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편집위원 아리
*원제목: 우리를 이대녀라고 부를 때 - 이대남, 이대녀라는 이름 뒤편에 남은 물음
기획·정리: 편집위원 아리(ououpp@naver.com)
참여: 모자, 빙봉, 아리, 퓨
* 좌담은 20대 대선을 한달 앞둔 2월 5일에 진행되었으며, 이후의 상황들은 좌담에 반영되지 않았음을 알립니다.
* 이대남, 이대녀라는 프레임과 이에 근거한 분석에 관한 공통된 이해에서 출발하기 위해, <시사인>의 기획인 ‘20대 남자 현상’과 ‘20대 여자 현상’을 함께 읽고 좌담을 가졌습니다.
‘이대녀(20대 여자)’를 향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대남’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그 대항집단으로 분류된 이대녀도 덩달아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대남과 함께 정치권에서 전례 없는 관심을 받으며 ‘MZ세대’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부여받고 있지만, 왜인지 자꾸만 ‘정치’의 테두리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이 좌담은 ‘이대녀’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야깁니다. 여성의 목소리를 ‘정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백래시를 백래시로 포착하지 못하는 정치권에 화가 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널리 공유된, ‘이번 대선에서 20대 여성이 배제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대녀/이대남’ 프레임의 유해성과 그간 정치판에서 지겹게 반복되어 온 여성 혐오를 짚어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배제됨을 느꼈는지 되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스스로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할 말이 많은 모자, 빙봉, 아리, 퓨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구분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건, 2021년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가 끝난 후였습니다.[1] 젊은 세대 표심에서 이전과는 다른 기류가 감지되었다는 결과를 받아든 정치권은 분주해졌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진보 정당에 우호적이던 기존의 경향과 달리 20대 남성이 민주당 지지층에서 대거 이탈하자 많은 정치인들은 깜짝 놀라 허둥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세간에도 ‘이대남 현상’에 대한 분석이 쏟아졌습니다. 절차적 공정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공정 세대’가 등장했다는 분석부터, 정치적으로 우경화되었다거나 여성혐오 정서가 유독 강하다는 우려까지. 갖가지 해석을 내놓으며 ‘이대남’을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동시에 ‘이대녀’는 주로 ‘이대남’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무서운 기세로 갈등하고 있는 집단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남’과 ‘이대녀’라고 불리는 이들의 정체는 정말 무엇일까요? 이런 호명으로 화가 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20대의 정치적 성향을 완전히 갈라놓은 '젠더 갈등'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까요?
아리
우선 이대남이랑 이대녀라는 프레임과 이대남 현상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볼까? 지금 이대남이라고 불리는 집단의 특성, 그리고 정치권이 이대남에 호소하는 모습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얘기해보고 싶어.
사실 이대남의 가장 대표적이라고 여겨지는 게 ‘페미니즘을 싫어한다’거나 ‘이전 세대보다 우경화되어 있다’는 거잖아. 그런데 나는 오히려 지금 20대들이, 물론 일반화하긴 어렵겠지만 40~50대 남자들보다 눈에 띄게 우경화돼 있고 성차별적인 인식이 강하다고 생각하진 않거든. 2018년에 우리 학교에서 총여학생회가 폐지되었던 이야기도 잠깐 해보고 싶은데, 그 과정을 지켜볼 때도 총여학생회 폐지에 열정적으로 앞장섰던 남성들이 기성세대 남성들보다 성차별적인 인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당시에 대학 안팎에서 페미니즘 조류가 강해지면서 그에 대한 백래시도 강하게 일어났던 거고 지금 '이대남'이라 불리는 이들의 불만도 백래시에 기반한 건데, 지금 정치권에서는 이걸 20대 남성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해버리면서 오히려 백래시를 백래시라고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 그러니까 지금 정치인들의 편협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20대 남자가 통상적으로 진보 정당을 지지해야 할 것 같은데,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 않으니까 그 반대쪽에 있는 이름과 특성을 쉽게 갖다 붙인 거잖아.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으니까 우경화되어있는 거고, 그 이유는 페미니즘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사고에 기반해있다는 거지. 정말 단순하고 도식적인 사고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모자
20대 남성들에게 페미니즘은 ‘페미나치’잖아. 나는 그게 어긋난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사실 페미니즘이 싫다고 말하는 남성들 중에 페미니즘을 조금이라도 공부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 아리가 말한 것처럼 지금 20대 남성들이 40대 남성보다는 훨씬 덜 성차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강한 반감을 표출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20대 여성이 받아들이는 페미니즘과 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페미니즘을 자기 삶이랑 밀접한 학문으로 받아들이거나 당연한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이잖아. 그런데 20대 남성들의 잘못된 이해에 이름을 주고 분석 틀을 제시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 같고, 그거에 선동된 사람들은 또 그런 분석 틀에 맞게 행동하면서 점점 공고해진다는 생각이 들어.
