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편집위원 곤지
누구에게나 발음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 있다. 그러한 문장들은 대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 외면하고픈 이 세계의 진실이다. 내게는 이 문장이 그렇다.
“나는 널 이해할 수 없어.”
당신에게는 어떠한가? 이것이 일상적인 문장인가? 적어도 나에게 이 말은 관계의 종말 선언과도 같다. 이 문장은 사랑하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시간들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토로하고, 끝내 이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이 끝없는 노력을 계속할 수 없다고. 당신을 이해하는 것을, 아니 계속 사랑하는 것을 실패했다고. 결국 이 말은 내 사랑의 실패를 고백하고, 탓할 수 없는 당신에게 희미한 원망을 보내다가, 종내에는 어긋나고 좌절된 관계의 끝을 고하는 종말 선언이다. 그래서 이 문장은 좀 슬프다.
하지만 뼈아픈 진실은 따로 있다. 사실 이 문장은 모든 관계가 가진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나는 널, 너는 날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무슨 사탄같은 소리냐고? 아니 그보다도 그동안 내게 “너를 이해한다”는 말을 들은 지인들이 쫓아와 해명을 요구할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하는 이해라는 거, 그거 아주 일시적이고 기적적인 일이다. 그러니 당신이 내게 “이해한다”는 말을 들었다면 속았다고 억울해 하기보다 그 기적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는 데 기뻐해도 된다.
우리는 다르게 보고 듣고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각자 다른 인지적 세계를 살고 있다.
(…) 그 세계들은 결코 완전히 포개어질 수 없고 공유될 수도 없다. 1)
다시 돌아와서, 믿고 싶지 않지만 우리는 다른 인지적 세계에 살고 있다. 오늘 우리가 같은 시공간에서 숨결을 공유했어도, 심지어 손을 잡거나 포옹을 했을지라도, 우리는 각자 느꼈고, 각자 생각했다. 언어라는 미약하고 선택적인 공유 수단에 비해 우리가 가진 감각과 사고는 방대하다. 모든 것이 공유될 수 없고, 무언가는 반드시 각자의 영역에 남는다. 그렇게 남은 영역들은 개인의 우주를 구성한다. 바로 그 점이 우리들 각자를 유일무이하고 무한한 소우주로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분리된 각자의 세계에서 운명적으로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소설 「방금 떠나온 세계」에 수록된 7편의 단편은 아름답고 다정하게, 하지만 냉정하게 단언한다. 각자가 감각하는 세계의 간극은 행성 간의 닿을 수 없는 거리와도 같다고. 설령 그것이 사랑하는 당신과의 거리일지라도 변함은 없다. 우리는 아득한 거리를 살아내고 있다. 한편, 소설이 가진 꽤나 매정한 전제에 비해 그 안을 분주히 오가는 인물들과 관계는 너무나 애틋하다. 우리가 가진 우주적인 거리를 셈하다가, 그 까마득한 거리에 절망하지만, 마침내 그 절망조차 감수한 채로 사랑을 이어나가는 7편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우주적인 거리를 품어내면서 사랑을 이어가는 마음은 또 얼마나 우주적인 크기일까.
우리가 포옹할 때 나는 세 번째 손을 이용해서 네 뺨을 쓰다듬어.
그런데 그게 사실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내가 어떤 틈새에 낀 존재 같다고 느껴. 2)
단편 <로라>의 주인공 진은 연인 로라와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살아간다. 로라는 인간에게 자신의 몸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하게 하는 고유수용 감각이 어긋나있다. 실제 자신이 가진 신체와 자신이 인지하는 신체간의 차이는 오랜 시간 로라를 괴롭혔다. 로라는 실재하지 않는 세 번째 팔을 생생히 감각한다. 인지와 현실 사이에서 고통받던 로라는 수술을 통해 세 번째 팔을 갖고자 결심한다. 수술은 위험하고, 결과는 불완전하고, 부작용은 지속적이었다. 진은 도무지 로라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세 번째 팔을 가진 로라를 보는 것이 낯설고 고통스러워 끝내 그녀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로라를 떠난 진은 ‘스스로 결함을 갖기로 결정한’ 로라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조사하고 연구하다가 결국 책까지 펴내게 된다. 하지만 끝끝내 로라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로라처럼 고유수용 감각에 문제를 가진 수십 명의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중 누구도 로라와 정확히 같지 않았’다. 진에게 로라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눈이 마주쳤을 때, 로라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씩 웃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여전히 로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동시에 제가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로라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요. 하지만 그걸 깨닫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신에게도 있지 않나요. 3)
진은 로라를 이해할 수 없지만 여전히 로라를 사랑한다. 절절하게 그리워한다. 그녀의 세계를 못 견뎌서 떠났다가도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 진은 다가오는 로라와 로라 주위로 부서지는 햇살의 한 줌까지 눈에 담아낸다. “진이 끝내 이해할 수 없을 로라가 그곳에 서있었다”는 문장으로 막을 내리는 이 소설은 참으로 담담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러나 결코 이해하거나 다가갈 수 없는, 영원하고 온전하게 겹쳐질 수 없는 세계가 내게로 걸어오는 풍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그의 세계에 가닿기 위한 고군분투다. 소설 속 진이 로라를 연구하다가 책까지 펴내게 된 것은 과장이 아니다. 아주 생생한 비유다. 사랑하는 이를 면밀히 관찰하고 그의 세계를 탐구하는 우리의 노력을 보면, 가히 그에 대한 책을 쓰는 수준이라고 할 만큼 열심이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 간단한 정보부터, 그가 웃을 때 눈가에는 어떤 포물선이 남겨지는지, 한 문장을 내뱉기 위해 입술을 오물거리며 고민하는 평균 시간은 얼마인지, 그렇게 입 밖으로 나온 그의 문장이 둥근 모양인지 구름 모양인지 따뜻한지 차가운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랑은 그런 것들을 가능케 한다. 사랑은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촉수를 상대에게 곤두세우곤 너의 세계를 누구보다 깊고 온전하게 이해해 보겠노라 결심하고 또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노력의 끝에서 그의 세계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먼 거리에 있다는 절망스러운 결과가 도출되기도 한다. 대개는 그렇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충만히 설명하고 싶었던 타인의 세계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미완의 무언가로 남는다는 것은 우리를 좌절케 한다.
