있기 위해 테니스 스타가 되지만, 타시는 사실 자신이 아니라 테니스 곁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고 있다. 패트릭은 타시와 아트를 사랑했다. 부유한 부모 집에 돌아가는 대신 호텔비가 없어 차에서 자면서도 경기를 뛰는 그가 셋 중 가장 테니스에 ‘진심’인 듯 보이기도 하지만, 글쎄. 타시의 번호를 얻기 위해, 원래 기꺼이 아트에게 져 주려 했던 게임을 이겼던 패트릭, 그에게 테니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과 닿아 있기 위한 수단이다. 아트와 공을 주고받았던 감각, 타시의 경기를 관람했던 감각, 그런 것들을 피부에 두르고 있고 싶어서 그는 테니스를 끊지 못한다.


그 사랑과 우선순위들은 엔딩에서 한데 수렴해 (“마치 나 자신마저 존재하지 않는 듯한”)‘테니스의 순간’으로 폭발한다. 패트릭과 아트가 비로소, 타시가 해변에서 설명했던 ‘테니스’를 이해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끝없이 확장되는 테니스 코트 안에서, 그들은 그저 욕망으로 가득한 플레이어다. 그러니까, 포스터에서부터 영화는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있었다. 프레임을 꽉 채운 타시의 얼굴, 그의 선글라스에 비친 두 남자의 매치. 표면적으론 “한 여자를 좋아하는 두 남자의 경쟁”이나, 본질적으론 세 사람의 기나긴 ‘테니스’, 끝에 서로 ‘잘 싸웠다’, ‘즐거웠다’는 말을 교환하며 상대방을 포옹할 만한 게임이었던 것이다.


아트가 테니스를 그만두건 말건, 패트릭이 아트를 이기건 말건, 타시가 패트릭과 잤건 말건. 그런 것들은 중요치 않다. 동시에, 결론적으로 모든 사건은 정확히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게임의 완결과 함께, 고통스럽거나 신나거나 지루하게 흩어져 있던 날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코트가 배경이 아닌 시퀀스에도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테니스 공이 있고, 세 사람의 손(가리키는/더듬는/혹은 그저 거기 있는)이나 혀(말하는/키스하는/혹은 그저 거기 있는)에는 라켓이 들려 있다. 카메라는 그 공과 라켓을 따라 움직인다. 이 ‘테니스’는 특정한 시공간에 갇혀 있지 않다. 그 구체적인 정의를 내릴 수도 없다. 타시가, 또한 영화가 말하는 ‘테니스’는 코트 안팎의 게임과 로맨스, 상처가 전부 뒤섞인 총체적인 경험과도 같다. 감독은 승패를 넘어서는 ‘테니스적 모먼트’의 미학을 영화만이 가능한 형태로 전했다. 그렇게 ‘영화’의 매력과 가치를 새삼 일깨웠다. 그 컷과 컷, 찰나들이 모여 완성되는 아름다움을.


<챌린저스>(2024) 포스터.



+

셀린 송 감독의 남편 저스틴 커리스케츠가 각본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패스트 라이브즈>와 겹쳐보이진 않는다. 스토리 자체도 흥미로웠고, 연출색도 너무나 적절했다. 구아다니노가 또…. 소재와 일치하면서도 저다운 연출을 탁월하게 해냈다.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 종합예술임을 새삼 깨닫는다.


++  

영화는 아트를 향한 패트릭의 끌림을 공공연한 비밀처럼 슬쩍 숨겨 두었다. 데이팅 앱을 들여다보던 그가 남자인 듯한 상대의 사진을 보고 잠깐 멈추거나, 아트가 옆에 앉기 전 그의 의자를 제 쪽으로 당기는 등의 연출은 괜히 들어간 것이 아닐 테다. 그러나 그 사랑을 나는 주로 조쉬 오코너의 표정에 기대 파악했다. 패트릭의 눈빛은 저도 모르는 새에 은근히 또 꽤 분명하게, 로맨틱했다. <키메라>에서도 그는 그랬다. 올해의 “잘생긴 홈리스”, 조쉬 오코너. (아, 젠데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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