퓨
시사인 기사에서 20대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분석한 게 기억나. 20대 남성 특집에서는 이들을 우경화된 것으로만 볼 게 아니라 이들만의 새로운 인식 틀이 만들어지고 있고, 그게 페미니즘에 대한 반대 물살로 나아가고 있다고 분석했어.[2] 한편 20대 여자 현상 특집에서는 여성들이 20대 남성들의 변화와는 반대로 ‘진보적인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3] 근데 나는 사실 기사를 읽으면서 좀 답답했어. 20대라는 ‘새로운 세대’를 기존의 진보 보수 담론에 어떻게든 끼워 넣으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처음부터 세대에 따른 차이를 보겠다는 목적으로 이런 틀을 만든 건데, 여기에는 당연히 세대나 성별이 다른 사람들 간에 엄청난 차이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전제된 거잖아. 그걸 토대로 통계나 사실들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애초에 만들어진 틀 안에서 한정되어 형성되는 것 같아서 좀 답답했어.
아리
나도 이대남, 이대녀라는 프레임 자체가 모든 현상을 진영논리 안에서 이해하려는 기성세대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했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우경화된 거라고 판단한 것도 그렇고, 솔직히 민주당은 내 입장에서 전혀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당인데 20대 남자들이 페미니즘 때문에 민주당 싫어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민주당원들이 단체로 자성에 빠져가지고 페미니즘 근처에도 가지 않고 손절하려고 하는 것도 되게 웃겼던 것 같아.
사실 '민주당을 페미니즘 때문에 싫어한다'는 것도 일부 20대 남자애들나 혐오세력들이 활용하는 전형적인 공격 방식이라고 생각하거든. 모자가 말했던 ‘페미나치’라는 단어처럼 아주 오래전부터 대안적이고 전복적인 목소리를 집단한테 ‘빨갱이’나 ‘공산당’이라는 낡고 유치한 혐오 프레임을 들이대왔는데, 정치권이 그거에 반응을 보였다는 게 문제를 잘못 읽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 그들이 ‘민주당이 싫은 건 페미니즘 때문이야’라고 공격을 했다면 정치인들은 이 세력들이 페미니즘을 혐오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걸 읽어야 했는데 '우리가 남성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다', '정말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게 정말 문제라고 보거든. 어떻게 그런 반응을 보일 수가 있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빙봉
나는 민주당이 스스로 ‘페미당’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전혀 이해가 안돼서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웃음) 아니, 봐봐. 조금이라도 페미니즘적인 정책을 지속적으로 제시하고 여성 의제에 목소리를 내서 변화가 있었어. 근데 그걸 남자들이 싫어해.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페미니즘 당이라서 남자들이 싫어하나보다’라고 생각한대도 문제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고. 최근에 또 한 번 느낀 게, 이번 TV 토론에서도 윤석열 후보한테 김지은 씨 2차 가해에 대해서 사과하라고 얘기한 게 사실 심상정 후보였잖아. 민주당이 정말 스스로 페미당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 말도 없을 수가 있나?
아리
그럼 우리는 이미 이대남이나 이대녀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걸 활용한 게으른 분석을 내놓은 것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자기 자신을 '이대녀'라는 키워드에 대입해서 생각해 본 경험이 있어? 사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에 해당하는 우리 주위의 어른들도 굉장히 이대남, 이대녀라는 도식이나 그들의 특성에 꽤 많은 호기심을 보이고 있잖아.
퓨
이대남, 이대녀라는 이름이 나한테 처음으로 크게 감각되었던 개인적 일화가 생각나는데, 최근에 나랑 가까운, 나이대가 있는 남성 어른이 다른 주제로 대화를 재밌게 이어가다가 다짜고짜 물어보시는 거야. 최근의 이대남과 이대녀 이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너무 당황했어. (웃음) 그때까지만 해도 이대남, 이대녀라는 프레임이 내 인식 안에서 그렇게 크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거든.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 그 틀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도 거기에 끼워 맞춰질 수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그런 질문을 받으니까 내가 20대 여성 집단을 대변하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되게 묘한 순간이었어. 그 자리에서는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고, 답해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피곤해서 ‘저는 인터넷 커뮤니티 잘 안 보고, 그런 이야기도 별로 신경 안 쓰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갔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좀 찝찝하더라고. 다른 얘기를 더 잘 하고 왔어야 했나 싶어서. 나는 스스로 이대녀의 프레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에 답해야 하는 좀 묘한 순간들이 요즘 있는 것 같아.
아리
나도 이대남이라는 말 자체에 관심이 없었고, 무슨 말인지도 몰랐거든. 이대라고 하면 보통 이화여대를 생각하잖아. 그래서 '이대남이 대체 뭐지?' 이런 생각 정도만 했었고, 그게 뭔지 알고 나서도 별 의미를 두지 않았어. 근데 퓨가 경험한 것처럼, 요즘 어른들이 다짜고짜 ‘요즘 20대 남자애들은 정말 그러냐’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일이 정말 많은 것 같아. 그럴 때 나는 이대남이 명확히 어떤 존재라고 규정하지도 않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도 결국에는 그 문법을 따라가면서 '요즘 남자애들이 이렇다더라'고 얘기를 하게 되더라고. 그래서 난 이대남이라는 개념이 되게 게으른 분석이라는 점에서도 별로지만, 20대 남자들이 다 그렇지 않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그 프레임에 맞춰서 말할 것을 은연중에 강요받는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이 틀을 만들어낸 어른들은 그런 프레임 안에서 말을 해야만 받아들일 것 같은 느낌? 내가 느끼고 경험한 20대 남성의 복잡함이나 페미니즘과 백래시의 복잡함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막막한 느낌을 되게 많이 받아.
