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편집위원 곤지
재난 문자가 빗발치던 팬데믹의 한복판에서도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정부는 재난 상황을 선포하고 언론은 연일 이 위기를 생중계했지만, 나의 위기 감지 시스템은 놀랍도록 잠잠했다. 잠깐이면 지나갈 바이러스를 ‘재난’이라 명명하는 것은 호들갑이라고, 만약 지금이 진짜 재난 상황이라면 내가 이토록 태평하게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소설 속 재난 서사를 지나친 상상으로 치부하는 일은 더욱 수월했다. 누가 뭐래도 내일은 올 테고, 우리는 여전히 풍요로울 것이며,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부족함 없이 밥을 먹으리라는 관성적 사고가 가능했다.
하지만 소설 속 재앙과 현실이 포개지지 않았던 것은 내가 누린 잠깐의 행운이었을까. 언제부턴가 재난과 절멸, 디스토피아에 대한 상상이 터무니없게 느껴지지 않는다. 당장에 땅이 꺼지고, 행성이 날아들고, 내 거주지가 물에 잠겨야만 재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기어코 그 최후의 순간을 목격하지 않아도 이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 스스로의 끝을 재촉하고 있다는 묘한 감각은 재난의 근거가 된다. 그 명징한 징후에 더 이상 아둔함으로 일관할 수 없는 바로 그때가 재난의 한복판이다. 이것은 정부와 언론의 ‘선포’나 ‘규정’으로 부여될 수 없는 위기의식이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내 것의 감각이었고 세계와의 내밀한 소통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재앙을 감각해버린 뒤, 소설 속 재난 서사는 결코 이야기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절멸의 이야기가 소설 밖의 현실로 이동하는 경험은 나에게 묻는다. 우리가 발 디딘 세계는 어디이고, 어떤 재난을 겪고 있을까. 우리는 왜 이토록 절멸을 가깝게 감각하는가. 우리는 종말이나 절멸로 매듭지어지지 않는 이 세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소설 「지구 끝의 온실」과 영화 「돈 룩 업」은 재난이 만들어낸 뚜렷한 절망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흐릿한 희망을 품은 채 이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 먼저 「지구 끝의 온실」을 보자. 소설은 2060년 절멸한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에서 바이오 연구소에 의해 누출된 더스트1)는 자가증식을 반복하며 지구의 대기를 장악한다. 사람들은 더스트를 피해 거대한 돔을 설치하지만, 이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와 들어가지 못하는 자 사이에 생명 권력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죽음을 딛고 들어선 돔 안에서도 극심한 경쟁과 차별이 이들의 인간성을 몰살시켰다. 한편,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생명체들까지 위협하는 더스트의 파괴력은 돔 밖의 세계를 폐허로 만들고 지구의 대기를 점령한다. 이야기는 피의 경쟁으로 얼룩진 인공세계 돔과, 생명이 사라지고 폐허가 된 돔 밖의 자연 세계가 절망적으로 교차되는 지구에서 시작된다.
