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 <라이트 폴>
<라이트 폴(Light Falls)>(2023, 페든 파파마이클)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SNS에 익숙한 젊은 관객을 노린 건지, 영화는 인스타그램 릴스를 닮은 일상 콜라주로 시작된다. 마테오와 클라라의 스토리가 클라라와 엘라의 스토리가 되는 과정을 대강 보여주는데, 그들은 자주 벗고 있거나 특정 신체 부위를 내놓곤 한다. 일단 지켜보자.
클라라와 엘라는 그리스로 여행을 떠난다. 한적한 숙소를 잡고, 로컬 식당을 방문한다. 마을 주민들은 젊은 외국인 여성들을 ‘친절하게’ 대한다. 영화는 낯선 남성들과 나누는 대화에서 느낄 법한 특수한 긴장을 엘라의 얼굴에 드리우려는 듯하다가, 상대방의 호의와 함께 활짝 풀어버린다. 그리고 베톤, 알틴, 에디가 등장한다. 그들은 그리스에 일하러 온 알바니아인들이다. 일상적으로 혐오와 차별을 겪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영화는 같은 동네에 머무르는 두 여자와 세 남자의 하루를 각각 다루다, 클럽 입구에서 교차시킨다. 클라라와 엘라는 알바니아인들이 거절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일종의 대조 효과를 노린 듯하다. 조지아 출신인 퀴어 여성 커플 클라라와 엘라에게도 분명 사연이 있었을 터인데, 영화는 그들의 서사를 그저 클라라의 남자친구 마테오,로 끝낸다. 하지만 지켜보자, 어쩌면 휴가지라는 장소성이 생활을 잊게 해주어서 인지도 모르니.
클라라와 엘라는 길거리에서 스스럼없이 애정표현을 하고, 스쿠터를 빌려 타고,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며 여유롭게 휴가를 즐긴다. 그러다 낯선 폐건물을 발견하고 들어가기로 한다. 클라라는 불안해하고, 엘라는 클라라를 촬영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엘라처럼 클라라를 촬영한다, 단 엘라의 그것처럼 애정어린 시선을 취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굳이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기대 에로틱한 키스를 나누고, 엘라는 분리된 엘리베이터 문과 함께 컴컴한 지하로 떨어진다. 패닉한 클라라는 건물을 헤매다 세 남자를 맞닥뜨린다. 두 여자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들어간 폐건물은 그들의 집이었으므로.
클라라는 줄곧 비키니 차림이다. 그는 영어로 도움을 요청하지만 저쪽 아무도 영어를 모른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 세 남자는 낯선 여자의 다리에 흐르는 피를 보고 당황하고, ‘범죄자로 몰릴까봐’ 클라라를 방에 가두기로 한다. 베톤과 클라라가 몸싸움을 하고, 여기서 애써 외면했던 예감이 적중한다. 지속적으로 경찰관에게 성착취를 당하던 베톤이(이걸 어떤 ‘인과’로 사용하고 싶었던 건지) 클라라를 성폭행함과 동시에, 균형 있게 쌓일 수도 있었던 긴장감은 불쾌하게 치우치고 망가진다.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고 꽤나 오랫동안, 영화는 클라라를 ‘비키니를 입고 감금당한 여자의 몸’으로 다룬다. 성폭행 씬은 물론, 약으로 인해 정신을 잃은 클라라의 다리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알틴과 에디가 대화하는 시퀀스에서도- 캐릭터나 배우가 행동하는 방식과는 별개로 카메라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이 불쾌감은 느닷없이 떨어진 게 아니다. 언급했듯, 영화는 초반부터 집요하게 클라라와 엘라의 나체와 반나체를 연출하고 찍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엉덩이가 다 보이도록 손을 뻗어 과일을 따는 컷, 속옷을 입지 않고 티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컷, 그마저도 입지 않고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는 컷, 비키니 상의를 탈의하고 있는 컷, 그것들은 별로 자연스럽고 편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더 이상 ‘지켜보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을 수 없게 됐다.
클라라와 엘라가 세 남자의 거주지에 (모르고) 들어간 것은 맞다. 늘 혐오의 시선과 추방의 불안 속에서 사는 알바니아인들이, 패닉한 클라라를 보고 도리어 패닉해 과잉으로 대응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약자와 약자의 충돌, 잘못된 타이밍과 소통의 불가능으로 벌어진 비극적인 해프닝… 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다면, 베톤이 클라라를 성폭행하지 말았어야 했다. 폭력의 묘사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여성 캐릭터들의 몸을 벗기고 훑어온 카메라로, 굳이 그 순간 그 장면을 찍었던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이다. 게다가 ‘강간범’은 이주노동자를 위험한 타자로 대상화할 때 쓰이는 단골 프레임이 아닌가. 경찰한테 성착취를 당해왔건 어쨌건, 이제 베톤은 성폭행범으로 밖엔 안 보이고, 그의 여러 면을 애써 풍부하게 보여주는 카메라는 피곤하게만 다가온다.
엘라를 클라라를 관람하기 위한 핑계로 쓰고 버린 후(비약이겠지만 화나서 그냥 쓴다), 클라라의 신체를 착취하고, 방관자 에디의 ‘순수함’까지 견디게 하고 나서야,(목소리를 잃은 클라라가 방관에 대한 에디의 변명과 ‘순수한’ 행동에 분노+공포를 느끼는 씬은 성공적이라면 성공적이었는데, 이것도 배우의 눈빛 덕을 본 거라서…) 영화는 그의 팔다리를 풀어준다. 그가 손목의 결박을 푸는 동안, 여전히 비키니만 입은 몸을 천천히 훑는 컷은 또 왜 끼어들어가 있는지. 클라라가 다 찍어 죽일 때 짜릿함을 느꼈음을 부정하긴 힘들지만, 기계적이고 말초적인 종류의 쾌감에 가까웠다. 피해 여성이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줄거리를 지녔다고 해서 ‘여성’ 영화가 되는 게 아니다. 그 과정을 어떻게 그리는가에 따라 페미니즘 영화가 될 수도, 창작자의 미소지니가 의심스러워지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
클럽, 엘라와 클라라가 춤추던 모습을 욕망과 아쉬움이 담긴 눈길로 보던 네 남자. 감독의 시선이 그것과 유사하지 않았나-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그들은 ‘건드리지’ 못했던 두 여성 캐릭터를 작가와 감독 ‘입맛대로 굴린’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나. 모르고 봤는데 촬영감독으로 오래 활동한 페든 파파마이클 연출작, 그는 아마도 논퀴어인 (퀴어라면 말이 안 됨) 남성 감독이다. 그가 카메라에 담기로 결정한 장면들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할리우드에서 익숙하게 해온 대로 고민 없이 디렉팅한 걸까?)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화면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아마 잘못된 시공간에서 이루어진 약자-타인간의 조우가 비극으로 치닫는 서사를 그리면서, 야심차게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담고자 한 듯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결론적으로 이주노동자를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면 연출의 실패다. 클라라 역 배우가 무슨 생각을 하며 연기했는지, 베톤 역 배우가 알바니아인이라면 그역시 무슨 생각을 하며 연기했는지가 궁금하다. 이 영화가 어째서 프라이드 영화제에 걸렸는지조차 이젠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