빙봉
맞아. 나는 정치권에서 지금 이대남한테 엄청 집중하면서 동시에 되게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느끼는데, 이대남 자체가 실체가 없고 그 목소리에도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시사인에서도 기획 기사까지 쓰면서 집중을 하지만 거기서 얻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 목소리를 들여다보면 남는 건 자기 연민과 불만 뭉텅이밖에 없어으니까. 결국 이대남이나 이대녀나 실체 없는 개념이니까, 우리가 거기에 집중할 필요가 크게 없다고 생각을 해왔어.
모자
사실 이대녀라는 단어가 나온 것도 이대남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유행하고 이게 뭔가 엄청난 의미를 가진 집단처럼 여겨지니까 '그러면 20대 여자는 어떻지?' 하고 반대항으로 이대녀를 내세워서 만든 틀이잖아. 이대남에게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정치권도 갈팡질팡하는 거라는 빙봉의 말에 너무 동의하고, 결국엔 '남자랑 여자는 아주 생각이 다르다.', '요즘 20대 애들은 굉장히 극과 극이다.'라는 단순한 생각에 기초해서 갈라치기를 하니까 자꾸만 페미니즘 때문에 이 세상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분석만 나오는 것 같아.
아리
이대남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는 비판 중에 하나가 이게 과대 대표된 이름이라는 거잖아. 시사인의 분석처럼 20대 남자들이 페미니즘을 자신의 피해자성과 연결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지만, 사실 또 그게 20대 남자 전부가 될 수 없는 거고. 그래서 이대남이라는 이름이 무의미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처럼 내가 이 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도 계속 이대남 이대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얘기를 하니까 스스로 거기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숨게 만든다는 거. 그래서 결국 그 똑같은 논리 안에서 똑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만 활성화되는 것처럼 보여.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이름은 태생부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최근 정치권의 목소리를 보고 있노라면 그러한 명명이 만들어낸 새로운 정치 흐름 역시 그 유해성을 입증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컨대 몇몇 대선 후보가 ‘이대남’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이 거듭되는 사이, ‘이대남 헤아리기’를 표방한 수많은 혐오가 확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떤 주장이 쉽게 힘을 얻는 동안 어떤 이의 목소리는 닿을 수 없이 멀어졌습니다.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구분은 무엇을 증폭하고, 또 무엇을 보지 못하게 만들까요?
퓨
내 생각엔 익명 커뮤니티가 정말 이 모든 것의 주범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제일 문제인 것 같아. 실체 없는 것에 형상을 부여하기 좋은 기회가 됐다고 해야 하나?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대한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이야.
아리
사실 그런 커뮤니티는 사실 진짜 가상의 적이랑 싸우는 사람들이 엄청 많잖아. 요즘 되게 놀라운 건, 정치인들이 이대남이랑 이대녀를 '미지의 세계'로 생각한 이후부터 익명 커뮤니티에서 아무렇게나 떠도는 이야기를 진짜 유의미한 담론으로 읽어내려고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어. 온라인 커뮤니티 안에서 우리가 모르는 어떤 진짜 새로운 움직임이 있을 거니까 이걸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 이 흐름을 놓치면 또 선거에서 질 거다, 이런 느낌으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는 세대가 너무너무 궁금하다고 하면서도 고작 커뮤니티에 집중하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이대남 이대녀를 이해하려고 할 때 커뮤니티가 아니라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생각해봤을 때, 나는 일단 20대 이대남이랑 이대녀가 갈등하고 있다는 프레임도 정말 마음에 안 들거든. 사실 20대가 아주 전례 없는 갈등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성차별은 사회에 정말 오랫동안 뿌리 내려 온 문제고 다른 생각이 충돌했던 건 전 세대도 마찬가지잖아. 또 그 ‘갈등’의 원인으로 제시한 것도 20대들이 요즘에 취업이 안 되고 기회가 없어서 그렇다,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네들끼리 싸우는 거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 보면 정말... (웃음) 실제로 이거 이재명 후보가 어느 인터뷰에서나 이렇게 말하고 다니거든. 그것도 정말 참담하다는 표정을 하고서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기회가 없다 보니까 자기들끼리 절벽 끝으로 밀어내려고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데, 젠더 이슈에 정말로 주목했다면 그렇게 쉽게 얘기할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성차별을 시정하지 못한 걸 반성해야 하는 거잖아. 너무 엉뚱한 반성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진짜 만약에 취업 문제를 비롯해서 청년 세대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기회 불균형이 해소된다고 해서 성차별이 말끔히 해소될 수는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설사 두 문제가 어느 정도 유의미한 연관이 있다 해도 성차별 문제를 그것과 독립된 별개의 의제로도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런 해석을 내놓지 않는 것도 나에게는 ‘이 사람들이 젠더 이슈를 정치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구나.’ 생각하게 만들어.
퓨
심지어 기회 부족이라는 문제랑 젠더 이슈를 연결한 걸 스스로 되게 멋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아리
맞아. 내가 이렇게 핵심 구조를 읽었구나, 내가 젠더 이슈의 맹점을 파악하고 말았다. 이런 느낌? (웃음) 그래서 여기저기서 말하는 거 아닐까...