소설을 보며 내가 발 디딘 진짜 지구를 떠올렸다. 2060년의 지구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가 사는 지구 곳곳에는 ‘국가’라는 돔이 존재한다. 돔(국가)은 팬데믹의 대응과 회복과정에서 거의 유일한 행위자였다. 팬데믹이 내포한 ‘전 지구적 위기상황’이라는 배경은 말소되고 오직 국가 차원에서 모든 해결과 대응이 이뤄졌다. 국경의 문을 닫아 외부인을 차단하고, 기준에 부합하는 내부인들에게만 보호(재난지원금, 백신 등)를 제공하며 ‘우리들만의’ 방공호를 건설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는 뚜렷해지고, 너와 우리를 가르는 국경에는 혐오와 차별이 넘실댔다. 한편 돔의 내부인, 즉 국민들도 모두가 동등한 국민일 수 없다. 국가가 보호하는 국민에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예컨대 컨트롤타워가 반복했던 ‘자가’격리라는 해결책은 애초에 ‘자가(自家)’ 자체가 없는 홈리스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고,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지정되어 일반병동을 폐쇄한 공립병원들은 기존에 민간병원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저소득층이 주 이용대상이었다. 하루아침에 병원을 잃어버린 저소득층과 노인, 장애인은 치료비가 비싼 민간병원으로 내몰리거나 이를 감당할 수 없으면 기약 없이 치료를 미뤘다. 바이러스에 가장 먼저 노출된 사람들 역시 사회에서 격리된 다중돌봄 시설의 수용자들(장애인과 질환자, 노인)이었다. 이렇게 홈리스, 장애인, 저소득층, 노인을 여과하여 남은 사람들만이 국가가 보호하는 국민이 되었다. 거대 자본을 투입하고 우리의 세련된 통제방식을 자랑하는 동시에, 그 내부에선 끊임없이 안과 밖을 나누고 생명 권력이 너와 나를 구분 짓는 대한민국이라는 돔. 그러나 우리의 돔이 무수한 부조리 위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을지라도 GDP 11위 경제 대국의 거대함은 자칫 이런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우리의 돔은 영원히 안락하리라는 안일한 착각, 어떤 위기도 돈과 기술로 해결해낼 수 있다는 오만.
프림 빌리지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었다.
이곳은 그들을 받아들여 준 유일한 세계였다.
(…)
아이들은 너무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은 세계가 망할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지구상의 모든 곳이 파멸로 치달아도 이 마을만큼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자신들이 어른이 되는 날까지 프림 빌리지는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3)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이야기는 돔 속에서 존엄할 수 없었던 약자들이 돔을 탈출하며 시작된다. 돔을 나간 사람들은 대부분 죽거나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프림빌리지'라는 대안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마을 사람들은 연구원 레이첼에게 체내의 더스트를 분해할 수 있는 분해제를 받아 돔의 보호 없이도 생활할 수 있었고, 특히 대기에 노출된 모든 생명체를 파괴하는 더스트 환경 속에서도 레이첼의 품종개량 식물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식량 생산이 가능해진 프림빌리지는 마치 유토피아 같았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약탈하지 않으며, 인공 구조물 없이도 생명이 생존할 수 있는 유토피아. 모든 생명이 잿빛으로 굳어버린 바깥 세계에서도 생명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이곳을 마을 사람들은 ‘축복받은 숲’이라고 불렀다. 레이첼의 조작과 발명을 통해 만들어진 이 작은 온실은 폭력적인 돔과 척박한 지구생태계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 공동체인 듯 보였다.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준 것, 그리고 우리가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바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 4)
그러나 프림빌리지의 리더 지수만큼은 이들의 온실이 영원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 돔 밖의 세계를 꿈꾸며 건설됐던 수많은 대안 공동체들이 결국 실패로 끝난 것과 같이 프림빌리지 역시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간다고 생각한다. 지수는 ‘우리들만의 유토피아’, ‘우리들만의 온실’, ‘우리들만의 숲’도 결국 세계가 망해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세계와 무관하게 우리만의 평화와 풍요가 지속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프림빌리지 사람들은 늘 외부인을 경계했고, 우리들만의 생활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의 온실은 인공 구조물의 보호 없이 세상과 마주하여 생명을 키워냈다는 점에서 돔과는 달랐지만, 이 역시 너와 나, 우리와 그들, 세계와 마을 사이에 견고한 경계를 지으며 유지되어 왔다는 데서 본질적으로 돔과 다르지 않았다. 지수는 대기 속의 더스트 농도를 감소 시켜 더스트 폭풍으로부터 마을을 지켜낸 모스바나(식물종)를 프림빌리지 바깥으로 퍼뜨려야 한다고 말한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 5)
지수의 주장은 오래가지 않아 현실이 된다. 어느 날 마을은 침입자들의 공격을 받게 되고, 지수는 공격을 피해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모스바나의 씨앗이 담긴 자루를 건네며 말한다. 퍼뜨리라고. 그것이 이 세계 전체를 온실로, 온 세상을 프림빌리지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프림빌리지의 사람들이 모스바나의 씨앗을 가지고 세계의 어딘가로 떠나는 모습에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자들의 고통이 묻어나오는 동시에 인류와 세계에 대한 희망이 담겨있다. 프림빌리지라는 온실의 소멸은 재건의 희망이 탄생하는 순간과 동일한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점차 다른 대륙으로, 다양한 땅으로 흩어질수록 모스바나 역시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뻗었다. 모스바나는 각지의 생태계에서 공격적으로 번식하고 증식하면서 마침내 지구 전역으로 넓혀졌다.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는 지구의 더스트 농도를 조금씩 줄이고 있었다. 모스바나가 바꿔놓은 더스트 환경은 새로운 식물 생태계를 등장시켰고, 식물들이 움트자 인간도, 동물도 돔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풍경이 되어갔다. 세계는 돔이나 온실 안에서가 아니라, 온실 밖에서 재건되고 있었다.
