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편집위원 서로
종말이란 단어를 머릿속에서 곱씹을 때면 항상 그 생각의 언저리를 스치는 말이 있다. 스피노자의 명언이라 불리우는 말[1]. ‘내일 세상이 종말을 맞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경구를 꽤나 좋아한다. 그 의미가 좋아서라기보다 ‘사과나무’의 어감이 상큼하기 때문이다. 사과나무, 사과나무. 그 말을 거듭거듭 발음해보면 입에 싱그러운 사과 향이 감돈다. 사과나무의 진녹색 이파리, 알알이 맺힌 희고 작은 꽃송이, 붉어지는 사과의 볼이 떠오른다. ‘종말’의 어둑하고 심오한 이미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 명언의 첫 발화자가 왜 많고 많은 나무 중 사과나무를 고른 것인지 나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경구는 분명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결국 결론은 그 상큼하고 붉은 사과나무로 향한다. 종말 앞에서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낭만적이고, 아름답다. ‘예견된 난관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라는 메시지는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굴하지 않도록 결연한 의지를 다지게 한다. 명언을 문장 그대로 들여다보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기 전 종말이 ‘내일’ 일어날 것이라 예견할 수 있는 것은 희망적이다. 종말이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에 있다면, 종말을 막기 위한 일이든 종말을 맞는 나의 마음을 다지기 위한 일이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종말 그 자체보다 종말을 앞에 두고서도 그것을 어떻게 맞이할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이 말은 종말과 그다지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되려 선명하게 희망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의외의 사실 하나. 이 인용구의 출처는 그리 선명하지 않다. 국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명언이 스피노자의 것이라고 여기지만, 이는 (굳이 추정하자면) 마르틴 루터가 약 80년 전 가장 먼저 언급한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이어지던 1944년, 독일의 개신교회 목사 카를 로츠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마르틴 루터의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일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우리는 사과나무를 심겠습니다” 그의 의도대로 사과나무 명언은 당시 신도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며 전쟁을 이겨낼 의지를 다지게 했고, 전쟁 이후에 마르틴 루터의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혹자는 마르틴 루터가 자신의 일기장에 이 말을 적어두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일기장은 현재 찾아볼 수 없으며 그의 것으로 공인되는 문헌들에서도 사과나무 명언과 관련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니 실제로 그 말이 루터의 말인지는 달리 확인할 길이 없다. 희망도 그 출처가 얄팍하다는 점에서 이 명언과 닮아있다. 사과나무 명언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얼마나 가볍고 의심스러운 것인지도 함께 나타낸다.
그리고 나는 이 주인 없는 말에 반문을 던진다. 그가 어떤 종말 앞에서 사과나무를 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는 반문 말이다. 종말이란 내가 나를 압도하는 무언가 앞에서 절절하게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시뻘겋게 타들어 가는 화염, 콘크리트가 두툼히 쌓인 땅이 굉음을 내며 반으로 갈라지는 순간, 나의 코끝까지 차오르는 물바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욱한 유독성 미세먼지가 덮쳐오는 장면…. 이것을 내 눈앞에서 목도하는 순간, 살결에 퍼져가는 소름,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머리를 굴리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대답. 완전한 무력감. 나는 이러한 것들을 종말이라 발음한다.
일상에서도 종말은 어김없이 반복된다.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의 마음에 내 자리는 단 한 뼘도 채 없다는 사실, 어떤 거대한 외력으로 비리가 묵인되는 순간, 사회의 부주의로 일터에서 숨이 끊어진 가족, 나의 몸을 탐하는 소름 끼치는 손길에도 저항 한 번 못하는 나의 위치. 이런 무력한 순간 앞에서 우리는 사과나무를 심을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설령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떠올릴 마음의 여유조차 내어주지 않는 절망과 무력감이 덮쳐온다.
이렇게 종말을 눈앞까지 가져온 뒤 다시 현실을 보면, 어김없이 또 종말이다. 최근 모 OTT 플랫폼에서 여러 가지 ‘종말’을 테마로 독점 제작된 시리즈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개중에는 좀비 바이러스가 전역에 퍼진 설정, 혹은 누구든 이유를 불문하고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으면 알 수 없는 괴물에게 무참히 죽는다는 설정을 가진 작품들도 있다. 그렇게 종말을 다루는 일련의 작품들 속에도, 사랑을 하고 사람을 지키는 인물들이 있다. 사람들은 종말을 자극적으로 그려가면서도 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사랑, 기적 같은 일들을 갈구한다. 그렇게 과자를 먹으면서, 혹은 누워서 느긋하게 보는 종말의 풍경은 잔혹하지만 동시에 낭만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 보고 난 뒤 화면을 꺼버리면 종말도 끝난다. 누군가는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라’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런 손쉽고 낭만적인 종말을 보면 희망만큼이나 종말도 참 얄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좀비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사람은 사람을 무참하게 죽이고, 며칠 후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지 않더라도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죽는다. 없는 이유를 파헤쳐볼까. 사람은 누군가에게 이별을 고했다는 이유로, 혹은 지나가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위층에 살면서 시끄럽게 군다는 이유로, 혹은 피부색이 까맣거나 눈이 찢어졌다는 이유로 죽이고, 죽는다. 종말은 화면보다 더 가깝고, 더 생생하며, 더 잔혹하다.
그런 종말들을 떠올린다. 할 수 있는 일임에도 하지 않아서 맞게 된 종말들을 떠올린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내뱉은 ‘계약직이니까 이 정도 시설만 제공하면 되지.’[2], ‘가족이니까, 연인이니까 폭력은 아닐거야.’[3] 같은 말들이 머리에 맴돈다. 효율과 관습이라는 명목으로 묵인된 가능성이 곧 종말을 부른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뭘 그렇게까지 하냐, 너무 예민하지 않냐’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진정으로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묻는 말은 아니겠지만, 답은 간단하다. 당연히 할 수 있다면 그렇게까지 해봐야 한다. 무언가를 ‘적당히’ 하는 것은 다가올 종말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예단한 채 지금 주어진 가능성을 낭비하는 일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소중히 마음에 품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종말은 사과나무를, 다시 말해 가능성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집위원 서로(lilywithwd2016@gmail.com)
[1] 미리 이야기하자면 이 명언은 스피노자의 것이 아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2] 2019년 8월,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가 교내 휴게실에서 사망했다. 창문이 없는 방에 에어컨이 구비되어 있지 않아 청소노동자들은 직접 환풍기와 선풍기를 마련해야 했다. 2021년 6월에도 서울대학교 청소노동자가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그에게 과중된 업무를 외면하며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책 참조. 「난치의 상상력」, 안희제, 동녘.
[3] 지난 2021년 4월, 한 50대 여성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남편에 의해 살해당했다. 뒤이어 7월,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남성이 애인이었던 20대 여성을 살해했다. 안일한 법과 ‘사랑해서 그랬다, 실수였다’는 말 앞에서 돌아가는 경찰의 미진한 대처로 관계에서 나타나는 폭력은 합리화된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 참조. 「500건의 여성살해, 아무도 그 죽음을 막지 않았다」, 한겨레, 2021.12.20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239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