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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she의 "새드 보이" 팝

Topshe

by 않인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관람 후 사운드트랙 작곡가를 검색한 관객이 나뿐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한다. 현실을 충실히 보여주면서도 꿈꾸는 힘-빛을 상상하는 힘-을 잊지 않는 영화에서, Topshe의 음악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다. 인도 캘커타 기반 아티스트인 Dhritiman Das: 톱시는, 2019년 첫 EP 발표 이후 공격적이지 않은 템포로/그러나 꾸준히 음악과 영상을 만들고 있다. 파얄 카파디야 감독과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도, 톱시의 음악 세계가 <우리가~>와 닮아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뭄바이는 카오스다. 이 도시에 언제나 꽉 차 있는 건 고독이다. 호우와 영원이다, 그 모든 것에 드넓게 퍼져 있는sprawling 공허함이고.”[Hollywood Reporter India] 이미 몇 개의 기사를 읽은 채로 만난 이 문장들이 준 새삼스러운 깨달음은, 음악이야말로 톱시의 목소리라는 점이다. 말그대로의 싱잉보이스과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라는 의미에서의 목소리 둘 다. (한때 데이빗 보위가 말했듯 아티스트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사회/사교적으로 dysfunctional하게 되는 것이니…) 예술작품이 의사 전달 매개라는 점은 아티스트에게 있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송라이터가 곡에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도 (물론) 아니다. 허나 톱시의 음악을 들으면 정말로, 누군가와 내밀한 대화를 주고받는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다.


베드룸 팝으로 분류될 법한 톱시의 곡들은 베드룸 팝인 것만도 아니다. 첫 EP <Never A Romantic>은 아티스트의 개성과 잠재력이 충분히 들리는 앨범이다. 다섯 곡은 각자의 컬러로 빛나면서도 한데 모인다. 대강 ‘편안하다’, ‘드리미하다’ 정도로 첫인상을 뭉뚱그릴 수도 있다. 허나 툭툭 던지는 보컬과 실험적인 디테일은 긴장을 풀고 늘어지기를 방해한다. 오프너 ‘1000 Aqi’부터 재미있다. 시계 초침 소리를 닮은 리듬이 주의를 환기하고, 풍부한 화음은 몰입감을 더한다. 멜랑꼴리한 전자음은 이어질 트랙들에서 변주되며 톱시의 인장으로 남을 예정이다. 모던한 포크 ‘The Best Time’은 다양한 음색의 백킹 보컬과 추임새 등 흥미로운 세부사항으로 가득하다. 후반부, 코러스와 함께 그룹사운드는 고조된다. 재치있는 스트링이 반전을 이끄는 와중, 리드 싱잉은 차분하게 중심을 잡는다. ‘Language’는 발랄한 포크다. 그러나 어색하고 어긋나 있다는 의미에서 ‘붕 떠있는’, 웃지못할 감각을 담고 있다. ‘Had too Much’는 베이스라인이 두드러지는 듀엣 발라드로, 나른하고 감성적이다. 유령이 어르는 소리,라고 적고픈 코러스가 떼레민을 연상시키는 전자음으로 연결되는 간주가 독특하다. ‘Never a Romantic’에는 베이스와 전자음이 앞 트랙과 짝을 이루듯 배치돼 있다. ‘Had too Much’의 그것보다 한결 기묘하고 날카로운 전자음 추임새, 패닉까지 오진 않았으나 숨이 조금 막힌 채 뱉는 나직한 비명처럼 들린다. 울부짖음과 환호성이 뒤섞인 듯도 하고, 사이렌 음인 듯도 하다. 아마 그 정도가 <Never A Romantic>이 다루는 정서다. 이런 류의 효과음은 EP에 뒤이어 공개된 싱글 ‘Meant to Be’에도 들린다. 고요하고 무난하게 흐르며 사색을 유도하는가 싶더니, 재기로운 재즈 멜로디로 놀라움을 선사하는 트랙이다.