그러니 이런 좌절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너와 나 사이의 우주를 건너’ 너에게 가닿겠다는 어느 사랑 노래가 조금 다르게 들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다. 이 달콤한 사랑 노래에는 어쩐지 슬픈 지점이 있다. 너와의 조그마한 물리적 거리도 우주적인 거리로 가늠되고야 마는 강력한 마음의 인력만을 노래하지 않는다. <우주를 건너>의 화자는 ‘저 멀리 널 보고 있으면 너와 나는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해’라며 우리의 분리된 감각을 말하기도 하고, ‘혼자서 널 기다릴 때면 나 혼자 다른 행성에 있는 듯해’라며 그 동떨어짐의 감각을 노래하기도 한다. ‘여기서 네가 있는 곳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라며 상대와의 거리를 아득하게 가늠해 보는 목소리에선 쓸쓸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 쓸쓸함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우리의 사랑을 위해 ‘우주까지’ 건너겠다는 결연한 용기가 아니라, 우리 사랑을 이루려면 ‘우주씩이나’ 건너야 한다는 깜깜하고 거대한 거리감이 감각된다.
빛이 사라진 지구가 혼자 돌고 있는
밤을 생각한다.
지구는 그때부터 처음의 방식으로
고독해지겠지.
굿바이,
하고 인간들에게 인사를 하고
정말로 우주적인 회전을 하게 될 것이다.
(…)
빛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묻지 않고
빛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연구하는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다.
그도 빛과 함께 사라져서,
우주적인 안녕을 해야만 했고 4)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우리들 각자는 서로 다른 인식 체계와 감각들을 갖고, 자기만의 속도로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고 있는 행성이라고. 쉽게 궤도를 이탈하지도, 폭발하지도 않는 성실한 행성이라고. 행성과 행성은 쉽게 충돌하는 법이 없을 것이다. 충돌하기에는 모두가 서로에게 너무 멀다. 광활한 우주와 단호한 물리 법칙 속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외톨이 행성이다. 이렇게 상상하고 나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과정이 핑크빛 꽃길이 아니라 힘겨운 고군분투로 점철되고야 마는 이유가 설명된다. 까마득한 그의 행성에 가닿지 못한 채 사랑이 종말을 맞아도, 그것은 이 우주에서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는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기적적인 순간들이 깃들기도 한다.
그의 행성이 나의 행성을 스쳐 가는 장난스러운 순간, 나의 공전이 궤도를 벗어나는 해방적인 순간, 타인의 행성이 나의 위성이 되는 우주적인 순간, 서로의 궤도가 교차되고 뒤엉키는 초월적인 순간, 그리고 ‘안녕, 하고 여기서 손을 흔들 때 저쪽에서 안녕, 인사가 되돌아오는 몇 안되는 순간들. 그럼으로써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되돌아보게 하고 때로는 살아가게 하는 교차점들’. 우리는 그 예외적인 순간들에 기대 서로를 이해한다.
그러나 예외의 순간들은 늘 찰나에 머무르고, 그 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처음의 방식으로 고독해’진다. 누군가 떠나간 캄캄한 우주 속에서 나를 위로하는 것은 우리가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를 조우할 때도 안녕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멀어지는 생명체들에게 안녕으로 다음을 기약하고, 나의 지구로 다가오는 새로운 누군가에게 안녕을 말하며 환대한다. 우리들 존재가 가진 태생적인 거리, 이해의 한계, 개별적인 세계를 인정하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와의 안녕을 반복한다. 그 찰나의 안녕들이 이해를 만들어내고, 서로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기도 하며, 우리의 궤도를 어지럽히기도 한다. 그 기적적이고 어지러운 순간들에 우리는 비로소 변화하고, 성장하며, 살아있음을 감각한다.
그러니 잠깐 마주한 그의 우주에 안녕을 고해야 할지라도, 관계의 종말을 말하진 않겠다. 섣부르게 ‘널 이해할 수 없다’고 발음하지 않겠다. 그 찰나의 교차점들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면 희미한 선이 되고, 어느새 면이 되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면 서로의 소우주를 연결하는 의미있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고 믿겠다. 오늘의 안녕은 영원한 안녕이 아니다. 또 다른 안녕을 위한 잠깐의 안녕이다. 오늘 작별한 당신과의 세계는 내일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우주적인 ‘안녕’을 말하면서.
편집위원 곤지(yonzgonz@gmail.com)
1)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
2)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
3) 김초엽, 「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
4) 하재연, 「우주적인 안녕」 中 <빛에 관한 연구>, 문학과 지성사, 2019
*백예린 앨범 「FRANK」의 수록곡 <우주를 건너>에서 발췌 인용했다.
**하재연의 시집 「우주적인 안녕」에서 발췌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