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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6호 13화

#3 종말은 차별 금지를 말하지 않는다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편집위원 빙봉

by 연희관 공일오비

1.

어느 날, 마음이 힘들어 종교를 가져보려고 했다던 내 친구는 교회에 가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교회에서의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내가 왜 이젠 교회에 가지 않냐고 묻자, 내 친구는 그랬다. 어느 날엔가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은 뒤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고. “서명하고 가세요.” 그 종이엔 ‘동성애 반대 서명’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내 친구는 그 길로 그 교회엔 다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집에서 기도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그런 거에 서명하라고 할 수 있지? 우린 그때 스물인가 스물하나였고, 그게 놀랍지 않은 일이라는 건 몇 해가 지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몇 해 후, 차별과 관련한 교양 수업을 필수 교양으로 지정하겠다고 선언한 연세대학교 모 대학교 앞에 정체불명의 세력들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난민을, 동성애자를 대학교에서 포용해서는 안 된다고 소리 높여 말했다. 연세대학교와 같은 기독교 대학교에서는 성경에서 죄악으로 일컫는 동성애자와 이도교인들을 포용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수업은 그저 아주 일반적인 의미의 차별 금지와 난민 혹은 성소수자 포용을 말하는, “상식”을 가르치는 “교양”수업에 불과했다. 어찌 됐든 시위는 대대적이었고, 교환학생 신분으로 타국에서 그 소식을 접하고 있던 나는 그냥... 솔직히 말해 밍숭맹숭했다. 이미 망할 대로 망했다는 자포자기의 마음이 가장 먼저 들었다. 무엇이 망했는지를 명명할 순 없었지만, 무언가가 무너져 내려 ‘망하고 있다’는 감각만큼은 선연했다.


2.

2022년에도 ‘차별금지법’이라는 법이 제정되지 않는 건 섬뜩하다. 법안의 이름이 ‘개인이나 집단의 특성을 이유로 부당하게 구별하여 대우하지 말고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1]하자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이랑 조금은 관련이 있을 것도 같고 (중략) 아무튼 그런 복잡한 법’도 아니고 ‘차별금지법’인 법안이, 그러니까 차별을 금지하자고 간결하게 말하는 법안이 2007년 이후로 발의 상태에만 머무르고 있다니.


날 더 두렵게 한 것은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의 발의를 방해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꽤나 풍부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는 이들의 의견보다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은 구구절절하고 기발하며 다양하다. 이슬람이, 중국인(혹은 조선족)이, 흑인(혹은 소수 인종)이, 여성이, 장애인이, 동성애자가, 아이들이 이미 잘못을 저질러 자신들이 피해를 보고 있으니 차별금지법은 오히려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의 잘잘못을 근거로 그들을 더 차별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기가 찬다. 그리고 소름이 끼친다.


3.

난 솔직히 말해 코로나 정도의 질병이면 세계를 종말로 이끌 줄 알았다. 같은 공간에서 숨만 쉬어도 감염되는 호흡기 질환이라니. 그리고 그걸 햇수로 사 년째 전 세계가 동시에 앓고 있다니. SF 소설에 등장하는 완벽한 지구 종말의 클리셰라고 해야 할까? 난 삽시간에 도시가 약탈자들로 점거되고, 사람들은 집 밖에 절대 나오지 않고 숨죽여 지내면서 회사고 학교고 모든 것이 마비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기대했던 지구 종말, 그것도 ‘감염병’이라는 클리셰로 달성되는 지구 종말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구는 망하지 않았다. 지구는 이전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자전과 공전을 해내고 있으며 사람들은 집 밖에 ‘드물게’ 나갈 뿐 여전히 밖에 나가 여행을 하고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고 공연을 즐긴다. 바이러스가 두렵긴 하지만 그뿐이다. 세계는 좀처럼 쉽게 망하지 않는다.


4.

그러나 세계는 쉽게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집 안에 틀어박혀 비거니즘과 환경 보호를 비웃는 사람들. 중국인과 일본인, 유색인종에 대한 원색적 비난을 쏟아내고 낄낄대는 사람들. 동성애자를 존중하는 척하면서도 제 곁에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심지어 제게 고백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우스운 망상의 나래를 펼치며 혐오를 드러내는 사람들. ‘진상 잼민이’를 키우는 ‘맘충’을 손가락질하며 조작된 일화들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유포하는 사람들. 거리에 돌아다니는 비둘기에게 돌을 던지고, 고양이와 강아지에게 독극물이 든 사료를 먹이며 그걸 유희거리로 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세계는 쉽게 망할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반성 없이 자신을 피해자와 동치하면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그렇기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자신들은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세계가 조금은 더 빨리, 쉽게 망해야 하는 게 아닐까?


차별을 금지하자는 말에까지 반기를 드는 이들이 대다수인 사회는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아니, 종말을 맞이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편집위원 빙봉(joliebin98@naver.com)




[1] 차별의 정의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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