뭐가 옳은 건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세계를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프림 빌리지 바깥의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는,
인류 전체의 재건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만큼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내팽개쳤다.
그 사실만은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버려진 우리가 세계를 재건해야 할까. 6)
지구에 모스바나의 씨앗을 퍼뜨린 프림빌리지 사람들은 세계를 재건했지만, 그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들은 돔이라는 문명에서 내팽개쳐지고, 프림빌리지라는 대안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그 작은 대안도 허락되지 않았던,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더스트 면역체가 있다는 이유로 인체 실험에 신체를 강탈당했고, 돔을 탈출하자 거리의 떠돌이들에게 위협당했다. 자신의 세계를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 세계로부터 늘 착취당하고 소진 당한 그들은 끝내 자신들만의 대안 공동체를 갖는 것조차 좌절되었다.
프림빌리지의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소설 밖의 그들을 떠올려본다. 예측불가능한 바이러스가 문명을 해체하고, 기후위기가 점차 숨을 조여오는 ‘현실 속 지구’에서 이 세계를 구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기를 경고하고, 온실을 거부하고, 광장으로 나와 외치는 사람들을. 그들은 대개 위기를 가장 먼저 감각할 수밖에 없는 가장 취약한 존재들이며 동시에 어른들로부터 소진된 세계를 물려받은 아이들이다. 이 위기를 자초한 어른들이 여전히 오늘만을 풍요롭게 사는데 골몰할 때 기꺼이 이 세계의 미래를 꿈꾸고 희망이 되길 자처하는 아이들. 그들이 부여받은 취약함과 고통, 하지만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 알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것들을.
이들은 돔이나 온실 따위가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또 다른 돔이나 온실을 만드는 것은 대안이 아니다. 세계의 절멸 속에서 두꺼운 돔이나 안락한 온실을 만드는 것은 아주 잠깐의 생존만을 보장할 뿐이다. 세계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유예할 뿐이다. 다시 말해, 국가의 발전과 과학 기술의 진보 따위가 더 이상 이 세계의 절멸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스럽겠지만 황폐해지는 지구의 위기를 마주하고 세계를 재건해가는 것이 결국 이 세계에 ‘미래’를 들여놓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돔이나 온실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해보자. 우리의 코앞에는 코로나보다 장기적이고 그 어떤 재난보다 파괴적으로 우리의 삶을 뒤흔들 기후위기라는 재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기후위기를 ‘위기’로 감각하지 않는다.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돔이 두껍고 강할수록, 그 안에서도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한 권력의 상층부에 위치할수록 더욱 그렇다. 심지어 이제 그들은 환경 윤리적 행동을 요구받는 것에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감정적 피로감을 드러낸다. 그들에게 지구의 온도가 뜨거워지고 해수면이 상승하는 일은 그저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피곤한 일로 치부하기에 재난은 너무나 가까이 당도해 있다. 최근 공개된 영화 「돈 룩 업」은 이 가까운 대재앙을 둘러싼 정치, 경제, 언론, 대중들의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문제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것이 재치 있는 블랙코미디인지, 소름 끼치게 현실적인 다큐멘터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감독은 「2050 거주불능지구」을 읽고 지구의 파국이 확실한데도7) 세계가 유유자적한다는 점을 꼬집고자 이 영화를 기획했다. 기후위기에 어떤 위기의식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가 마치 “혜성이 지구와 충돌하기 직전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똑같다.”라는 비유를 곁들이며.