빙봉
나도 기회 부족이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는데,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좀 위험한 얘기일 수도 있고 혹은 너무 부분적인 얘기를 하는 걸 수도 있지만, 솔직히 기회가 안 부족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어떤 사회에서 기회 부족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인 거지. 기회가 대체 얼마나 부족해야 부족한 거야? 모든 사람이 직업을 가지면 덜 부족한 건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월 몇백을 벌면 안 부족한 건가? 이런 식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기회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기회가 없다고 느끼는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더 부족한가를 파악하는 게 정치권의 일인 거잖아. 근데 그냥 '기회를 만들자'라고만 하는 건 너무 말도 안 되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자 이런 소리처럼 느껴져서.. 애초에 기회 부족을 탓하는 것 자체가 너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아리
결국 이대남, 이대녀라는 명명까지 만들어가면서 청년 세대에 주목하는 지금의 흐름에서 정치권이 뭔가 유의미한 해석이나 대안을 내놓는 게 아니라 엉뚱한 분석만 내놓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 같아. 거기에 더해서, 이번 대선에서 이대남이나 이대녀를 실체 있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거기에 호소하는 여러 전략을 활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빙봉
나는 이대남이라는 단어 자체도 문제가 있지만 ‘이대남’이라는 표상과 연결된 목소리들을 계속해서 과대해석하면서 여러 가지 혐오 정서가 강해지는 게 진짜 두렵거든. '이대남'의 공통 정서라고 여겨지는 난민과 조선족에 대한 혐오나, 중국인 혐오 이런 것들을 받아주면서 성차별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종류의 혐오가 계속해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 가장 두려운 것 같아.
퓨
나도 너무 비슷한 생각을 한 게, 이름을 주면서부터 권력이 생겨버렸어. 아까부터 통계나 숫자로 표시되는 결과의 자의성에 대한 얘기를 계속하게 되는데, 그게 사회를 읽어내는 데 있어서 너무나도 납작한 방법이잖아. 게다가 젠더 이슈가 그런 수치화된 문제로 표현되면 문제가 더 왜곡되는 것 같아. 페미니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을 반대해도 되는 '특별한 사상'처럼 여길 수밖에 없는 배경을 만들어주는 느낌이거든. 이번에 같이 읽은 기사들에서도 여러 가지 의제들에 대한 설문을 시도하면서 트랜스 젠더 이슈도 조그맣게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러면서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여성들도 이 지점에서 의견이 갈렸다'는 얘기를 하더라고. 근데 사실 그 수치가 나오기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와 근거들을 제시했을 거잖아. 그런 입장들을 숫자에 끼워 넣는 게 복잡한 진실을 쉽게 가려버린다는 생각이 들어. 수치화를 통해 20대 남성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해주고 말도 안 되는 의견까지 서사화해주는 것 자체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싶어.
아리
빙봉이랑 퓨의 우려를 너무 잘 보여주는 게 윤석열 후보가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만 올렸던 사건이라고 생각해. 사실 이전에도 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의심은 해왔지만 그걸 자기 게시물로 당당하게 올린 건 또 다른 문제잖아. 나는 너무 충격적이었어. 그게 표가 될 거라는 계산도 당연히 있었을 거고, 그렇게 혐오 정서에 기댄 일곱 글자가 본인의 공약으로 셈해질 수 있는 중요한 아젠다인 것처럼 내세웠다는 게, 심지어 지금 가장 지지율이 높은 대통령 후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진짜 충격적이었던 것 같아. 이대남의 목소리에 주목하겠다는 시도의 결과가 결국엔 일부 20대 남성들도 그렇고, 심지어 대통령 후보까지도 혐오 정서에 기반한 발언을 자신의 '의견'인 것처럼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잖아.
퓨
심지어 딱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만 올린 것도 자기 나름대로는 20대 감성에 맞춘다고 그렇게 한 것 같아서 진짜 별로야. 여러 가지 근거를 대며 공들여서 여성가족부 폐지해야 한다는 글을 썼어도 화가 났을 텐데... 에휴.
아리
그 후에도 진짜 열받았던 게, 이준석이 ‘지금 여성들이 아젠다 형성을 못 하고 너무 공허한 구호만 외친다.’ 이런 말을 비판이랍시고 했거든. 진짜 어이가 없더라. 아무리 파편적으로 들렸다 한들 그 목소리를 잘 모아내서 아젠다를 만드는 게 정치인의 역할인 건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도 충격이고. 더 웃긴 건 ‘여성가족부 폐지!’, ‘사드 추가 배치!’ 이런 구호만 던져놓는 후보를 가진 주제에 ‘구호만 외치는 여성들, 너희가 정치화되지 못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정말 한심했어.