<Never A Romantic>은 미묘한 불균형과 불안, 꾸준한 무기력과 실망감 따위를 노래한다. 화자는 ‘대체로’ 실연당한 상태다. 여기서 실연은 꼭 특정한 사람과의 인연을 상실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장소들, 문화 사이에서 길을 잃고, ‘그저 좋은 시간(만)을 보내고자 하는’ 세상에서 홀로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어딘가 어긋나 있거나, 이곳과 저곳을 오가며 배회한다. “벽처럼 두꺼운 공기”에 짓눌려 있는 ‘1000 Aqi’의 화자는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 쌓인 먼지를 감각한다. ‘Language’의 화자는 “나를 샌드위치로 만드는” 언어로 말하고, 제 언어를 말하지 않는 사람 또는 장소와 사랑에 빠진다. 두 정체성 가운데 끼어 있는 느낌을 유머러스하게 훑고 지나가는 곡이다. ‘The Best Time’에는 “전부 다 용서되는” 동시에 “아무 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이 있다. 날마다 휙휙 뒤집히는 희망과 절망의 예감 사이에서 ‘나’는 혼란스럽다. 그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다. ‘너’가 했던 말, “더 나빠질거야, 확신해.”는 곡의 마무리에 ‘나’의 목소리로 다시 전해진다. ‘Meant to Be’에는 “내 발에 너무 큰 신발”이 “서로 다른 박자에 맞춰 춤추”고 있다. 이 화자‘들’은 모두 아티스트 본인이거나 그 변주일 것이다. 일차적으론 독백으로 들리는 이 이야기들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청자는 자신의 경험/감정을 돌아보거나 발화하게 될 수도 있다.


<Never A Romantic>의 구성 요소는 주로 ‘~가 아닌 것’들이다. 불확실하거나 불분명한 것, 이도 저도 아닌 것이나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그러고보니 제목부터 부정의 표현이다. 화자/화자들이 고립이나 단절을 원하는 건 아니다. ‘Never a Romantic’은 불꽃에서 파생되는 대화의 진정성을, 눈을 마주한 상대방의 진심을 의심하고, “나 같은 사람”, “낭만주의자가 아닌 누군가”를 그리 어렵지 않게 찾기를 바란다. ‘낭만적이다/좋다고 말해지는 것들’을 죄다 의심하면서도 타인과 마주치길 원하는 누군가를.


