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키맨>(2024)
<몽키맨(Monkey Man)>(2024, 데브 파텔)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2024.06.27 덧붙임
영화를 보며 든 기시감의 원인은 과연, 관람 전 감독 인터뷰 클립을 일상적으로 시청해서만은 아니었다. 주요 플롯은 전형적인 복수-동력-영웅 탄생 서사의 그것을 따른다. 닳도록 들은 대사도 종종 포착된다. 그럼에도 <몽키맨>은 유일한 작품이다. 힌두교 신화에 기반을 둔 액션 장르무비의 형식을 띤 채 인도 사회를 고발한다. 종교 자체는 존중하면서 부패한 종교(정치)인은 썰어버리는, 모호하게 뭉뚱그리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는- <몽키맨>이 ‘웰메이드’인 까닭 중 하나는 정확한 곳을 찌르는 적나라함에 있다.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액션의 폭력성 역시 적나라하다.
대놓고 ‘존 윅’을 언급하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는 <몽키맨>은 동시에 스스로가 ‘인도판 존 윅’으로 분류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키드’는 무기 암매상에서 “존 윅의 것과 같지만 중국제인” 총을 마다하고 38구경을 고른다. 그러나 오로지 개인적 복수를 목적으로 택한 총은 실패의 무기다. 죽을 위기를 넘기고 약자들의 영웅 ‘몽키맨’으로 다시 태어난 키드의 무기는, 온몸, 주방 나이프, 조리용 와인, 웨이터의 쟁반, 직원의 구두 따위 것들이다.
원숭이는 종교적인 상징이면서 계급에 대한 메타포다. 격투장을 운영하는 ‘타이거’는 원숭이를 ‘야수’, 혐오스럽고 ‘낮은’ 동물로 일컫는다. 키드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며 하누만을 동경해 왔다. 밑바닥에서 ‘감히 저 위에 있는 태양을 넘본 죄’로 벌을 받은 신. 키드에게 원숭이는 ‘낮은’ 그대로 성스럽고 용기 있는 존재다. 몽키맨은 약자들의 영웅이어야만 하고, 키드의 복수는 계급의 전복, 알파가 말하듯 모두의 싸움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수의 과정에서 약자를 짓밟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정체성을 확실히 인식하기 전에도 키드는 떠돌이 개에게 밥을 주었고, 경찰에게 쫓기는 와중 어린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 썼다. ‘몽키맨’이 된 그는 링 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일 파이터를 때려눕히지만 마지막 순간 배트를 내려놓는다. 그가 망설임 없이 칼을 꽂는 대상은 부패한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 뿐이다.
중상을 입은 키드를 숨겨주고 안식처를 제공하는 이들은 히즈라, 고대 인도부터 있어 왔던 젠더퀴어들이다. (고대 인도에서 히즈라들은 존중받았으나, 영국이 인도를 점령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다. “식민지배자들이 ‘부자연스럽다’고 간주하는 것은 무엇이든 불법화하는 형법 377조”가 도입되었고, 2018년 위헌 판정이 나기 전까지 차별과 억압의 근거로 쓰였다고.[gcn]) 거리에 나가면 자주 폭행을 당하고 ‘경찰이 수색조차 불편해하는’ 이들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며 둘 다이기도 한” 신을 섬기는 사원에 모여 산다. 거기서 키드의 실루엣은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그곳이야말로 그가 편안하게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장소다. 소외되고 배제 당한 전사들의 집,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지어진 세이프 플레이스다.
키드에게 “네가 누구인지 기억할 때”라는 말을 전한 이는 히즈라 커뮤니티의 리더 ‘알파’다. 키드는 익명의 ‘키드’로 살아왔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그의 인생을 정의했다. 스스로 어머니의 ‘아이’에 머무르며 복수를 위해 살아왔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할 때”: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지만, ‘트라우마만으로 정의되지 않는 진짜 너’를 찾으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알파는 키드에게 ‘부서진 자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너를 갈라 열어 줄cut you wide open” 독을 건넨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기억을 뒤덮은 강렬한 감정을 걷어내고, 거기 담긴 진실과 자아를 직면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그곳에 붙들려 있던 어린아이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키드는 경찰청장 ‘라나’의 배후에 있는 종교 지도자 ‘바바 샥티’ 또한 인식하게 된다.