이대남, 이대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사실 우리가 ‘정치’에 환멸과 피로를 느낀 건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욱이 이런 피로감과 ‘소외되었다’는 감각은 이번 대선에 국한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다양한 정치 의제의 등장을 바라면서도, 스스로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번 대선을 비롯해서, 그간 정치판에서 아무런 반성 없이 지속해 온 성차별과 여성 혐오를 되돌아보고 여성 유권자들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젠더 이슈와 여성의 존재를 말하는 데 꾸준히 게으른 자세를 보여 온 정치권의 현주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리
나는 이대남 현상이 정치인들에게 여성 의제를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변명이 되어준다는 점에서도 아주 유해하다고 생각했거든. 얼마 전 TV 토론에서도 심상정 후보가 김지은 씨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당내 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잖아. 그런데 이재명, 윤석열 후보가 너무나 당황하면서 ‘그 얘기를 지금 여기서 왜 해?’라는 듯한 표정과 제스처를 보였던 게 너무 씁쓸했던 것 같아. 심상정은 전략적이든 아니든 자기가 여성 의제를 정치 안에서 말할 수 있는 대통령 후보라는 걸 보여준 건데 이재명 후보는 ‘그런 건 나중에 따로 알려주시면..’ 이런 식으로 계속 반응을 했거든. 윤석열 후보도 사과하라니까 하긴 하는데 ‘마음이 다치셨다면’ 이런 쓸데없는 말 붙이면서 잘못된 사과의 정석을 보여주고... (웃음) 기성정치 안에서, 특히 거대 양당이 미투를 비롯한 여성 의제를 토론 거리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로만 생각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 게다가 미투 이후에 페미니즘이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의제가 되었는데도, '이대남'을 비롯해서 몇몇 지지층을 의식해야 한다는 명분이 생기면서 이런 논의를 적극적으로 외면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사실 이런 장면은 내가 유권자로서 어떤 판단을 할 것인지를 떠나서도 절망적으로 느껴졌어. 최대한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하는 대선 후보들도 여성 의제를 회피하고 누군가 한마디만 꺼내도 우왕좌왕하는데, 내가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여성으로서의 목소리를 냈을 때 구성원들이 일동 당황하거나 '그런 소리를 여기서 왜 하냐'는 식으로 반응하면 어쩌지? 싶어서 두렵기도 했어.
빙봉
정치인들이 너무 오래된 정치 담론에만 익숙해져 있는 것도 문제인 게, 우리가 고등학교 때도 정치의 좁은 의미와 넓은 이미, 이런 거 배우잖아. 그런데 지금은 정치를 넓게 생각하기보다 진짜 우리가 아주 옛날부터 ‘정치’라고 여겨왔던 이슈들, 예를 들어 안보나 부동산처럼 자기네가 생각했을 때 거대하다고 생각하는 이슈들에 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페미니즘은 '굳이 왜 이거를 정치적 논의 안에서 하지?' 이런 느낌이 되게 큰 것 같아.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여성들이 정치에 편입되었던 과정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나는 여성들이 계속해서 움직이고는 있지만 이게 정치화가 되지 않는 것 같은 무력감이 생기고 있는 것 같아. 내가 정치에 대해서 ‘난 정치가 싫어’라고 말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실 되게 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되게 활발히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 사람들의 행보가 정치라고 생각하는 남성 정치인들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퓨
확실히 성별 사이에 있는 감성의 차이라는 생각도 드는 게, 여성 정치인들은 항상 여성 의제에 관심을 보이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라는 걸 숨기지 않잖아. 반면에 남성 정치인들이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 오는 건 본 적이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지금 이대남을 호명하는 남성 후보들조차도 이 현상을 남성으로서의 자기 자신과 연관 짓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전혀 아닌 것 같거든. 그보다는 20대의 남성이라는 완전한 타자 집단으로 보는 느낌도 강한 것 같아. 내가 남성이라서 더 여성 20대 여성들보다 20대 남성에게 더 집중한다 이런 것도 아니고, 나는 20대랑은 다르지만 일단 쟤네가 징징대니까 뭐라고 하는지 봐야겠다, 진짜 이런 감정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리
스스로가 청년 세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 이준석조차도, 자기가 그 세대라서가 이 아저씨들에 비하면 내가 훨씬 그들을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 나를 따라야만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이대남에 접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 이대남이라고 불리는 집단이랑 이준석 개인은 정말 다른데도 본인만이 해답을 쥐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 너무 꼴불견이야.
모자
뭐야 예수야?
빙봉
진짜 웃긴 게 이준석이 그렇다고 엄청 젊지도 않잖아. 자기가 진짜 청년 그 자체인 것처럼 구는데 그 정도로 어리지도 않으면서... 나는 얘가 맨날 펨코 어쩌고 하고 다니는 모습이 일부 20대 남성들이 말하는 결이랑 너무 닮아 있으니까 그 정도 나이대인가 생각했는데, 전혀 아닌 거야. 30대 중후반인 거야. 그래서 아저씨 뭐 하시는 거예요... 나이 먹고 뭐 하는 거야 약간 이런 느낌이야.
모자
퓨가 했던 얘기에 덧붙이자면 지금 남성 정치인들이 20대 남성과 자기를 전혀 동일시하지 않고 자기의 남성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는 집단이라고 생각해. 사실 여성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건 정치권이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이었던 역사의 맥락과 관련이 있는 건데. ‘이대남’들은 왜곡된 피해자성만 내세우고 있으니까 그런 현상 자체가 젠더 권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었어.
