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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않인 Jun 16. 2024

경계, 면역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3)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2023, 조나단 글레이저)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경계와 인간성


영화는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가족을 조명한다. 그 푸릇푸릇한 세계에는 행복한 나날과 평범한 패밀리 드라마가 흐른다. 부하 직원들에게 존경 받는 아빠는 열심히 일하고, 엄마는 집과 정원을 살뜰히 가꾼다. 주말이면 피크닉을 가기도 한다. 아빠의 일터가 바뀌며 가족은 서로 떨어지게 되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허나 그들의 대화와 웃음소리는 자주 소음처럼 느껴진다. 담장 너머의 ‘소음’이 귀를 파고든다. 이질적인 두 가지 사운드 흐름은 섞이지 않은 채로 한데 존재한다.


영화는 소리로 시작하여 소리로 끝난다. 이미지와 사운드는 ‘사실’ 불일치하지 않는다. 일상의 소리 뒤에 깔려 있는 비명, 고함, 총성…은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듣지만 의식하지 않거나 무시하는(죄책감을 느껴 모르는 척 한다기보단 ‘당연하게 거기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담장 너머의 소리들이다. 정원과 마당이 딸린 가족의 집은 아우슈비츠에 있다. 벽은 높이만큼의 시각을 차단하지만 후각과 청각은 차단하지 못한다. 시각적으로도 ‘너머’는 완전히 차단될 수 없다. 낮에는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채우고, 밤에는 불이 번져 창문에 비친다. 식료품을 나르는 이, 부츠를 닦는 이, 루돌프의 사무실에 불려간 이- ‘담장 너머’에 속하는 그들은 담장 안으로 들어오지만, ‘거기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루돌프 몫의 술을 따라 (‘유대인의 물건’에 대한 가십을 나누는) 헤트비히 일행의 곁을 ‘없는 사람’처럼 위태롭게 지나 나르는 하우스키퍼의 모습과 닮았다. ‘존’을 가르는 것은 높은 담장이 아니다. 작품은 소녀가 ‘너머’의 공간에서 그레텔처럼 과일을 남기고 ‘안’으로 돌아오는 시퀀스에서, 네거티브 흑백 필름을 통해 그 비물질적/비고정적인 경계를 드러낸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생존자에게 ‘이입’해 분노하고 슬퍼하며 ‘이야기’로 영화를 소비하기는 힘들다. 관객은 루돌프와 헤트비히의 나날을 따라가며 공범의 위치에 불편하게 자리하게 된다. 영화는 ‘보통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사는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면,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엄마가 떠난 후 가라앉은 기분을 폴란드 출신 어린 하우스키퍼를 협박함으로써 푸는 헤트비히는, 아우슈비츠에 일군 ‘즐거운 우리의 집’을 지키고 싶어할 ‘뿐’이다. 영화는 자극적이고 비일상적인 사건들보다는 그 태연함과 ‘일상성’을 묘사하고, 가해자의 비인간성보다는 인간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인간성’은 타인을 ‘비인간’으로 만들고 ‘존’을 가르며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겨움과 헛구역질


학살을 위한 수용시설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가부장, 남편의 사회적 지위로 인한 ‘혜택’을 적극적으로 누리는 아내. 루돌프는 ‘워커홀릭’, ‘소각’은 ‘특허를 낼 만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일컬어진다. 헤트비히는 남편에게 ‘초콜릿이 있으면 챙겨 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자녀들은 그곳을 일상으로 학습했다. 유니폼을 즐겨 입는 첫째는 동생을 온실에 가두고 지켜보며 즐거워하고, 그 동생은 총성이나 아우성을 놀이의 소리로 인식한다. 면역을 획득한 그들은 기침을 하지 않는다. 유대인 이웃의 ‘불행’에 즐거워하고 딸이 ‘이룬’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던 헤트비히의 엄마는 기침을 하고, 결국 그곳을 떠난다. 그러나 두 공간이 한데 있다는 사실을 높은 벽이 가리지 못했듯, 물리적으로 멀어진다고 하여 ‘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모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라 아메드Sara Ahmed가 연구했듯, “역겨움의 속성”은 대상에게 있지 않다. 아메드에 따르면 “역겨움은 수행적”이다. 주체가 “역겹다”고 말하는 일종의 ‘구토’를 되풀이해 수행하고 주위에 목격과 동참을 요구하면서, ‘역겨움의 기호는 대상에 달라붙는다’(‘역겨운 것’으로 불리게 된다). 그 대상과 발화를 목격하는 주체들이 모여 ‘안쪽’의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오월의봄 2023 시우 역본 <감정의 문화정치> 183~219쪽 참고, 개인적 해석이 들어간 요약]