영화는 천문학과 대학원생 디비아스키와 천문학자 민디 교수가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거대 혜성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충돌로 이어진다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절멸할 수 있는 거대 재난상황에서 이들은 긴급하게 이를 발표하지만 어쩐지 모두 태평하기만 하다. 정부는 중간 선거에 부정적 영향을 주어선 안된다며 충돌 가능성 99.78%의 이 위기를 ‘잠재적’ 재난 상황으로 규정하고 기밀에 부친다. 언론 역시 이 사태의 심각성을 보도하는 데엔 관심도 없다. 오히려 “지구 전체가 파괴된다는 소식은 재밌으면 안 되는 거예요. 무섭고 불편해야 할 소식이라고요. 매일 밤을 지새우면서 울어야 해요!”라며 일갈하는 디비아스키를 “유난 떠는 조울증 환자”라고 괴롭히는 데 열을 올린다. 실제로 지금 세계는 기후위기를 직면하라며 울부짖는 그들에게 이와 비슷한 야유를 보낸다. 미디어와 정치인들은 기후위기에 슬퍼하고 생태계의 파괴를 온몸으로 아파하는 소녀를 조롱하거나 외면하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그레타는 분노 조절 문제를 신경 써야 한다. 친구와 좋은 옛날 영화를 보러 가라. 진정해라 그레타, 진정해!”와 같은 유치한 트윗으로.
한편, 사생활 스캔들로 중간 선거의 패배를 예감한 정부는 이제 위기를 전면에 내세워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한다. 문제를 해결할 국가의 영웅을 출연시키고, 국민의 담합을 강조하고, 자국의 위대함과 우월함을 고취시켜 표면적으로는 혜성의 궤도를 변경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궁극적으로는 국가주의를 강화하여 정부의 재집권을 꾀한다. 그 의도야 어찌 되었든, 행성 궤도 변경 작전은 재난의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작전 수행 직전, 대기업의 CEO이자 정권의 최대 후원자인 피터는 지구로 돌진하는 그 혜성이 “돈이 된다”며 작전 중지를 요구한다. 혜성이 가진 수백조 가치의 희귀광물을 채취하기 위해서는 혜성을 분할 시켜 지구로 떨어트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피터는 말한다. 이것은 위기가 아닌 ‘기회’이며, 하늘에서 떨어진 이 보물들은 가난, 불공정, 생물 다양성 상실을 ‘해결’하고, 인류에게 황금기의 영광을 줄 것이라고. 무언가 떠오르지 않나? 지금 우리의 재난을 둘러싼 언설들을 살펴보자. UN이 천명하고, 세계인이 동참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의 지구적 언설 아래서 인류는 무한히 발전 가능한 종족으로 변모한다. 좀 더 친환경적인 생산수단을 발명하고 덜 파괴적인 과학기술을 이용하면 너희 미래세대까지 지속해서 발전해갈 수 있다는 지속가능발전담론은 낙관의 표피를 걸치고 전세계를 배회한다. 그러나 과연 이 세계의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한 것인지, 애초에 더 이상의 ‘발전’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발전의 패러다임을 포기하지 않고 환경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언제까지고 이 세계의 톱니바퀴가 ‘지속’될 수 있다는 오만함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그 무엇도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경제·산업구조와 소비 매커니즘의 근본적인 변화 앞에서는 한 발짝 물러선 채로, 개인이 물을 아껴 쓰고 제로웨이스트가게를 애용하면, 선진국들은 지금의 풍요를 유지할 수 있고 개도국들은 선진국만큼의 삶의 질을 갖출 수 있다고 호도한다. 무엇 하나 ‘진짜’ 해결할 수 없는 이 담론 속에서 우리는 그저 지속가능한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세련되고 고상한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절박한 '생존가능성'이다.