여기 더해서, 이번 대선에서 이슈가 됐었던 여성들의 선대위 영입에 대해서 같이 얘기를 해보고 싶어. 난 사실 이수정 씨가 국힘 들어갔을 때는 교수로서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신지예 씨가 국힘에 들어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충격이 너무 상당한 거야. 물론 그가 이전부터 여성 의제를 아주 깊이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지적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신지예 씨는 정치판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했을 때도 '페미니스트 시장'이라는 구호로 굉장한 히트를 쳤었고 그게 많은 여성들에게 힘이 되고 응원의 메시지를 주었던 기억이 있잖아. 근데 그런 사람이 자기를 지지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왜 스스로 떠났는지 이해도 안 되고, 그 사람을 정치적 도구로 한 번 썼다가 버린 국힘도 이해가 안 되고, 정말 신지예 씨는 뭘 위해서 들어갔는지 잘 모르겠고, 내가 그 사람에게 뭘 기대해왔는지도 모르겠고,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러워지는 거야.
퓨
나는 거의 배신감까지 들었어.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 것도 아니고, 고작 그 사람한테 표 한 번 줬을 뿐인데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어. 그리고 문득 생각났던 아주 개인적인 일화가, 예전에 이준석이 신지예 씨랑 어떤 대립 구도를 형성할 때 자꾸만 나한테 이런 젊은 정치인들의 젠더 대립 프레임을 대변하라는 식으로 질문했던 남성인 친구가 있는데, 신지예 씨가 국힘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보는 순간 갑자기 걔 앞에서 내가 그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던 장면이 스쳐지나가면서 너무 할 말이 없어지는 거야.
빙봉
나도 이수정 씨가 국민의힘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서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신지예 씨가 들어갔을 때는 내가 열렬한 지지자이거나 당원이었던 것도 아니면서 되게 실망했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었던 기억이 나. 또 신지예 씨가 ‘나는 새 정치를 국힘에서 하겠다’고 인터뷰를 했을 때는 나도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비꼬면서 이야기하고 다녔는데. 그러고 나서 나한테 오는 게 자기혐오인 거야. 일종의 굴절 혐오처럼 느껴졌어. 윤석열 후보가 싫은 건 당연하지만 내가 신지예 씨한테 그 분노를 투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이게 맞나? 싶더라고. 약간 무력감과 혐오감이 이중으로 덮쳐왔다고 해야 되나. 이게 뭐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하는 무력감이 있었고 동시에 내가 또 너무 여자 욕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도 동시에 들고. 아무튼, 되게 혼란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아.
모자
나는 항상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혼란스러운 부분이 또 하나 있는데, 대안 정치를 말하는 사람은 거대 양당에 속해 있지 않았으면 좋겠는 거야. 그냥 거기 들어가면 다 오염된 것 같고. 아마 신지예 씨가 민주당 들어가도 지금처럼 '진짜 미쳤네' 이건 아니었겠지만, 민주당에 들어갔어도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를 계속 생각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런 면에서 이번에 추적단 불꽃 활동가 한 분이 민주당 들어가셨잖아. 그분 인터뷰를 하나 봤었는데, 여성의 목소리가 그냥 선거철에 한 번 쓰이고 버려지지 않도록 자기가 노력하겠다고 얘기하셨더라고. 물론 거대 양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와 함께 일하면서 여성의 목소리를 얘기하는 것도 분명히 필요한 일이지만, 꼭 거기 들어가야 했을까 이런 고민을 많이 했어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
아리
나는 앞의 이수정, 신지예 씨랑은 다르게 추적단 불꽃 활동가분이 민주당 들어간 거에 대해서는 배신감이나 오염됐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아. 왠지 모르게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고 얼마나 많이 고민해서 결정했을까, 이런 생각? 근데 나는 그 개인의 선택에 대한 분노가 생기기보다는 정말 기성정치 안에 편입되어야만 여성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무력감을 느꼈던 것 같아.
퓨
나도 신지예 씨의 사례랑 추적단 불꽃은 좀 다르게 느껴졌는데, 내가 신지예라는 사람한테 왜 그렇게까지 실망감을 느꼈나 생각해보면 그가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 같아. 신지예 씨는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 같은 걸 다 따져서 국힘에 합류하기로 선택한 거잖아. 그 사람이 실익을 다 따져보고 계산해서 나온 결과가 국힘 합류라는 것 자체가 너무 슬프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도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고. 또 우리가 기대를 걸 만한 정치인들이 국힘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나를 어느 정도 대변해 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더이상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분노와 무력감이 한층 커지는 것 같아. 근데 추적단 불꽃 사례는 좀 다르다고 느껴지는 게, 물론 공적인 문제와 관련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나한테는 여전히 한 개인으로 생각되거든. 그래서 내가 정치인이라고 인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에서 이런 감정의 차이가 나오는 것 같기도 해.
빙봉
나도 마찬가지로 추적단 불꽃에 실망하는 감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았거든. 그런 마음이 들고 나서 그러면 이 사람이 어디에 갔으면 내가 기뻤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솔직히 말해서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지금 대선이라는 이 판국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하나도 없고 크게 애착이 가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어. 결국, 내가 추적단 불꽃의 선택이 기쁘지 않았던 건 개인의 선택에 대한 판단 때문이라기보다는 대선에 대한 기대감과 애정이 없기 때문이었던 거지.