가장 ‘아래층’인 주방에서 일을 시작해 ‘승진’했다가 추방당했던 빌딩에, 키드는 전복자로서 귀환한다. 이제 그는 혼자 싸우지 않는다. 어머니, 거리의 아이들, 성노동자들, 히즈라 동료들- 전부를 등에 업고, 혹은 그들과 나란히 싸운다. 키드가 ‘몽키맨’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격투에서 이겨 딴 돈을 히즈라 커뮤니티에 선물하는 것이다. 그것을 상납해 사원을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히즈라들은 대신 신의 전사 코스튬을 입고 혁명에 힘을 보탠다. 성판매일을 하며 비인간으로 다뤄졌던 시타, 그는 고용주이자 억압자인 퀴니의 뒤통수를 쟁반으로 내리치며 이 전복에 동참한다. 키드는 ‘위층’에 모인 이들을 차례로 넘어, 해묵은 원수 라나에게 다다른다. 그를 죽여도(이 킬링의 도구가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구두라는 것조차 완벽하다.) 복수는 끝나지 않는다. 영화 포스터에 쓰인 씬이 이즈음 화면에 떠오른다. 피범벅이 된 키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바 샥티가 있는 꼭대기층에 내리는, 계급의 끝과 다른 끝의 마주침이다. 바바 샥티는 ‘폭력의 순환’을 끝내기를 권유하지만, 그건 애초에 잘못된 표현이었다. 폭력은 일방적이고 수직적으로 행사되어 왔고, 누군가 “왕”의 자리에 있는 이상 계속될 것이다. ‘아래층의 영웅’이 맨 위층에 올라가 “인간이 만든 신”(Dev Patel)을 죽이며(죽여야) 이야기는 완결된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어머니에 대한 키드의 회상이 있다. 부패한 공권력과 왜곡된 종교를 죽이며 복수를 마친 키드는 쓰러지며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다. 비로소 기억을 놓아준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죽었든 단지 정신을 잃은 것이든, 그제야 어머니의 비명을 잊고 잠들 수 있었던 것일지도. 그가 두 번째로 부활하여 보다 본격적인 ‘피플즈 히어로’로 태어나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왕"은 죽었지만 계급은 그대로이니.
정작 인도에서는 개봉 여부조차 불확실하고, 스트리밍으로 공개된다고 해도 상당부분이 검열에 의해 삭제될 상황이라고 한다.[Indiewire] 인도의 검열 시스템은 성적, 폭력적, 종교적, 정치적인 콘텐츠를 그 맥락에 관계 없이 엄격하게 규제한다는데: 예를 들어-시타가 한 백인에게 물건처럼 다뤄지는 모습을 보고 키드의 트리거가 당겨져, 남자의 손부터 벽의 초상화를 비롯한 모든 요소가 트라우마에 뒤섞여 피범벅이 되는 연출로, ‘결국 전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 통째로 잘려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물론 공개된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다. (영화의 핵이 인도의 지배층 힌두교 민족주의자들을 겨냥하고 있고, 실제 시위 푸티지를 사용할 정도로 비판에 진심인데... 자르고 자르다 10분도 안 남을 것 같다.) 이는 <몽키맨>이 인도 사회에 필요한 작품이었다는 반증이다.
영국 이민자 2세대인 데브 파텔은 몇년 전 한 인터뷰에서, “완전히 영국인이 되기에는 충분히 영국스럽지 못하고, 완전히 인도인이 되기엔 충분히 인도스럽지 못한”, “문화적으로 노 맨즈 랜드에 묶여 있는”[The Guardian] 기분을 느껴 왔음을 털어놓은 바 있었다. 배우로서 ‘그 사이 어딘가의 클리셰’로 ‘취급’되곤 했던, 어느 국가의 대변자도 아닌, 그의 귀한 시선으로 바라본 인도가 <몽키맨>에는 담겨 있다. ‘언더독’의 히어로 몽키맨의 탄생을 환영한다.