우리가 이 세계의 풍요를 지속가능한 것으로 포장하는데 골몰할 때, 위기는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지구의 허파라 불리던 거대한 숲들이 화염에 휩싸이고, 기후위기로 인한 강제 실향이 매년 2,150만 회8)에 달하고 있으며, 느린 속도이지만 분명하게 우리의 주거지 주위로 물이 차오름을 느낀다. 우리의 돔이 코로나는 막아냈는지 몰라도(사실 그렇지도 않았지만) 기후위기 앞에서도 그 견고함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명징해지고 있다. 외부와 내부의 벽을 공고히 하여 타인을 배제하고, 돔을 더 높게 쌓아 세계의 절멸을 외면하려는 임시방편은 불가역적이고 광폭한 기후위기 앞에서 얼마나 처참한 방식으로 파괴될 것인가. 또한 국가의 방역지침을 준수하는 것 외에는 재난의 대처와 복원에 아무런 일조도 한 적이 없는 시민들은, 팔짱을 낀 채로 이 재난을 짐짓 먼 곳에서 바라만 보던 방관자 우리들은 더는 국가가 보호해줄 수 없는 기후위기라는 재난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스러질까. 우리는 위기의 방관자에서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영화 속에서 인류는 결국 혜성과의 충돌을 막아내지 못한다. 정부와 경제계가 결탁하여 혜성을 돈덩어리이자, 인류의 기회로 꾸며내는 동안 혜성은 지구를 향해 부지런히 돌진하고 있었다. 혜성을 분해하여 지구로 낙하시키는 데 실패한 정치인들과 부자들은 지구 멸망을 피해 미리 준비한 우주선을 타고 도주해 버리고, 남은 인류는 꼼짝없이 다가오는 멸망을 기다린다. 주인공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마지막 식사를 나눈다. 점차 식탁이 흔들리고, 전등이 깜빡이고, 절멸이 눈앞으로 다가온 순간 주인공은 문득 이렇게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린 참... 부족한 게 없었어, 그렇지? 생각해보면 그래.” 하지만 현실의 우리는 위기를 조금 더 빨리 알게 되었고, 충분히 궤도를 수정할 기회가 있다. 우리가 너무 많은 풍요를 누리고 있음을 마지막 그 순간이 아니라 지금 당장 말할 수 있다. 식탁이 흔들리거나 전등이 깜빡이는 최후가 아니라 내 발을 받쳐주는 단단한 지표 위에서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영화가 보여주는 이 최악의 결말은 영화 속에 남겨두자. 저 어리석고 비참한 마지막이 영화적 상상으로 끝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최선을 다하자. 맹목적인 낙관주의에 미래를 의탁하지 말고, 재난을 정직하게 마주할 용기를 갖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겸손한 희망을 손에 쥔 채로 나아가자.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였지요. 9)
다시 소설로 돌아와 소설 속에서 세계가 재건되었던 방식을 떠올린다. 인간들이 “고작 식물 따위”라고 말하는 다년생 목본 단일종 생명체가 세계를 구원해내는 경이로운 순간들을.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수십억 종이 공생하고 있는 이 지구에서 인간만이 유일한 행위자이자 세계의 구원자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인간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편하고 인간이 일궈낸 문명과 풍요를 찬탄해왔지만 사실 이 세계의 자원과 에너지, 복원력과 지속가능성을 모두 누구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제의 내가 뱉어낸 탄소를 흡수하고, 오늘의 내가 마실 산소를 생산하는 생명체는 누구인가. 우리가 취하고 있는 산소와 자원은 오랜 기간 자연의 지형과 물질의 순환, 에너지의 파동으로 만들어진 우주적인 결과물들이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취하거나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인간들은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물, 공기, 식량조차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이 거대한 생태계와 이름 모를 비인간 생명체들에 삶을 빚지고 있는 존재다. 어쩌면 이 생태계 속에서 가장 나약한 종인 우리들은 어쩌다 자신들을 자연의 지배자이자 환경을 극복해냈다고 믿는 오만한 습성을 갖게 되었을까? 이 세계를 정말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미래세대라는 피상적인 공동체에 정말 미래 같은 것을 쥐여주고 싶다면, 우리는 인류가 이 생태계의 아주 작은 일원임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십억 종의 생명체와 ‘함께’ 재건을 상상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최첨단 돔들은 이제 지구도 모자라 우주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덩달아 지구를 주요 무대로 이루어지던 미·중 패권 경쟁이 우주로 자리를 옮겨 2차전을 시작했다. 