아리
조금 다른 사례로 넘어가서 이야기하자면, 이번 대선 판에서 김건희라는 사람이 엄청나게 핫하잖아. 나는 일단 이 사람에 대한 검증 자체가 전부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거든. 허위 이력부터 시작해서 문제가 많은 인물인 건 사실이고, 또 윤석열 후보나 그 배우자가 얼마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사례들도 너무나 많았잖아. 그런데 검증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쥴리 의혹’ 운운하면서 성접대를 한 적이 있다는 둥, 얼굴이 어떻게 변했다는 둥, 여성혐오적인 사고에 기반한 품평에 가까운 말들이 돌았던 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하거든. 나한테는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 대선 판의 분위기 자체가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하는 요소인 것 같아. 그리고 김건희 씨한테 검증이라는 명목으로 가해졌던 말들이 명백히 여성혐오적이고 잘못된 것이었다는 거랑은 또 별개로, 김건희도 김지은 씨한테 명백한 2차 가해성 발언을 했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잖아. 이렇게 여성혐오는 어떤 인물의 선악을 떠나서 만연한 문제인데, 이걸 제대로 지적하는 사람이 정치인 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너무 열받게 만들어. '이대남 목소리만 듣고 이대녀에겐 관심도 없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행보들만 여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반복적으로 여성 혐오를 마주하고 그걸 시정할 노력조차 안 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돌리는 일이 많은 것 같아.
퓨
우리 엄마도 김건희 씨를 정말 싫어하시거든. 나도 윤석열을 절대 안 뽑을 생각이니까 같이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마가 "나는 저 사람이 우리나라의 ‘국모’가 되는 걸 견딜 수 없어" 이러는 거야. (웃음) 나도 이 사람에 대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평가의 일부에 대해서 분명히 함께 분노하고 있지만 방금 아리가 말해준 것처럼 진짜 분리해서 생각해야 되는 문제들이 분명히 있잖아.
아리
자기의 정파나 정당을 기준으로 한 정치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거랑 여성 혐오를 혐오라고 말하는 걸 분리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일은 정말 너무 많은 것 같아. 가장 크게 느꼈던 건 박원순 전 시장이 죽었을 때였어. 박원순이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하는 건 당연히 가능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그 사람이 성폭행 가해를 했다는 것도 당연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는 건데 권력형 성폭력의 문제를 지적하면 이 사람의 모든 과업을 부정하는 일인 것처럼 반응하는 지지자들이 너무 많았던 게 문제라고 생각해. 명백한 2차 가해를 고인에 대한 의리이자 추모라고 믿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되게 지쳤던 기억이 나.
사실 김건희 씨한테 ‘쥴리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도 정의당에서 이걸 비판했었거든. 의혹의 진위를 떠나서 여성의 ‘행실'을 품평하거나 ‘국모’ 이런 프레임을 들이미는 것 자체가 여성 혐오적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 변했다는 둥, 예전의 정의당이 아니라는 둥, 국모를 뽑는데 검증이 필요한 건 당연하다고... (한숨)
빙봉
무슨 중전 뽑냐고.
모자
‘국모’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너무 급속도로 한국에 자리 잡다 보니까 과거의 왕정제 시대와 현재의 민주주의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는 생각을 항상 하거든. 국모라는 말도 대통령을 왕처럼 생각하는 분위기가 분명 있기 때문에 나오는 말인 것 같아. 물론 대통령의 권한이 굉장히 많지만 사실 비정규직 공무원일 뿐인데. 또 국회의원들의 경우에도 우리가 무언가 요구할 때 내 목소리가 정치적인 발화가 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내 목소리를 국회의원 중에 누군가가 들어서 이걸 정치판에서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잖아. 그런 것 자체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라고 항상 생각해왔어. 그래서 우리가 이 판에서 언제나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고 무력해지고, 내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저 나라님들이 얘기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절망하고 이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은 거지. 나는 우리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명확히 알 필요가 있고, 그걸 벗어나서도 내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무언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고민이 있어.
아리
완전 동의해. 그리고 나는 여성혐오를 인지하지 못하고 성차별을 시정하지 못하는 후보라면 누가 덜 나쁜지를 따질 것 없이 똑같이 싫거든. 누군가는 정치는 원래 차악을 선택하는 거라는 논리를 펼치기도 하지만, 사실 둘 다 내 입장을 조금도 대변해 주지 않으면 나한테는 똑같이 그냥 최악의 선택인 거잖아. 그런데 이런 선택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아.
빙봉
나도 민주당이랑 국힘 둘 다 진짜 싫고, 사실 그래도 그동안은 민주당이 그나마 낫다고 생각해왔는데 이재명 후보가 인간적으로 진짜 싫거든. 이번 대선에서 닷페이스랑 시리얼이 페미니즘 채널이라서 안 나간다 이런 식으로 회피하고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자체가 진짜 너무 불쾌하다고 생각해서. 어쨌든 나에게는 두 선택지 모두 최악이라서, 선거가 진짜 나한테 요즘 되게 커다란 고민거리야. 정말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나는 사실 누군가를 당선시키지 않는 게 선거에서 나의 목표라고 생각해 왔던 것 같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당선시키지 않고 싶은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그냥 내 소신대로 투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 이번 선거에서만큼은 차악을 선택하라는 말 자체 아예 성립이 안 돼서, 정말 선택지가 전혀 없다고 느끼는 상황인 것 같아.
