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탈 밸류>(2025)
<센티멘탈 밸류(Affecksjonsvierdi)>(2025, 요아킴 트리에)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1.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
오래된 집의 곳곳을 들여다보며 시작한 영화는 집의 관점으로 글을 쓰는 노라의 상상과 물음들을 경유해 장소의 역사를 재생한다. 죽음과 탄생, 소음과 고요의 장면들이 지나간 벽 한쪽에는 뿌리깊은 균열의 유산이 있다. 아빠 구스타브가 떠난 집에서 심리상담가인 엄마 세실이 노라와 아그네스 자매를 길렀다. 집에 모이고 깃든 영적 힘이 거주자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듯, 거기 머물렀던 이들 중 일부는 ‘그것’(일단은 이렇게만 적는다)을 공유하게 되었다. 구스타브는 어쩌면 집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영화 후반부, 홀로 테라스에 앉은 그는 슬픈 헛웃음을 터트리며 허공에 가운뎃손가락을 날린다. 그 모습은 집의 시선을 취하기라도 하듯, 내부에서 얼룩진 창문을 사이에 두고 촬영된다.
에리크의 생일날 어색하게 재회한 노라와 구스타브는 고약한 유머감각을 공유한다. 에벤의 스크린타임에 대한 노라의 농담, 손자의 생일선물을 제물삼은 구스타브의 농담. 부녀는 닮았다. 영화는 그들이 서로를 곁눈질하며 비밀스럽게 웃는 모습, 공모하듯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노라는 오래된 분노를 꺼내고, 구스타브는 사과하는 대신 분노를 내려놓으라 말한다. 노라는 아그네스의 집을 나와 밤길을 걷는다. 흐르던 음악은 장면이 바뀌어도 잠시 이어진다. 노라가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 곁에 주저앉아 흐느낀다. 이곳이 연극 무대임을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문은 소품이고 노라가 입은 옷도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마치 노라가 그대로 밤길을 걸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것처럼 느꼈다. 곧 화면이 넓은 구도로 전환되며 스튜디오가, 맞은편에 앉은 극단 동료들이 보인다. 영화는 이곳이 무대임을 숨기지 않지만, 연기와 ‘진짜’ 노라의 감정/상태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노라의 ‘그것’과 인물의 ‘그것’은 아마도 뒤섞여 있다. 영화 초반부 무대에 서기 직전 노라는 패닉했다. 대기실에서 나오지 않고, 동료에게 뺨을 때려달라고 부탁하고, 숨이 막힌다며 의상을 찢는 등의 사건이 잇따랐다. 소란 끝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선 노라의 동요가 증상의 잔여인지 몰입의 과정인지 말할 수 없었다.
‘그것’. 프로듀서는 ‘그것’이 구스타브가 다루어 온,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마주한 적은 없었던’ 주제라 말하고, 아그네스는 구스타브의 대본이 노라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미 인물의 거대한 일부가 된, 모든 것의 원인인지 아니면 더 깊은 무언가의 증상인지’(레이첼) 알 수 없는 무언가. 노라와 구스타브의 ‘그것’은 서로 다른 모양을 띠고 연결돼 있다. 특정한 사건들의 인과로 분석할 수 없는 ‘그것’은, 정확히 이름을 명명할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구스타브가 영화를 만드는 일과 노라가 연기를 통해 타인의 피부에 안착하는 일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이 예술의 원천이라거나 예술로 (‘그것’을)승화한다는 식의 묘사는 낭만화일 테지만, 창작에 몸담는 일이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치유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방법 중 하나라고 이해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2. 허구에 담긴 실제와 실제처럼 보이는 허구, 그 사이에서