미국은 중국을 따돌린 채 선진국들과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는 데 여념이 없으며, 이에 질세라 중국은 화성 탐사를 위한 탐사선을 띄우고 우주경제권을 구축하겠다고 공언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이 모두 “미래세대를 위한 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경쟁적으로 탐사를 떠나고 그곳에 특정 국가의 깃발을 꽂는, 그리고 또 마음대로 우주의 자원을 착취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이 세계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인류가 뿌리내린 이 행성을 쓰레기통으로 만들고 또 다른 쓰레기통을 찾아 떠나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또 다른 행성으로의 이동이 정말 미래세대가 원하는 재건이고, 해결일까?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곳에’ 정말 더 나은 세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니?
이제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해보자. 돔 속에서 다양한 위기를 넘어온 우리가, 그 안락한 보호를 누려온 우리가 감히 돔 밖에서 더 나은 세계를 재건할 수 있을까? 우리를 둘러싼 편협한 경계선과 오만한 인식론을 해체하고 온실 밖을 걸어 나오면 이 세계 전체를 보다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결코 자신할 수도, 당차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지만, 어떤 질문은 오직 한 가지의 답변만이 존재한다. 그럼 나는 이 질문의 당위성을 빌려 당신에게 이렇게 답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이 온실 밖에서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당신과 나는 반드시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고. 소설 속 프림빌리지의 붕괴와 그 붕괴가 가능케 한 지구의 재건은 대안이 좌절될 때 더 나은 대안이 고개를 들고, 비로소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우리는 끝없이 좌절되면서도 또 다른 대안을 만들어보자. 완벽하거나 온전한 대안이 아닐지라도 안주하지 않고 돔 밖으로 나아가다 보면, 세계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재건해낼 수 있지 않을까.
편집위원 곤지(yonzgonz@gmail.com)
참고문헌
권김현영, 김영옥 외 11명,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휴머니스트, 2020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1
김현미,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 반비, 2021
나오미 클라인, 「쇼크 독트린」, 살림Biz, 2008
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열린책들, 2016
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펜타그램, 2012
김현미(2020), 코로나 시대의 ‘젠더 위기’와 생태주의 사회적 재생산의 미래, 젠더와 문화, 13(2), 41-77
각주
1) 소설 「지구 끝의 온실」이 설정하고 있는 가상의 인공물질로, 공기 중을 부유하며 생명체의 호흡기에 침투한다. 보호장치 없이 더스트에 노출될 경우 호흡기에 치명적인 내상을 입는다.
2)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1
3)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1
4)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1
5)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1
6)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1
7) 백승찬 기자, 경향신문, <낄낄 웃다가 우울해지는 지구멸망 이야기···‘돈 룩 업’>
https://www.khan.co.kr/culture/movie/article/202112081357001
8)「기후 변화가 가져온 비극…강제 실향과 난민」, 유엔난민기구, 2021.5.18.
https://blog.naver.com/unhcr_korea/222356136735
9)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자이언트북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