퓨
나도 요즘 집에서 진짜 자주 듣는 소리가 '심상정 뽑으면 윤석열이 돼!', '나도 이재명이 싫지만, 윤석열이 대통령 되는 꼴은 못 보니까 제발 이재명을 뽑아라' 이런 얘기를 맨날 듣고 사는데. (웃음) 나는 '캐스팅 보터'[4]로서의 내 한 표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부터 안 들게 됐어. 누가 되는지 한번 보자, 내가 안 뽑아도 둘 중 하나는 되겠지, 이런 마음이라서.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 내 표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면, 그들이 나를 ‘이대녀’로 프레이밍하고 나에게서 그런 경향성을 찾으려고 할 때, 그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리
나도 그런 생각 진짜 많이 해. 적당히 타협해야 하는 건지 내 소신을 지켜야 하는 건지 고민을 정말 많이 하고, 안 될 걸 당연히 알면서도 소수정당을 항상 뽑는 이유는 내 손으로 둘 중 한 명을 뽑는 게 정말 끔찍하게 싫어서야. 정말 도저히 찍을 수가 없어. 내가 그 둘 중 한명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참을 수가 없어. (웃음) 지난 총선 결과 중에 되게 인상적이었던 게, 여성의당이 사실은 정말 졸속으로 만들어졌잖아. 물론 그것 자체도 되게 유의미하지만, 공약도 좀 부실하고 체계가 잘 정비되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되게 득표율이 높았던 게 놀라웠어. 내가 그 정당을 지지하진 않지만, 그 수치를 보고 ‘그동안 선택지가 없다고 느꼈던 사람이 정말 많았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
모자
사실 나만큼은 대안 정당에 힘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계속 들어. 나도 집에서 아빠가 ‘이재명을 찍어야 윤석열이 안 된다’고 엄청 얘기하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누가 되나 파국은 마찬가지고 결국 둘 중 한 명이 5년간 대통령으로서 정치를 할 텐데, 우리가 이번 5년만 사는 건 아니잖아. 좀 더 넓게 크게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또 이번 대선에서 대안 정당이 유의미한 득표수를 얻지 못한다면 그들 이후에도 도전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너무 걱정돼. 그래서 나라도 표를 줘야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거든.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힘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론 거대 양당 후보들 외에 다른 후보들도 완벽히 맘에 드는 사람이 없고, ‘그나마 이 사람이 낫다’ 정도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지지를 보여줘야 다음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퓨
중요한 건, 우리가 지지하던 후보가 당연히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이재명이나 윤석열 후보 중 누군가에게 표를 던진다면, 결국에 내가 거기에 표를 줬다는 결과만 읽힌다는 거잖아. 내가 여기서 어떤 고민을 해서 뽑았다는 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을 거란 말이지. 그런 점도 내가 저들에게 절대 표를 주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게 만드는 요소인 것 같아.
이 좌담은 ‘이대녀/이대남’이라는 구도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꼬집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의 주위를 맴돌며 갖가지 고민을 털어놓다가, 청년 세대에 주목하겠다면서 ‘성별 갈라치기’를 일삼고 엉뚱한 분석을 내놓는 정치권의 모습에 실망스러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서로가 느끼는 갑갑함과 분노에 박수를 치며 공감하기도 했고,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오가는 이야기 사이사이로 깊은 한숨이 파고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좌담의 끝무렵에 이르러서는, 서로에게 '지치지 말자'는 격려를 건네며 옅은 희망을 주고받았습니다.
우리에게 20대 대선을 지켜보는 일은 분노하고, 실망하고, 체념하는 것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러니 때로는 스스로 ‘정치에 무관심하다’며 눈을 돌리기도 하고, 그 누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눈을 질끈 감아버리기도 했지만, 우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고민과 선택을 지속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좌담이 읽힐 무렵이면 20대 대선이 이미 마무리되었겠군요. 하지만 이번 선거를 지켜보며 품었던 생각과 고민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대녀’와 ‘이대남’이라는 이름이 너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새로운 호명으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꽤 괜찮은 활로를 찾아가고 있다고 믿는 정치인들의 기대와는 꽤 많이 다르지요. ‘이대남/이대녀 마음 사로잡기’가 선거를 위한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남, 이대녀라는 이름만 외치며 엉뚱한 분석을 시도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건 곤란합니다. 기존의 정치 지형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정치 의제를 확장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대녀와 이대남이 보여주는 것은, 젠더 이슈와 같이 기존의 정치지형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들이 있음을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20대 대선의 시간을 기점으로, 공허한 이름이 아닌 성실한 물음을 던지는 정치가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위원 아리(ououpp@naver.com)
[1] <시사인>, "'이대남'과 '이대녀', 재보궐 선거 결과가 갈린 이유", 2021.06.03일자.,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692.
[2] <시사인>, "20대 남자, 그들은 누구인가", 2019. 04. 05일자,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344&page=3&total=58.
[3] <시사인>, "[20대 여자 현상] “약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차별받고 있다”", 2021. 08. 30일자,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420.
[4] 본래는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투표자를 의미하며, 선거 국면에서는 주로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세대/지역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지금가지 한국에서는 지역투표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충청권, 강원도 일부 지역 등 경합지역이 ‘캐스팅 보터’로 불렸다. 그러나 ‘세대투표’ 경향이 짙어진 이번 대선에서는 특정 지역보다도 청년 세대가 ‘캐스팅 보터’로 언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