프로듀서 Philtersoup과 콜라보한 결과물인 싱글 셋은 EP의 맥을 이으면서도 보다 가볍고 경쾌한데, 담고 있는 정서는 유사하다. ‘Sad Boys’가 느슨한 톤으로 탐구하는 것은 (아직도/주로) 남성들에게 있어 ‘징징거림whining’으로 여겨지곤 하는 연약하고 섬세한 감수성이다. 톱시는 관찰자의 자리로 물러나 ‘그he’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궁금해한다, “슬픈 남자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모여서 대화하고 있을까?” 마무리에 이르자 곡은 여전히 편지를 주고받는, ‘그’의 헤어진 연인에게로 부드럽게 시선을 돌린다. ‘그녀’의 일상적인 즐거움, 저녁 메뉴를 읊으며 곡은 끝나버린다. ‘그녀’의 안중에 ‘그’의 슬픔은 없다는 뜻일까. 그보단, 분명한 이유가 없는 슬픔을 마주하고 처리하는 법을 아는 자의 제스처라고 읽어본다. 재즈가 얕은 농도로 첨가된 ‘Always Ends This Way’는 언뜻 로맨틱하다. 스스로 “dead inside”라고 말하는 ‘너’와 “barely live enough for one”인 ‘나’가 만난다. ‘나’는 ‘너와 나’의 관계가 엉망인 삶을 치유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헌데 그는 점점 조용해지더니, “늘 그런 식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한 번도 낭만주의자인 적이 없었던” 톱시의 로맨틱은… “Love’s a tiny flame / Burns me straight to hell”이라고 노래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런가하면 ‘All I Want’은 약간 더 활동적인 댄스가 가능한(?) 팝이다. 가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데, 시적인 표현이 돌연 끼어들며 현실 감각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무감한 듯한 등장인물이 갑자기 ‘울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하는데, 톤이 대체로 일정해서 청자는 속기 쉽다. 어쩌면 처음부터 늘 울고 싶은, 통곡까진 아니고 좀 훌쩍이고픈 상태였는데 그다지 철저하지 않은 위장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사는 “Topshe”와 친구 “Roshni”가 공연을 보는 장면에서 출발하는 하룻저녁의 일기로, 이렇다할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1절에는 “양말을 안 벗고 싶다”며 산책을 제안하는 톱시가 있고 2절에는 추우니 이만 들어가자며 “(집안에서)양말을 신고 있어도 돼”라고 하는 로슈니가 있다. 톱시는 추워도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날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고, “we’re getting old”라고 말하는 로슈니는 나이듦에 순응하는 걸까. 그리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곡이 포착하려는 것은 그 이상한 경계에 있는 공기, 서로 다른 온도로 변하는 개인들 간의 우정이다. “모든 것이 끝나리란 걸 알지만, 내가 이 드넓은 세계에서 원하는 건 그저 친구야”라는 후렴으로 요약할 수는 있겠으나, 송라이팅은 정갈한 요약설명을 거부하는 행위가 아닌가, “I’d burst into tears but I’m made of stone” 같은 구절을 쓰는 것, 센티멘탈한 일기를 경쾌한 멜로디로 흐르게 하는 것.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이후 공개된 싱글 ‘Things Don’t Change’의 사운드에서 우리는 영화 OST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로 몽환적이거나 청량한, 때론 기이한 전자음 디테일과 코러스는 톱시의 작업에 자주 있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이 편안한 재지팝은 블루의 바다에서 나른하게 허우적대는 리듬으로 진행되는 듯하다. “그 바다의 밑바닥에서 삶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 더 깊은 쉐이드의 블루만을 발견했다”는 고백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울음을 터트리기엔 너무 우울한 소년”과 “온 세상을 비난할 수밖에 없는 소녀”를 목격하거나 이해하는 것, ‘정말 많이 걸었는데도 제자리걸음으로 느껴지는’ 상태를 털어놓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떠나지만 친구들은 남을거야”라고 노래하는 것이, 톱시 스타일의 위안이다.


톱시가 동시대를 부유하는 방법은, 일상 가운데서 별안간 솟아오르거나 어느새 피부에 스며들어 있는 우울과 비관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 작업들에는 나직한 유머가 있다. 냉소주의로 치닫지 않는 냉소가, 허무주의까지는 가지 않는 허무가 있다. 대개 본인이 촬영한 뮤직비디오 안에는 때로, 장소 안에 자리하지만 완전히 속해 있지는 않은-미스핏처럼 행동하는 스스로의 상이 배치돼 있다. 거기 포착된 표정, 그 엌워드-센티멘탈-유머러스가 아마 톱시의 미학이다. 그는 별로 욕심내지 않는다. 혹은 그 티를 내지 않는다. 촘촘하게 겹쳐놓기보단 슬쩍 끼워넣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려 애쓰기보단 나사 하나쯤 빠진 은근한 조화를 추구한다. 불안정한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 사이에 놓인 영혼들에게 톱시의 음악은 닿는다. 그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리라’는 식의 막연한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도 내일이 안 보이고 오늘은 우울해’라고 이야기한다, 단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선에서.


https://youtu.be/ry5QAxrp-mo?si=6cAyH_FNn2b-E_IH

'Never a Romantic'



* 참고 인터뷰

https://www.hollywoodreporterindia.com/features/insight/next-big-thing-topshes-quiet-break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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