구스타브가 쓰러진 전후로 영화의 전개와 (구스타브의)영화 만들기는 순조롭게 이어진다. 그가 쓰러지는-그러나 영화를 다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는- 사건 자체도 어쩌면 그 ‘순조로운 전개’에 포함된다. 자신과 역할 사이 좁힐 수 없는 간극을 감지한, 외부에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 주던 레이첼이 하차하고 머지않아 대본을 읽은 아그네스가 노라를 설득한다. 자매는 병실에 누워 ‘농담’하는 아빠를 보며 피식 웃고, 노라는 원래 제 것이었던 배역을 맡는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명 배우가 하차해도 자금은 조달되었고, 촬영기사 페테르도 합류했다. 구스타브의 바람대로 에리크가 노라의 아들 역으로 출연한다. 아그네스도 보호자로서 현장에 있다. 자전적인 허구를 매개로 가족은 간접적으로 화해한다. 노라는 상담을 받지 않고 구스타브는 사과하지 않는다. 구스타브의 영화는 아직 촬영 중이지만 <센티멘탈 밸류>는 이다지도 완벽한 완결을 맞이한다. 다만 그들이 살았던 집이 아니라 그곳을 본딴 세트에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연인 악셀과의 관계에 위화감(일단 이렇게 적어둔다.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과 동기들을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이기도 하니)을 느끼던 율리에는 우연히 만난 에이빈드에게 이끌린다. 어느날 아침 율리에는 전등 스위치를 눌러 시간을-정확히는 자신과 에이빈드를 제외한 세상의 전개를- 멈춘다. 에이빈드에게 달려가 만 하루를 함께 보내고,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와 악셀과 이별한다. 관객은 이 초현실이 허용임을 알고 관람한다. ‘이렇게 하고 싶었다’는 상상인지 ‘마치 그런 것만 같았다’는 은유인지 모호한 그대로 율리에가 느끼는 바를 보여주는 연출이다. 허구 속의 실제, 혹은 불가능한 사건을 구현함으로써만 표현 가능한 감각. 전지자의 목소리에 의해 해설되던 캐릭터 율리에가 설정된 시공간의 프레임을 벗어나 스스로 원하는 씬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유 의지를 지닌 인물은 또한 의지로 통제되지 않는 많은 것들(자신의 신체와 언행, 관계, 사건, 죽음 등)을 마주한다.
<센티멘탈 밸류>의 순서는 이를테면 반대다. 현실적으로 ‘거짓’일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며 그게 어떤 면에서는 ‘진실’임을 어필하는 게 아니라, 실제인 양 보여주고는 그것이 허구 속의 허구임을 드러낸다. 노라가 노라로서 느끼는 것들과 배역으로서 느끼는 것들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을 일컫는 게 아니다. 감정의 영역이라면, ‘본인의 것과 캐릭터의 것’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장소의 구획은 어떤가. 나는 구스타브의 영화 속 화면을 <센티멘탈 밸류>의 프레임에 맞춰 촬영하다 서서히 극장 스크린을 드러내는 부분, 그리고 엔딩을 떠올리고 있다. 이 순서로 관람하며 ‘허구에 실제가 있다’보다 오히려, ‘실제 같아도 결국 허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순조로운 화해와 ‘치유’는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하고, 연극 무대보다야 영화 세트가 ‘진짜’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가짜’일 수도 있다는 감각이.
구스타브는 원래 계획과 달리 역사를 머금은 집이 아닌 새로 건축된 세트에서 영화를 찍는다. 그곳엔 소음과 고요, 오래된 균열이 부재한다. 딸들이 그 유산에서 놓여났으면 하는 구스타브의 바람이 담긴 제스처일까. ‘인물이 되어보며 내 감정도 더 안전하게 느낀다’는 노라의 고백을 여기 겹쳐 읽어, 집을 닮은 장소에서 ‘그것’을 들여다보는 행위라고 이해해야 하나. 물리적인 ‘where’은 사실 중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구스타브는 자신이 만든 세계 안에서, 통제할 수 있고 대개는 제 의도대로 배치할 수 있는 프레임 안에서 성찰한다.
여기서 다시 노라를 떠올린다. 엔딩 시퀀스가 시작될 무렵 화면에는 ‘노라가 연기하는 인물’ 혹은 ‘인물을 연기하는 노라’가 있지만, 영화는 여전히 그와 ‘레나테 레인스베가 연기하는 노라’를 구분하지 않고 관찰한다. 줄곧 극중극의 카메라와 동일한 시선으로 노라를 좇던 <센티멘탈 밸류>의 카메라는 끝에서 문 밖에 머무는 대신 (극중극의)카메라가 닿지 않는 문 안쪽의 노라를 살핀다.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은 그의 얼굴에 어린 것이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자신의 옛 영화에서 어린 아그네스를 목격했을 때 구스타브의 얼굴에 비친 낯선 경이 또한 떠올린다. 구스타브가 볼 수 없는, 그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그를 벗어나는 순간들. 허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명확히 짚어낼 수 없는 일들, ‘그럼에도’ 통제되지 않는 찰나들, 어쩌면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런 지점들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