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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6호 14화

#4 종말은 다른 일상을 말하지 않는다

[끝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편집위원 아리

by 연희관 공일오비

전례 없는 감염병의 공포를 맞닥뜨린 지도 어느덧 2년째, 이제는 온 국민이 방역지침에 협조하여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표만이 머릿속에 선명히 각인되었다. 정부와 언론은 일제히 ‘일상 회복’이라는 수사를 내세우고 있다. 확진자 수가 최고치를 경신할 때마다 ‘일상 회복’의 요원함을 경고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정부는 ‘소중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백신 접종을 서둘러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대한민국에는 위기 극복의 DNA가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정부 주도의 방역과 전국민적 차원의 협조를 통해 일상 회복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불어넣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일률적인 방역지침에 지쳐가는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 ‘모두가 힘든 시기’라는 수사까지 동원되며, 결국 재난 회복의 과정은 이전의 행복했던 일상 회복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단선적 서사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사방에서 들려오는 ‘일상 회복’이라는 수사는 어딘가 공허해 보인다. 지난 2년간 영업 제한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고 생존을 위협받는 소상공인들의 사정, 방역을 빌미로 공공장소에서 강제퇴거의 위험에 노출되는 홈리스와 완벽히 '내부'에 감금되어 지역사회와 격리되어야 했던 정신장애인 등 무수히 많은 불평등의 사례가 전면에 드러났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껏 각자가 영위해 온 일상이 천차만별이며 그것을 ‘회복’하는 모습도 제각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학습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합심하여 회복해야만 하는 소소한 일상’은 자꾸만 하나가 된다. 갖가지 불평등이 날마다 추가되는 상황임에도, 회복해야 하는 일상의 모습은 끝없이 낭만화하고 추상화되는 것은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의 중요성을 탈각시킨다. 일상회복을 강조하는 광고나 캠페인은 마스크를 벗고, 자유롭게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여럿이 모여 식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부각하는 장면만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며 과거의 일상의 회복하는 것이 재난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설파한다.


우리가 하염없이 기다리는, 되찾아야만 하는 ‘일상’은 과연 재난을 극복하는 열쇠일까.


존 C. 머터는 그의 저서 <재난불평등>에서 재난이 이전부터 존재하던 편견과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기회를 제공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소수의 기득권층은 재난을 ‘골칫덩어리 인간들’, 즉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왔던 소수자들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거나 기존의 불평등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팬데믹 상황에서 쉽게 낙인을 부여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이전부터 사회의 ‘골칫거리’로 여겨지던 이들이 대부분이다. 차별의 역사가 누적된 집단으로 보기 어려운 신천지의 경우에도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프레임이 전제되어 있었기에 더욱 원초적이고 집단적인 형태의 분노 표출이 가능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팬데믹 상황이 차별과 배제를 강화하는 일에 공모하는 것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제사회로 시선을 확장해보아도, 팬데믹 상황의 공포와 불안을 바탕으로 국가 간의 경계를 강화하며 외부의 적을 지목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바이러스가 발견되었을 때에도 많은 나라가 국경을 폐쇄하거나 여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한국에서도 코로나19가 중국에서부터 확산되고 있음이 밝혀짐과 동시에 ‘중국인 입국을 막아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게시되었고, 최종 76만 명의 동의를 얻으며 마무리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은 국경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전 세계의 이동성이 놀라운 수준으로 증가한 시대에 국민국가 단위의 대응이 얼마나 많은 한계를 가지는지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왜인지 세계의 여러 국가들은 ‘국경’의 존재감을 강화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백신을 개발한 ‘선진국’들은 잔여 백신까지 독점했고, 결국 다른 대륙에 비해 백신 접종률이 현저히 낮은 남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신종 변이 바이러스가 출현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코로나19 변이가 보건 상황이 나쁘고 백신 접종이 부진한 지역에서 나타나기 쉽고, 언제든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나 퍼질 수 있는 상황임이 입증되었는데도 범국가적 대응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오미크론 변이의 등장 이후로도 수많은 국가들이 국경을 폐쇄하며 분절된 형태의 생존을 모색하는 것이 각국의 일상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위드 코로나’ 국면으로의 전환이 논의되던 최근까지도, 전염병을 확산시킨 재난의 ‘원흉’을 지목하여 단죄하는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는 동안 중국, 신천지, 개신교 극우 집단, 이태원 클럽을 방문한 성소수자, 민주노총 등 ‘문제집단‘을 상정하고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마주했다. 하지만 일상을 회복하고 싶다면 모두가 인내심’ 갖고 협조해야 한다는 합의가 점차 공고해지면서, 일률적 방역지침이 포용하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를 외면하는 일이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팬데믹 상황이 타자에 대한 혐오와 무관심을 마음껏 표출하는 일의 알리바이가 되어주고 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을 소거한 채 ‘집에만 머물러야 하는 갑갑한 상황’을 벗어나 (지나치게 낭만화된) ‘이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외침을, 우리는 정말 희망적인 메시지로 읽을 수 있을까.



편집위원 아리(ououp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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