사심을 자제한 평가
메시지를 스토리에 녹이고 연출로 구체화하는 방식에서 파텔의 통찰력과 감수성이 엿보인다. 영화적 재미를 이끌어내는 방법도 꽤나 탐구한 듯하다. 두 가지 언어를 적절히 번갈아 사용하며, 대사로 많은 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역동적이고 실험적인 촬영/편집을 사용했다. 액션은 상세하게 잔인한 와중 깔끔하다. 맥시멀한 타입이어서 취향에 따라 눈귀가 피로할 수는 있겠는데, 그럼에도 한 번은 볼만하다. 펜데믹에, 예산은 부족하고, 주연 배우(=감독=프로듀서)는 첫 액션씬을 찍다 손이 부러진 열악한 상황에서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한 손 위주로 다수 액션씬을 소화했다거나, 장비가 망가져 파텔의 아이폰을 줄에 묶어 카메라로 썼다는 등의 비하인드는 영화 관람을 방해하지 않는다. 지갑이 돌고 돌아 키드의 손에 들어가는 시퀀스처럼 그저 보기에 즐거운 장면들도 있고, 타이트한 컷 사이 섞이는 비언어적 유머(깨져야 할 창이 멀쩡하다거나)는 잔뜩 조여든 뱃속에 효과적으로 숨을 불어넣는다. 노력을 이 정도의 결과물로 만들어낸 건 재능일 테다. 데브 파텔은 성공적으로 감독 데뷔를 마쳤고, 그 안에서 주연 배우로서의 역할 역시 훌륭하게 소화했다.
데브 파텔 인용: 히즈라 커뮤니티 레프리젠테이션
“내게 있어 이것은 약자들, 목소리를 잃은 자들, 소외된 자들의 성가다. 함께, 그들은 선과 정의를 위한 전쟁을 선포한다. 나는 히즈라 커뮤니티-인도의 제 3의 젠더를 지닌 이들-를 이야기에 꼭 포함하고 싶었다. 그 핵에 있어서, 이것은 믿음-그 아름다움에 관한 복수 영화다.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싸워야 한다, 서로에 대항하여가 아니라.”
“For me, this is an anthem for the underdogs, the voiceless and the marginalized. Together they wage this war for the good and the just, and for me, I really wanted to include the Hijra community, the third gender in India. This, at its core, is a revenge film about faith, the beauty of faith. We should be fighting for each other, not against each other.”
- Dev Patel, with [Variety]
페이버릿
키드가 퍼커션 마스터의 연주에 맞춰 샌드백을 치는 장면에서 시작되는 시퀀스. 훈련이자 놀이이자 일종의 공연이다. 이 영웅은 수련마저 함께하고, 히즈라들은 고된 수련도 놀이의 일부로 만들어준다. 마침내 키드보다 먼저 지친 마스터가 하산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클리셰임에도 독특한 매력이 있는 컷들이다.
알폰소와 속편의 가능성
‘상승의 즐거움’을 말하던 알폰소가 키드가 훔친 제 차에 올라타 자발적으로 ‘공범’이 된 까닭은, “저들은 우리를 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서일 테다. 원망하는 대신 먼발치에서 친구를 응원하고 믿기로 한 그가 아직 계획 없는 씨퀄에 사이드킥으로 등장할 확률을 점쳐본다. 만약 현실화된다면 살아남은 정치인을 새로운 ‘빌런’으로 써먹을 수 있겠고, 당연히 알파를 비롯한 히즈라 전사들도 메인이어야 한다. 속편을 바라면서도, 한 편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든다. 데브 파텔은 현명한 배우이고 필름메이커이니 알아서 잘 판단하리라 믿는다.
* 참고 기사
https://variety.com/2024/film/columns/dev-patel-monkey-man-sequel-trans-representation-1235960318/
https://gcn.ie/dev-patel-india-third-gender-monkey-man/
https://www.indiewire.com/news/analysis/monkey-man-india-censorship-battle-1234971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