루돌프와 헤트비히는 아우슈비츠를 흐르는 물에 들어간 아이들을 박박 씻겼다. 그들이 ‘저들의 것이 내게 달라붙는다’고 여겼다면 그 오염에는 실체가 없다. 부분적으로 있더라도(누군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비명) 학살과 착취로 인한 결과다. 주체는 경계를 그어 ‘비인간’의 구역을 지정하고, 다시 그 경계를 ‘침범’하여 대상의 ‘삭제’를 시도한다. ‘역겨움의 속성’에는 실체가 없지만 ‘역겨워하는 행위’에는 실체가 있다. 발화권을 지닌 자들의 ‘구토’가 모여 혐오는 힘을 얻고, 폭력으로 구체화된다. 반복되는 폭력은 일상과 섞인다. 스스로의 행위에 면역이 된 자들은 ‘기침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시각적으로)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곧 아우슈비츠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할 예정인 루돌프, 그는 텅 빈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구역질을 하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못한다. 헤트비히의 탐욕이 비교적 적나라하고 동적으로 그려졌던 반면, 루돌프의 폭력은 간접적이고 정적으로 암시되었다. 그는 내내 특권적 우아함을 유지했다. 허나 꼿꼿한 허리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꺾이기라도 했듯, 헛구역질을 하는 그는 무방비하고 당황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목격이 요구되는 발화가 아니라 그저 구토다. 어쩌면 그 상황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제 아이들의 피부를 침범했다고 여긴 ‘무언가’는 그 자신의 뱃속에서 비롯되었다. 저질러 온 일들은 이미 자신과 하나되어 분리해낼 수 없다.  


거기 오늘날을 담은 시퀀스가 이어진다. 아우슈비츠의 ‘소각 시설’과 박물관을 청소하는 직원들, 꼭 ‘이것은 픽션이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일’임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영화는 홀로 서 있는 루돌프에게로 돌아온다. 그가 뱉어내려 했던 ‘무언가’가 여전히 존재함을, 학살의 역사가 동시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전하려는 것일까. 그 불쾌는 스크린 너머로 전염된다.




아카데미 시상식, 찬사와 트로피를 쥐고 안전하게 귀가했을 수도 있었던 감독 조나단 글레이저는 수상 소감을 통해 영화의 의도를 분명히 했다. “그때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자,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점령에 의해 납치당하는  비판했다. 그는 “( 비인간화에)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언더  스킨> 이후 10 만에 장편영화를 내놓으며 글레이저는 기꺼이 위태로워지기를 택했다. < 오브 인터레스트>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현재진행형의 제노사이드를 나란히 응시한다. (유산을 깎아내리거나  학살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프로듀서 중 하나인 대니 코헨을 비롯한 일부 발화자들의 “부동의 “비판 ‘아우슈비츠를 다룬 영화로 상을 받은 유대인 감독으로서  글레이저의 발언이 얼마나  의미였는지를 더욱 깨닫게 한다.


소재로 삼은 특정한 역사에 묶여있지 않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감독의 발언으로 수렴하는 작품 또한 아니다. 창작자의 품을 떠난 영화가 머릿속에서 생명을 얻어 ‘담장 너머’를 인식할 것을 요구하는 듯했다. 움직이는 경계들과 비가시화된 세계들을 떠올리며 고민한다. ‘헛구역질을 하는’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어쩌면 우리는) 무엇에 둔감해졌으며 어떤 것들에 ‘면역’이 되었는가.





+ 조나단 글레이저 인용


“우리의 모든 결정은 현재에 있는 우리를 반영하고 직면하기 위해 이루어졌다, 그때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자고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우리의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곳을 보여준다. 그것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 모두를 그렸다. 바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유대인성을, 홀로코스트가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갈등으로 몰아넣은 점령에 납치당하는 것을 반박하는 사람들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 10월 7일 이스라엘의 희생자이건, 가자지구를 향한 현재진행형의 공격에 의한 희생자이건, 이 비인간화의 모든 희생자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All our choices were made to reflect and confront us in the present, not to say look what they did then, but rather look what we do now. Our film shows where dehumanization leads at its worst. It’s shaped all our past and present. Right now, we stand here as men who refute their Jewishness and the Holocaust being hijacked by an occupation which has led to conflict for so many innocent people. Whether the victims of October the 7th in Israel or the ongoing attack on Gaza, all the victims of this dehumanization, how do we resist?”

- Jonathan Glazer, 제 96회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수상소감 중


https://youtu.be/Uuumx5Ja8Ns?si=w79RJmAPjHhUOO1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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